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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에 관련된 두 가지 잡설
게시물ID : history_118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5
조회수 : 94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10/04 22:01:02
1. 근대에 대한 여러 가지 시각

근대화라는 것은 근대적 성격을 띠게 됨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근대, 혹은 근대성(modernity)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직까지 합의된 바가 없습니다.

근대성에 대한 규정은 정말로 백 명의 논자가 있으면 백 명의 이론이 있을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몇 가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논의들을 소개하는 데서 그칠까 합니다.

정치적 근대를 규정함에 있어 정치학 분야에서 가장 흔한 기준이 되는 것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입니다. 유럽의 질서를 격변시킨 30년 전쟁이 끝나며 맺어진 이 조약을 통해 1. 국가 주권의 불가침성이라는 개념이 완성되었고 2. 지도상의 국경선이라는 개념이 확정되었으며 3. 정교상의 분리라는 원칙이 확인되었다는 점에 근거한 규정입니다. 이를 통해 정치 질서는 세속국가(secular state),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 국민국가(nation state)라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제(諸)국가들의 집합 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근대성이라는 규정이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반도는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근대화의 출발을 알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이것은 첫째, 역사를 국가라는 공식적 단위에 국한시켜 인간 집단 전반의 운동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둘째,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국가의 성격들 가운데 본질적 변화와 표면적 변화를 구분하는 기준을 이론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의 한계를 가진 것으로 지적받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경우 근대를 부르주아 계급지배로서의 자본주의라는 관점에서 규정하죠. 그는 사적 유물론을 통해 인류 역사가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통해 전개된다고 밝히고, 중세적 모순의 폭발이 각종 혁명을 통해 실현되어 근대가 열렸다고 봅니다. 이 관점에서 근대성의 본질은 바로 이중적 자유로 정의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신분적 자유와 생산수단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와 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라고 할 수도 있겠죠. 마르크스는 이 이중의 자유가 대중에게 주어지는 것을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전제라고 말하며, 이것이 주어지는 과정을 꽤 상세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후자의 자유─굶어죽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과정은 꽤나 혹독했는데, 대체로 농지를 갖고 전통적인 공동체 안에서 보호받고 있던 중세적 신민은 그 농지를 빼앗기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도시로 내몰림으로써 대규모의 산업예비군을 형성, 초기 자본주의 발전을 추동했다고 하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일제가 확실히 한반도를 '근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에 대한 흔한 반론은 여러분 모두 익히 들어보셨을 테고, 재반박엔 엄청난 분량이 할애되어야 할 테니 그냥 생략할게요.

종속이론의 뒤를 잇는 적자로 평가되는 대가 지오반니 아리기의 경우 근대를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로 규정합니다만, 자본주의의 근간에 대한 이해가 다소 다릅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본질적으로 금융화, 즉 생산이 화폐에 의해 지배되는 과정이라고 봐요. 이런 관점에서 그가 생각하는 근대의 시작은 르네상스 말기인 15세기부터입니다. 북부 이탈리아의 대규모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세계 경제에서의 생산관계를 지배하게 되고, 이러한 지배권의 부침이 반복되며 이후 네덜란드 - 영국 - 미국으로 이어지는 헤게모니 이동이 성립되었다고 보고 있죠.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비 헤게모니 지역의 '근대화'라는 것은 사실상 어불성설의 얘기가 됩니다. 비 헤게모니 지역에서 뭘 어쨌건 간에 헤게모니 국가의 지배력과 근대성이 확보되어 있는 이상 세계는 하나의 근대를 형성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죠.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죠? 사실 이 모든 근대에 관한 썰들을 전부 이해하고, 근대 혹은 근대화에 대해 얘기하는 여러 논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근대성의 규정을 파악/논박한다 해도, 큰 의미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근대에 대한 규정이라는 것은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규정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현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싶느냐에 따라, 근대성이라는 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신세인 셈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근대성에 관한 이해가 자기모순적이라거나, 사실과 명백히 다른 것을 근거로 한다거나 하면 곤란하겠죠.



2. 역사에 있어 동시성과 인과성의 문제

사실 이건 역사학의 굉장히 근본적인 문제이자, 동시에 근대 인식철학에 있어서도 상당히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어떤 복수의 사건이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인과성이란 착각의 산물이며 사고의 습관(habit of thought)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인식 체계는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뒤이어 다른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인과관계로 묶어 인식하도록 습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담은 아시죠? 흄은 이러한 인과 수립이 논리적으로 정당화 불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하여, 인간이 결코 어떠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 놓으면 물이 끓는다고 했을 때, 대체 두 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요? 두 사건을 제아무리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확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귀납법의 본질적 한계로, 우리가 흰 까마귀의 비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지구의 자전에 의해 해가 동쪽에서 떠오른다는 사실을 알지만, 정말 어느 순간 해가 서쪽에서 떠오를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있어서는 이 문제가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왜냐면 역사란 그 자체로서 고유한 것이며 결코, 그 어떤 방법으로도 반복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에서 어떤 사건들이 연속해서 발생한 시간축을 고찰한다 했을 때, 그 시간축에서의 사건들을 마치 불 위에 주전자 올려놓듯 반복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인간의 의도라는 것도 여기선 도움이 되지 않는데, 왜냐면 어떤 의도가 항상 어떤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겐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무의미하고 고립된 여러 가지 사건들의 쓰레기더미만이 남겨져 있을 뿐입니다.

물론 상황을 이 상태에서 그냥 내버려두면 인류는 많이 곤란해지겠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흄의 이 본질적인 물음에 어떤 형태로든 답을 하기 위해 꽤나 노력했답니다. 여기엔 정말이지 다양한 답이 있지만, 개중에 가장 많은 분들께 설득력 있다고 여겨질 만한 것은 라카토쉬의 과학철학론이겠군요.

아까 예로 들었던 불 위의 주전자와 끓는 물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시 떠올려 주세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두 개 사이에는 어떠한 필연적인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즉 인과관계가 그 자체로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발명은 결코 공상이나 착각이 아닌데, 왜냐면 이 발명의 과정에서 인간은 언제나 특정한 설계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해 인간이 인과성을 부여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개별적 발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원인일 수 있고 무엇이 그에 따른 결과일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에 근거해, 그 규정 내에서 서로 모순되지 않고 정합적이어야만 한다는 자기 스스로 설정한 법칙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이러한 인과성 부여의 자가 법칙을 라카토쉬는 '프로그램'이라고 부릅니다.

불 위의 주전자와 끓는 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근대 과학의 프로그램 내부에서 원인일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운동이고, 결과일 수 있는 것 역시 물질의 운동입니다. 즉 물질의 운동과 물질의 운동 사이에 특정한 역학적 관계가 성립할 수 있고 오직 그것만이 인과관계일 수 있다는 법칙을 설정해 놓는 겁니다. 이러한 법칙 하에서 인과관계는 필연적으로 불과 물, 즉 에너지 투입과 분자 운동 사이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라카토쉬는 인간의 인과성 인식에 있어 발명되는 것은 인과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과관계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법칙, 즉 프로그램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많은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개중에 자신의 법칙을 스스로 어기지 않으면서 더 많은 대상을 더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진보적' 프로그램이고, 더 많은 대상을 설명하기보다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데 급급한 것을 '퇴보적' 프로그램이라고 하죠. 라카토쉬에 따르면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기 위해선 보다 더 진보적인 프로그램에 따르는 법칙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봅시다.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식민화되었다는 것, 한반도에 철도가 부설되고 공장이 늘어났다는 것, 그리고 한반도가 근대화되었다는 것. 이 사건들은 서로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서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에 인과관계를 설정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프로그램에 따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의 프로그램이 진보적일까요, 퇴보적일까요? 거꾸로 저 인과관계를 부정하고 다른 인과관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엔 어떨까요? 단순히 상처입은 민족적 자존심을 토로하고 비명 지르는 것보다는 더 재미있는 접근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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