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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연 고등학교 은사님의 글
게시물ID : society_64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션임파
추천 : 1
조회수 : 17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12/06 17:20:44
아래 글은 조동연 교수의 고등학교 은사이신 박민규 선생님의 글인데 허락 없이 옮깁니다. 

문제 시에는 삭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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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 못 이루게 하는 졸업생 J 이야기]

1.

그 여중생은 본래 서울 아이였다. 기구한 사연이 있어 여러 중학교를 전전하며 학업을 이어가야 했다. 부산 Y여중은 그녀가 고교 진학 전 마지막으로 다니던 (일곱번째) 중학교였다. Y여중 교사들은 부일외고 교감과 입학부장에게 한 목소리로 3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도록 아이를 선발할 것을 추천했다. 이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한다면 절대 결정을 후회하시지 않을 거라며.

(학교 자체 장학규정에 따라 3년 간 학비 부담없이 다닐 학생을 선발하던 시절이었다. 현재는 전국 외고·국제고가 정원의 20퍼센트를 사회통합전형으로 의무 선발하며, 특히 경제적 배려가 필요한 기회균등 입학생 전원에게 정규 학비뿐 아니라 방과후학교 수업료, 체험학습비, 기숙사비, 급식비 등 일체가 지원된다.)

2.

작은 체구의 여학생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교생활을 모범적으로, 능동적으로 했다. 인성, 학업, 교우관계,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아이였다. 모든 교사가 그를 아꼈고,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길 응원했다. 친구들과도 돈독한 우정을 발전시켰고 신망을 얻어 3기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그녀는 본래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은사의 조언으로 육군사관학교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녀의 가정 형편상 일반 대학을 다니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으니, 학비 문제도 해결되고 직업도 보장되는 사관학교에 진학할 것을 은사가 권유한 것이다.

3.

그녀가 육사에 진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 한 분이 모교로 연락해 물어보았다. ‘아무개 생도가 고교 시절 영어 공부를 어떤 방법으로 하였나요?’ 이례적인 질문을 한 이유는, 동기들보다 영어 실력이 확연히 나아서 그녀의 공부 방법이 궁금하고, 이를 학생 지도에 참고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학창 시절을 잘 아는 이가 답하였다. ‘아, 아무개 학생 말씀이지요? 그 친구, 자판기 커피로 영어 공부했습니다.’ ‘예?’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처럼 사교육을 받을 형편이 못 되었던 그는, 영어 공부를 위해 원어민 교사실에 매일 같이 들러 영어 회화를 연습했다. 너무 자주 찾아가는 게 원어민 선생님께 죄송해서 종종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간 걸 두고, 모교 선생은 교수에게 그리 답했던 것이다.

4.

체구가 작고 몸이 허약하던 그녀는 육사에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일찍 움직이고 더 많이 연습했다. 그리고 장교로 임관한 뒤 재미교포나 유학생 출신이 아닌 순수 국내파로서 자이툰 부대, 한미연합사, 육군 본부 등에서 영어 통역, 영어 브리핑, 영어 행사 진행을 담당하는 재원으로 성장하였다. 그녀의 중학교 시절 모습을 지켜본 Y여중 교사들이 이구동성으로 ‘3년 장학생으로 이 아이를 꼭 선발하라’고 부일외고에 추천한 것처럼, 자신에게 맡겨지는 소임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매 순간 남보다 두배, 세배 노력하고 절차탁마의 자세로 살아가던 그녀는 소령 시절 국가의 지원 하에 하버드 케네디 스쿨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5. 

하버드대로 떠나기 한 달 전쯤 당시 국제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내가 그녀에게 모교에 특강을 오라고 초청했다. 그는 상부의 허가를 받은 뒤 기꺼이 초청에 응하였다. 3기 졸업생 조아무개가 후배들을 위해 특강 온다는 공지가 있자 당일 강당에 업무상 관련 없는 교사들도 대부분 내려와 참석했다. 그녀는 그만큼 교사 모두의 전폭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는 동문이었다. 특강을 기획하고 주관하던 나는 질의응답 코너에서 애를 먹었다. 후배 재학생 몇 명이 차례로 질문할 때 그녀가 너무 구체적이고 자세한 답변을 하는 바람에 예정된 시간 계획에 따라 특강을 진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이의 답변을 자르며 간추리기가 어려웠는데, 질문을 한 후배에게 눈을 맞추며 진심을 다해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타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순간이며, 나는 제자들의 질문에 저리 진정성 있게 답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 자문한 순간이었다.

6.

행사가 끝나고 배웅하다 들은 이야기인데, 그녀는 특강을 오기 전날도 모교를 찾았다. 저녁 시간 조용히 학교에 와서 운동장 둘레를 걷고 교정을 둘러보았다고 했다. 왜 초청 강연 전날 나에게도, 아니 모교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학교를 찾아 혼자 교정을 거닐고 돌아갔을까, 잠시 궁금했다. 이내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열일곱살의, 열여덟살의, 열아홉살의 자신을 만나고 싶었구나, 라고. 특별히 내세울 것은, 뽐낼 것은 없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 해도, 더 잘 살 수, 더 열심히 살 수 없을만큼 최선을 다했던,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기죽지 않고 어린 두 발로 꿋꿋이 자신의 미래를 향해,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걸어나갔던 그 시간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모교를 찾았던 것이다.

7.

이후에도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녀는 하버드 케네디 스쿨, 로스쿨, 예일대, 외교부 등으로 경력을 이어나갔고, 근년에 전역하고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30대 후반에 이른 그녀는 그 기간 내내 처음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겸손함과 성실한 자세, 바른 인성으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년 전 <시사iN>이 주최한 프로그램에 젊은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 그녀는 자신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게 된 것을 청소년, 청년들과 나누고자 하는 열망이 큰 사람이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프라이버시 문제로 1편에서 그녀의 가정 환경을 자세히 기술하지 않았는데, 단순한 가난이 아니다)의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러저런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살도록 돕고자 하는 순수하고 진지한 열망이 종교적 신념처럼 강하다.

8.

나는 부산광역시 관내 예닐곱 개 진로교육지원센터의 의뢰로 다양한 중학교를 방문하여 학생, 학부모 대상 진로 특강을 하고 있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 와닿는 강연이 되기 위해 졸업생들의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가 인생을 너무 조급하거나 근시안적으로 보지 말아야 함을 마지막에 강조하곤 한다. 특히 자녀의 고교 진학을 앞둔 중3 학부모 대상 강연을 하고 나면, ‘감명 깊었다’, ‘눈물이 나더라’는 문자나 카톡을 받곤 하는데, 내가 소개하는 다양한 졸업생 동문,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조동연 교수다. 물론 사례에 언급하는 모든 졸업생들에게 어떤 의도, 취지에서 소개할 것인지 미리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며, 사진 협조도 받곤 한다. 조동연 교수는 이런 사소한 부탁에도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화답하곤 했다. 모교와 자신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나와의 친분 때문이 아니라 후배 세대에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자신이 기꺼이 활용되기를 원하는 그녀의 심성이 그 바탕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내년에 언제든 연락주면, 모교를 다시 방문하겠노라 내게 약속했다. 그런데...

9.

조동연 교수가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으로 발표되었을 때, 이에 관해 물론 본인과 이야기 나눈 바 없지만, 나는 왜 그녀가 정치에 발을 디뎠는지 그 동기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녀를 영입한 대선 후보 캠프와 정당은 자신들의 취약 지점을 보완하는 이미지 효과(젊은 세대, 여성, 군장교, 미래, 항공우주)를 노렸을 것이다. 반면 조동연은 특정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나 자신이 유력한 정치인으로 성장하는데 주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영입하려는 인사가 내세운 명분이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과 소명 의식에 맞닿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영관급 장교나 대학교수가 갖지 못한 사회적 선한 영향력을, 미래 세대를 위해 발휘할 기회와 역할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10.

누군가는 정치적 경력이 전무한 조동연을 영입한 특정 정당을 비판하고, 그 자리를 수락하여 난도질 당하는 신세가 된 조동연을 어리석다 말하지만, 나는 그녀가 왜 낯선 정치판에 발을 디디려 했는지, 그 순수한 선의를 100퍼센트 아니 200퍼센트 믿는다. 그녀는 중학교를 일곱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던 자신 같은 청소년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을 것이다. 따뜻한 은사들을 만난 덕분에 개인의 호의에 기대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자신과 달리, 우리 국가가, 사회 시스템 자체가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삶의 토대를 제공해 주도록 무언가 기여하고 싶었을 것이다.

11.

그녀의 임명 발표를 언론 뉴스를 통해 접한 날 밤 카톡을 보냈다. 총선 비례 대표 의원 중 한명으로 영입된 것도 아니고, 여야가 사생결단으로 맞붙는 대선에서 선거대책위원장이란 자리가 아닌가. 이제 그녀가 여지껏 몸담은 조직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살벌한 공격이, 사생활을 포함해 모든 것을 공격할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견뎌야 한다는 당부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의 영입 뉴스가 화제가 된 것 이상으로 그녀의 사생활을, 10년 전 이혼 경력과 자녀를 들먹이는 잔혹한 공격이 이어졌다. 

12.

그 과정에서 모교 교사들은 탄식하고 비통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는데, 우리가 조동연을 아는데, 우리가 그의 삶을 아는데, 우리는 그저 교직원 식당에서 ‘동연이 불쌍해서 어떻하나’ 누가 한마디 내뱉으면, 주변이 숙연해질 뿐이었다. 학창 시절 그녀를 아끼셨던, 퇴임한지 오래되신 노선배님께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알고 싶어 한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문자 메세지로 전화번호를 보낸 뒤 긴 통화를 했다. ‘언론에서 뭐라고 공격해 대어도 나는 믿지 않는다. 나는 동연이의 진실을, 삶을 믿는다’고 울분을 토하셨다. 지금 다른 학교로 자리를 옮기신 교장 선생님 한 분도 그이의 전화번호를 물어본 뒤 ‘지금은 누구의 연락도 받지 않을 것’이란 내 말에 동의한 뒤 슬픔이 묻어나는 한숨을 쉬었다.

13.

소령 조동연이나 대학교수 조동연이 아닌 짧은 며칠이나마 특정 정당 선거대책위원장 직함을 지녔던 조동연이기에 그이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을 망설였다. 나는 오늘밤 어느 정치인을 변호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미 사지가 찢기고 만신창이가 되어 백기를 들지 않았는가. 한 인간 존재가 그의 삶과 진실이 부정당하고, 전 국민 앞에서 부당하게 사생활이 난도질 당하는 걸 보고 있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워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 공직에 나선 이는 그로 인해 인권이 없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특히 나와 페친 관계인 일부 지식인들이 조동연을 함부로 재단하고 충고하는 것을 보며, 깊은 슬픔과 비애를 느꼈다. 당신은 조동연에 대해 그리 함부로 말해도 좋을만한 도덕적인 삶을 살았는가요?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나 자신보다 조동연을 훨씬 더 믿습니다. 

14.

이곳 부일에서 조동연은 약하지만 강했다. 육군사관학교에서 조동연은 작지만 큰 사람이었다. 지금의 이 시련 역시 능히 버티고 견뎌낼 걸로 확신한다. 

무엇보다도 이 글을 조동연이 볼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 당신으로 인해 잠 못 이루고 함께 아파하는 이가 그대의 모교, 부일에 수없이 많다. 퇴임한 이들, 학교를 옮긴 이들 역시 그러하다. 나는 몇 개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교직 생활을 하면서, 한 졸업생 제자가 이토록 많은 이들의 전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그대 절망 속에서 일말의 위안을 얻기 바란다. 이 광풍이 지난 후에 당신은 정치가 아닌 다른 영역에서 당신이 소망한 그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는, 당신을 믿고 응원한다.  사생활이 들추어진 것으로 인해 그대에게 실망한 것 없으니 더 이상 '많은 분을 실망시켰다'며 사과하지 말라.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조동연을 좋아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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