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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게부흥기원]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 최상을 논하다
게시물ID : military_639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산트카치야
추천 : 11
조회수 : 957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6/08/14 00:37:33
0. 2차 대전 당시 추축국 수뇌부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맛이 가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와서는 논할 가치도 없는 확고불변한 진실이 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히틀러의 도박수를 수용한 영불 덕분에*1 히틀러는 그의 뜻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일본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필이면 일본의 주변국이자 주된 침공대상은 허약하기로 세계에서 원탑이던 한국 - 당시 조선 (후에 대한제국) - 이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일본을 막을 나라는 서유럽의 '진짜 열강'밖에는 없어 보였다. 결국 꿈에도 그리던 한국을 식민지로서 획득한 일본은 기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법한 새로운 열강이 되어 세계 정세에 등장했고, 1차대전에서 승전하며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거듭나는 듯 보였다.

1. 검은 목요일 이후 일본은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 했다. 일본은 자체적으로 대공황을 이겨낼 능력이 없었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국의 팔리지 않는 상품을 처리할 식민지가 없었다. 일본의 두뇌들은 대공황을 이겨낼 힘을 군수산업에서 찾았다. 즉, 군수산업을 육성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강화한 군사력으로 일본의 상품을 판매할 시장, 그것도 가장 거대한 시장이었던 중국을 식민지화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결국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 국내에서는 군부의 영향력이 의회보다 높아지게 되었고,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정치는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는데, 해군 장교들로 인해 총리대신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1932년 5.15 사건) 총리대신 및 정부요인을 암살하려는 쿠데타까지 (1936년 2.26사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폭주하는 군부를 막을 힘이 없었다. 군부를 막을 수단은 군부조차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 총리대신이 되는 것뿐이라고 보였다.
군부를 통제할 총리대신으로 꼽힌 인물은 황족이었던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東久邇宮稔彦였다. 나루히코는 육군 출신이라서 군부가 보기엔 '우리 편'에 조금 더 가깝기도 했으면서 주전파와 주화파를 한데 묶고 대미교섭을 진행할 인재로 손꼽혔다. 정부 요인들, 심지어 육군대신이었던 토죠 히데키東條 英機 역시 이에 수긍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내대신 키도 코이치木戸 幸一가 독자적으로 육군대신 토죠 히데키를 차기 총리대신으로 추천했고, 텐노天皇 (당시 쇼와昭和 텐노 히로히토裕仁) 가 승인하면서 최종적으로는 토죠 히데키가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자, 이로써 일본은 폭주하는 군부와 군부의 (정확히는 육군의) 장이 정부 수반이 된, 군대가 국가를 이끄는 기형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폭주하려는 엔진과 같은 곳에서 나온 자가 브레이크를 쥘지 말지를 결정하게 된 것이었다.







2. 그래서 이 이야기는 뭘 말하고 싶던 거냐고? 사실 위에 줄줄이 써 놓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일본 해군 최대의 폭주기관차, 중순양함 모가미最上 얘기니까.

3. 일단 모가미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모가미, 한자로 최상最上을 쓰는 이 군함은 일본 야마가타山形현에 있는 모가미 강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일본 해군의 모가미형 2등순양함의 1번함이나 네임쉽이다. 참고로 모가미라는 이름을 쓰는 군함으로서는 두 번째인데, 첫 번째 모가미는 1900년대 일본 해군이 건조해 약 20년간 운용하던 통보함通報艦, 즉 연락선 비슷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 모가미는 일본 해군의 군비 확장 계획이었던 제 1차 보충계획 (통칭 마루1 계획) 의 일환으로 설계되었고, 1931년부터 구레吳 해군공창에서 건조가 실시되어 1935년 취역했다.
원래 2등순양함, 다시 말해 경순양함으로 설계되어 60구경 15.5센티미터 3연장 주포를 다수 장착한 순양함이 될 예정이었으나… 일본측 위키피디아에는 경순양함으로 취역했으나 전전에 이런저런 개장공사를 통해 중순양함으로 변경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 경순양함이 개조 몇 번 한다고 중순양함이 될 수 있는 건가 싶을 텐데, 이러한 혼동은 1930년에 체결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탓이 크다. 거두절미하고 순양함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순양함은,

(1) 배수량 10,000톤 미만 1,850톤 이상으로 제한되었고,
(2) 그중 구경 6.1인치(15.5센티미터) 초과 8인치 이하(20.3센티미터)의 주포를 장착한 것을 중순양함Heavy Cruiser(일본측 용어 1등순양함), 5인치(12.7센티미터) 초과 6.1인치 이하의 주포를 장착한 것을 경순양함Light Cruiser(일본측 용어 2등순양함)이라고 분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건조 당시 배수량 9,500톤*2이고 15.5센티미터(6.1인치) 주포를 장착하고 있었던 모가미형 순양함은 자연히 2등순양함이라고 분류돼 있었고, 다시 주포를 8인치로 교체하면서 1등순양함으로 재분류됐던 것이다. 저번 글에 모가미를 부당하게 비난(!)했던 적이 있는데, 이는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만행(!?)이라 하겠다. 잘못된 사실 알려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런 사정이 있었습니다. orz*3
하여튼 모가미를 비롯한 모가미형 1등순양함은 총 4척이 건조됐고, 모두 태평양전쟁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로서.


4. 폭주기관차의 폭주목록(웃음)



(1)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모가미형 1등순양함 4척은 모두 제 7전대에 소속되어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침공작전이었던 남방작전에 동원되었다. 주로 육군의 진격에 발맞춰 상륙지원, 포격지원 등을 담당했다. 바타비아 만 해전(バタビア沖海戰/Battle of the Sunda Strait)에서 미군의 중순양함 USS 휴스턴을 합동으로 격침시키기도 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는데…



팀킬을 해 버렸다.



모가미가 휴스턴을 노리고 발사한 어뢰가 하필이면 일본 육군 중장 이마무라 히토시今村 均가 휘하 장병과 함께 탑승하고 있던 육군 소속 군함(!) 신슈마루神州丸에 명중한 것이다. 아니, 신슈마루 하나면 그나마 나았다. 신슈마루와 함께 이동하던 수송선 두 척과 병원선 한 척, 소해정 한 척도 어뢰에 맞아서 박살나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해군 군함이 육군 중장을 물에 빠트렸다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 내에선 해군과 육군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자칫하면 육해군의 갈등이 육군의 압승으로 끝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가미와 일본 해군으로선 다행히(?) 어물쩍 넘어가긴 했다만… 이때부터 이 배의 싹수는 싯누런 색이었다.



(2) 이후 통상파괴작전에 참가해 수송선, 유조선을 다수 격침시키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1942년, 운명의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 모가미와 제 7전대는 야간을 틈타 미드웨이 섬의 미군 비행장 및 비행기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 2전대를 호위하기 위해 미드웨이 섬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전중지 명령이 내려왔고, 결국 제 2전대 및 제 7전대 등은 미드웨이 섬에서 90해리 지점까지 갔다가 항로를 변경해서 철수하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자매함 미쿠마三隈를 들이받았다.
미쿠마: 야이 시발 언니새끼야

자세히 서술하자면, 항로를 북북서로 잡고 제 2전대와 합류하기 위해 28노트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약 1시간 반 후에 미군 잠수함 USS 탬버Tambor(SS-198)가 나타났다. 제 7전대가 발견한 탬버는 함대로부터 우측으로 45도, 5킬로미터 지점에 있었다. 전대 기함 쿠마노熊野는 후속하는 스즈야鈴谷, 모가미, 미쿠마 등에게 좌측으로 45도로 일제히 변침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자기가 잠수함과 충돌할 것 같아서 아예 90도로 변침한 뒤, 다시 한 번 45도 변침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쿠마노와 스즈야가 충돌할 뻔했고 (스즈야가 간신히 쿠마노의 함미를 스쳐 지나갔다.) , 미쿠마는 이것을 보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추가로 변침을 했다. 모가미는? 스즈야와 쿠마노에 집중한 나머지 미쿠마가 변침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미쿠마의 좌현 중앙부명치존나 세게 들이받았던갈겼던 것이다. 충돌의 충격으로 모가미는 키가, 아니 함선의 길이가 12미터나 줄어들었고 미쿠마는 옆구리에 구멍이 뚫려 연료가 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속도가 느려진 모가미와 미쿠마는 12노트로 도망치다가 미군의 수상정찰기에 발각되었고,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미군 항공기의 끈질긴 공격 끝에 탑재하고 있던 어뢰가 유폭, 침몰하고 말았다.

참고로, 모가미는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미 항공기의 폭격을 잘 피해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3) 일본군의 패색이 짙은 1944년 레이테 만 해전(レイテ沖海戦/Battle of Leyte Gulf)니시무라西村 함대의 일원으로서 참전한 모가미는 동료들과 함께 수리가오 해협으로 돌입했다. 거기서 미 함대의 어뢰 공격을 받았는데, 모가미는 또 신들린 움직임으로 어뢰를 피하는데 성공했지만 니시무라 함대 소속 전함 한 척, 구축함 세 척이 어뢰에 맞아 낙오됐다. 함대에 남은 함선은 모가미를 포함한 세 척뿐이었는데, 이미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일본군은 예정대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렇게 들어간 수리가오 해협에서 미군의 전함이 포함된 함대를 만난 모가미는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함대가 순식간에 박살난데다 모가미 역시 주포탑에 직격탄을 맞아 불이 붙은 상황이었다.
전투를 계속하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모가미의 함장은 "배를 버리고 육전대로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항해장은 계속 북상하자고 진언했다. 항해장과 함장의 의논이 계속되는 가운데, 배를 지휘하면서 합심해야 할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미군 함대가 빠른 합의를 위한 특효약(!)을 선물했다. 무슨 약이냐면, 그렇다. 화약이다.

미 함대에서 발사한 포탄이 모가미의 함교艦橋에 직격했다. 이 한 발로 인해 함장, 부함장, 항해장, 통신장, 수뢰장을 비롯한 지휘부가 순식간에 2계급 특진 '당'했다.*4 급히 지휘권을 인계받은 포술장이 모가미를 이끄는 와중에 모가미는 어뢰를 버리면서 생존을 위해 발악했지만… 니시무라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수리가오 해협으로 들어가던 일본 해군의 1등순양함 나치那智가 모가미를 발견했다. 나치는 모가미가 완전히 정지한 줄 알고 항로를 변경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가미는 배가 박살나면서 속도가 8노트까지 줄었을지언정 멈추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치와 충돌했다.



나치도 피해를 입고 모가미도 또 박살난 가운데, 여전히 모가미의 승조원은 배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모가미는 전역을 이탈하기로 결정됐는데, 호위역으로 따라온 구축함 아케보노曙와 함께 도주하던 모가미를 미군 항공기가 포착, 공습을 가했다. 공습으로 인해 모가미의 기관부가 정지하면서 완전히 항해불능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모가미는 아예 버려졌다. 아케보노가 모가미의 생존자를 구조하고 이탈하면서 어뢰를 쏘아서 모가미를 자침시켰다. 모가미의 끝을 모르던 폭주는 모가미의 용궁행으로 막을 내렸다.




5. 모가미의 의의

군에서 운용하는 모든 탈것이 다 그렇긴 하지만, 함선은 특히 그렇다. 충돌사고를 일으키면 답이 없는 피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혹여나 이 글을 보는 운전병이 있다면 꼭 명심하길 바란다. 군대의 탈것은 사회의 것보다 크고, 무겁고, 단단하다. 운전병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언제든 대형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말이다. 그것이 모가미가, 모가미의 함력이 가르쳐주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한다.




<각주>

*1 물론 영국, 프랑스는 꽤 억울할 것이다. 특히 전전 영국 수상이었던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은 대공황으로 휘청거리던 영국에게 대독전은 무리라고 판단해 최대한 시간을 지연시키는 전략을 폈다.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 영국, 프랑스의 대독 정책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기저에는 1차대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대공황을 맞이한 두 열강의 '어쩔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다.

*2 일본 위키피디아를 인용할 경우 11,200톤, 1943년에는 12,200톤이라고 한다. 9,500톤은 영문 위키피디아를 인용한 것.

*3 물론 모가미형에 얽힌 일본의 꼼수는 분명하다.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허용하는 한에서 제일 큰 순양함을 건조한 뒤 주포만 6.1인치를 달아서 경순양함으로 등록해두고, 이를 언제든 8인치로 교환해 중순양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 일본 해군의 속내였다. 또 실제로 8인치 주포를 장비해 중순양함으로 운용되었으니 모가미형 순양함은 일본의 약은 짓으로 인해 탄생했다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4 당시 일본군에서 2계급 특진을 하는 방법은 용전분투하다 전사하는 것 말곤 없었다고 한다.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모가미형 중순양함 항목https://ja.wikipedia.org/wiki/%E6%9C%80%E4%B8%8A_(%E9%87%8D%E5%B7%A1%E6%B4%8B%E8%89%A6)
영문 위키피디아 모가미형 중순양함 항목
https://en.wikipedia.org/wiki/Mogami-class_cruiser
네이버 블로그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미드웨이 해전(46)-충돌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0246736
엔터프라이즈 이야기(44)-레이테 해전(3) http://blog.naver.com/imkcs0425/60091412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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