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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편지로 본 조선시대 부부의 일상
게시물ID : history_63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ngsik
추천 : 5
조회수 : 3249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11/20 20:54:31


지난달 대전 안정 나씨의 묘에서 16세기 초반 한글 편지가 발굴ㆍ복원되었는데요, 
이를 계기로 조선시대 부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한글편지(諺簡)'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한글 문헌이라면 왕후나 상궁, 궁녀 등 왕실 여인들이 남긴 편지와 일기 등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16세기 즈음이면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이기도 하죠. 
전쟁의 한복판, 부임지로 떠나는 길목에서 남편은 아내를 향한 마음으로 붓을 듭니다. 
몸이 떠나 있는 내내 두고 온 아내와 집안 사정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동료들과는 한문편지를 주고받지만, 한자를 모르는 아내에게 띄우는 편지는 늘 한글이었습니다. 
변방 군관으로 근무했던 나신걸(羅臣傑, 15세기 중반~16세기 전반)은 당시 귀한 물품인 분과 바늘을 아내에게 보내면서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라며 글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편지는 분묘 이장 중에 나왔다고 합니다. 
나신걸의 부인 신창 맹씨(新昌 孟氏)의 목관 내에서 미라, 복식 등과 함께 출토됐다고 하는데요,
평소 남편에게 받은 선물과 편지를 고이 간직해오던 신창 맹씨가 사망하자 함께 매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발굴 당시 편지는 총 2점이 접혀진 상태로 맹씨의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 1_나신걸 편지.jpg

[그림 1] 나신걸의 편지 

논밭은 다 소작 주고 농사짓지 마소. 내 철릭 보내소. 안에나 입세. 또 봇논 모래 든 데에 가래질하여 소작 주고 생심도 종의 말 듣고, 농사짓지 마소. 또 내 헌 사철릭을 기새에게 주소. 기새 옷을 복경이에게 입혀 보내네… (중략). 또 분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최근 공개된 나신걸의 편지 외에 경북 안동 이응태의 묘에서 출토된 ‘원이 엄마 편지', 
홍의 장군 곽재우의 조카, 곽주가 수년 동안 아내에게 부친 편지 등에서도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림 2_원이 엄마 편지.jpg

[그림 2] 원이 엄마의 편지

자네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십니까? 자네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자네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자네에게 말하곤 했지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자네를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 없어 빨리 자네에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가 주소… (후략).



그림3_곽주의 편지.jpg

[그림 3] 곽주의 편지

이 달이 다 저물어 가는데 지금도 아기를 낳지 아니하니 틀림없이 출산일을 잘못 헤아렸는가 싶으이. 오늘 기별이 올까 내일 기별이 올까 기다리다가 불의에 언상이가 달려오니 내 놀란 마음을 자네가 어찌 다 알겠소… (중략). 종이에 싸서 보내는 약은 내가 가서 달여 쓸 것이니 내 아니 가서는 잡수시지 마소. 꿀과 참기름 반 종지씩 달여서 아기가 돈 후에 자시게 하소. 염소 중탕도 종이에 싼 약과 함께 보냈소… (중략). 산기가 시작하면 부디부디 즉시즉시 사람을 보내소. 



1443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 조선 시대 말기 경인 19세기까지 작성된 한글편지는 
현재 약 2500통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 중 부부간에 주고받은 것은 약 1000여 통 가량 되고요. 

보통 ‘조선시대 부부’라고 하면 ‘남존여비’가 동시에 떠오릅니다. 
그때는 남성의 권위가 지금보다 훨씬 절대적이었을 것이며, 여성은 마치 ‘남성의 부속적인 존재’라고 짐작하곤 했어요. 
그러나 그 시절 부부간 주고받은 편지를 계기로,
실제론 아내도 가정 내 집안 대소사를 총괄했을 만큼 상당한 결정력을 지닌 존재란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16-17세기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자내(자네의 옛 형태)’라는 2인칭 대명사와, 
16세기에 주로 사용된 ‘~하소’라는 종결 어미 즉 경어체로 기록, 
조선 전기 부부 간에도 서로 존칭을 사용했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한글 편지가 발견되면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 흔히 사용하는 ‘마누라(아내를 일컫는 말 중 하나)’가 조선시대에는 아내에 대한 극존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억류되었을 때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마누라’ 호칭이 등장한 것이 이에 대한 증명이랍니다. 
즉 ‘마누라’란 ‘대비(大妃) 마노라’ 등 왕실에서 사용되던 호칭이 부인에 대한 존칭으로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4_송준길 간찰.jpg

[그림 4] 송준길 간찰(아내에게 보낸 편지)

'늦게 든녀가 오거늘/ (당신의) 편지를 보고 기뻐하되/ 석대의 병이 또 났는가 싶으니/ 갔던 놈에게 물으니 하도 끔찍히 이르니/ 매우 놀라워하네/ (석대의 병이) 요사이는 어떻소?/ 한가지로 그러하면 / (날씨가) 덥거나 말거나/ 내가 가 볼 것이니/ 사람을 또 보내오/ 음식도 일절 못 먹는가? 자세히 기별하소/ 계집종은 원실에게 보내려고 하였더니/ 작은개는 보내려고 하되/ 희복이가 부디 (계집종을 이곳에) 두고 싶다고 하므로/ 란금이를 보내오/ 아이를 데려 올 때 하나는 도로 보내소/ 나는 잘 지내니 염려 마소/ 아무래도 자네가 (몸을) 많이 손상하였던 것이니/ 그렇게 편히 지내지 못하면/ 매우 (몸이) 상할 것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하여 병이 나지 않게 하소/ 한 가족이 (떨어져) 각각 있으니 민망하거니와/ 이 두어 달이 얼마나 지나며 벌써 그리 된 것을 어이할고?/ 걱정 말고 지내소/ 온 (물건) 것은 자세히 받내/ (당신에게) 간 것도 차려 받으소/ 너무 바빠 아무 데도 편지를 아니 하오/ 이만. 7월 8일에 명보.'



조선 시대 부부들의 편지를 보면서 요즘은 부부간에 얼마나 편지를 얼마나 주고받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아직 미혼인 관계로 제 경우는 아닙니다만, 기껏해야 문자 메시지나 SNS 단문 메시지 정도일까요? 
일반적으로 남녀 간에 주고받는 편지라고 한다면, 연애 시절 한두 번쯤 써보는 ‘연애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요. 

물론 그 때와 지금의 남녀가 만나는 방식 혹은 결혼관이 확연히 달라지긴 했지만…. 
그 시절의 편지를 보면서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남녀 간의 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느낌은 저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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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typographyseoul.com/tshangul/textyle/97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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