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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게시판에서 논해지는 몇가지 이야기들의 반론입니다,
게시물ID : military_638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6
조회수 : 793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6/08/09 01:38:26
제목은 거창한데 그냥 이전부터 나오는 떡밥에 대한 반론일뿐입니다,

1. 소화기 철갑탄에도 뜷리는 치하

이게 문제가 뭐냐면 이론상 장갑의 두께로 계산을 때린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거기에 적절하게 조악한 일본군에 대한 국뽕 섞인 유머가 곁들여졌고요, 그런데 그 논리대로라면 4호 전차도 대동소이하고, 3호 돌격포나 헷쳐등 구축 전차들은 더 말할것도 없습니다.;

단지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전차들과 놓고 볼때 평범한 성능이나 후계 기종의 개발이 공업력 및 자본주의적 논리에 따라 심각하게 지체되었고 또 뒤떨어졌다는 겁니다, 예컨데 가내수공업적 능력 운운하는 것이 잘못된 이야기인것을 증명하는 부분인데 일본 제국도 QC 정도는 했습니다.;

2. 제로센

몇 가지 장점을 보자면 우선 527kph라는 속도는 물론 5분 지속 가능한 출력이기는 했지만 F4F나 P-40E도 최대 속도는 5분이니 큰 차이가 없습니다, 특히 고도가 내려갈수록 효율이 좋아 해면에서 463kph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므로 동시기 A6M이 상대해야 했던 F4F의 해면 최대속도 447kph이나 P-40E의 458kph보다 빨랐지요.

추중비에 기반한 상승률은 제로센의 최대 장점으로 12 엔진 자체의 출력은 F4F나 P-40에 장착되어 있던 엔진보다 출력은 낮았지만, 해면 기준 마력 대 중량비가 0.183정도인 A6M은 주로 상대하던 F4F-3(0.159), F4F-4(0.162), P-40E(0.148), P-40F(0.139)의 추중비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화력의 경우에는 독일의 MG FF와 동일한 거니 넘어가고 선회율은 익면하중 116kg/m²(일반주익은 107kg/m²)로 대전기 최저입니다, 항속률은 1941년 당시 기준으로 폭격기와 비슷했습니다,

문제는 기수를 숙이는 기동을 할 경우 엔진 연료 공급이 중단되어 엔진이 꺼지는 문제점이 있다거나 미국이 주로 사용하는 50구경 API탄의 특성상 다른 곳은 몰라도 연료통은 어찌 할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기골 역시 문제로 강하제한속도가 621kph였습니다;

그리고 전비 중량도 문제이기는 하네요,

이러한 문제들이 이제 기술의 발전을 따라 더욱 극심한 문제로 야기 된 것이지, 당대에 못써먹을 기체가 아니었습니다.

가령 42년 미 육군 항공대 정보부의 말을 빌자면

제로와의 교전이 예상되는 전역에서 작전하는 모든 파일럿은 다음 지시를 따른다:

1. 절대 제로와 독 파이트에 들어가지 말 것.
2. 제로가 직후방에 있는 상황이 아닌 한, 300mph이하의 속도에서 절대 제로와 기동전투를 벌이지 말 것.
3. 낮은 속도에서 제로의 상승을 따라가지 말 것.(제로가 가장 기동에 적합한 속도에 도달했을 때, 아군의 기체는 가파른 상승각에서 실속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제로는 완벽한 루프를 돌아 아군 기체 후방의 공격 위치로 들어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제로와 교전하게 되는 기체들은 전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비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제거하여 가능한한 가볍게 한다.

라고 하고 있지요.

또한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옮겨보자면 A6M 시리즈의 최대 문제점은 기술적 기반의 부재로 인해 낡은 전술을 고집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근본적인 설계 그자체에는 별 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이 언급하신 43년부터의 격차는 양 국가의 기술적 진보에 따른 것이지 기체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니 말입니다, 가령 A6M과 F6F와의 격차가 벌어진 것은 F6F가 R-2800-10w 엔진을 달면서 부터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보다 이해가 쉬울듯 합니다, 이는 당장 기반이 되는 전반적인 인프라 그 자체에서부터 큰 격차가 벌어진 상황에서 비릇된 거죠. 

또한 보급의 문제를 들자면 예를 들어 하야테는 설계만 좋은게 아니라 성능도 좋았습니다, 문제는 이제 호마레 엔진은 고 품질유를 요구하나 실제는 사정이 좋았던 해군도 87 옥탄유를 쓰던 때이고, 크랭크 베어링의 구조 강도나 공정률이 형편없이 낮음에도 보급도 힘들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일본군 파일럿의 출격회수는 연합군 파일럿의 수배에 달했고 절연 고무조차 제대로 보급이 안될 정도라 점화 플러그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3. 육군과 해군의 대립

음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할 지경인데 우선 항공모함과 잠수함 부터 보지요, 

육군의 잠수함 프로젝트는 남방 해역에 진출한 이래 하루 한척꼴로 수송선이 침몰당하여 더이상 수송이고 뭐고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섬에 고립된 아군에 대한 보급을 이어나가기 위한 계획으로 육군의 독단적인 전횡이 아닙니다.; 제 삼식 잠항의 베이스가 된 잠수함은 해군이 제공해준 만재 배수량 346t 니시무라 식 소형 잠수함으로 많은 분들이 나무위키발 루머 등에서 듣고 주장하시는 바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거기에 해군의 발주 조차 처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분주했던 해군 조선소 대신에 철공소를 택한것이고 애시당초 해군이 육군을 배척한게 아닌 것이 단적으로 만주 1사단에서 전출되어온 야노 소좌는 해군의 승인 아래에 히로시마의 잠수함 학교에서 승무원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순수한 육군만의 프로젝트일까요?

또한 육군의 항공모함이라고 나오는 신슈마루를 보면 이거 도크가 달린것에서 알수 있겠습니다만 상륙함입니다, 그 개조 내역을 보면 엘레베이터도 생략되었고, 내부의 격납고의 확대도 생략되었으며 갑판을 추가하여 이륙을 가능하게 햇을뿐 그 탑재 운용한 항공기도 정찰기와 자이로콥터 등 4기 남짓이며 이 것이 항모화를 기도했다라고 한다면 당시에 수상기를 탑재했던 전함들은 전부 항모라는 이야기와 진배 다를바가 없습니다, 당장 여객선을 개조할때 주안점은 병력의 수송과 상륙인데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까놓고 말해서 당장 그 간단했던 삼식 잠항도 건조를 포기할 정도로 바빴던 상황에서 누구의 협력 아래에 개장이 이루어졌을까요? 사실 이런 저런 이야기 다 떠나서 쇼와 14년 그러니까 39년에 해군과의 협의를 거쳐 생산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에서 이야기가 끝납니다만 배 만들어 운항하고 접현하는 일은 혼자서 몰래 독자적으로 할 만한거 아닙니다, 그런데 당시 민간 조선소나 기타 항해 관련 커리큘럼 일체는 해군에서 관할하고 있었지요, 육군이 독자적으로 몰래 무언가를 할수 있었을까요?

거기에 독자적 병기 개발 이야기가 나올수 있으나 가령 소화기의 개발사 중 기관총 하나 들어보자면 20mm를 제외하면 전부 동일한 기관총을 복제한 것으로 그나마 20mm도 육군이 해군의 마우저 포 복제를 기다리다 다른 방향으로 가고 해군도 포기하고 새로 시작한 사례입니다, 20mm를 제외하면 전부 각 케이스가 동일한 기관총을 복제한거라는 겁니다, 89식/97식은 비커즈 E 기관총을 면허 생산했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89식 선회 기관총과 89식 고정 기관총은 원본이 호치키스 기관총과 영국산 비커즈 E 기관총으로 서로 다른 종류이고 개발 시기도 다릅니다, 

Ho-103/3식은 브라우닝 M2를 베이스로 했는데 육군은 정식으로 수입한 것을 해군은 노획한 것을 두고 복제 한정도인데, 여기에서 육군은 그 교리에 있어 전투기에 큰 화력을 중요시 않은 탓에 뒤에 화력 부족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에 대구경 화기의 도입을 서두르는바 그에 따라 사용되던 것이 중일 전쟁 당시 수입한 이탈리아산 폭격기 피아트 BR20의 대공 기총을 복제한 Ho-102 였고 그때 사용하던 12.7mm 작렬탄을 보급상의 잇점과 위력등을 이유로 그대로 사용하기를 원했습니다. 반면 해군은 브라우닝 M2를 역설계한 3식 13mm 기관총과 브레다, 스코티 그리고 윌리콘 14mm 기관총 중에 하나를 고르려 했는데 브레다는 위력도 낮으면서 30kg에 육박할 정도로 무거워서, 스코티는 기능 불량으로 배제되었고 윌리콘 14mm는 3식 13mm과 비슷한 성적을 보였으나 93식 기관총의 탄환을 그대로 쓸수 있는 군수 보급 상의 잇점탓에 3식 13mm 기관총이 채택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 시기를 보면 Ho-103은 개전 초기에 이미 도입된 바 있지만 3식 13mm 기관총은 44년 4월에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육군이 처음에 고를수 있는 선택지에는 해군의 99식 1호,2호 20mm 기관총 같은 것도 있었다는 말인데 지리하게 나오는 양측의 갈등과 기타 문제로 분리된 군수산업의 문제와 기존에 잘 쓰고 있던 탄환의 보급상의 잇점등을 이유로 배제되었지요, 반대로 해군 역시 Ho-103을 고를수 있었습니다만 역시나...그렇습니다.;

예컨데 적어도 구 일본 제국의 병기 개발사는 대한 제국의 군수 정책처럼 중구 난방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후의 보급 상황이라던가 인프라의 고갈 적국 그러니까 미국의 기술적 발전의 진전 같은 문제가 겹쳐나가 무너져 내렸을뿐이지요.

출처 반응이 좋으면 좀 더 이어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거 반론한다고 일본을 빨아재낀다는 소위 그러한 논리를 펼치시는 분들은 안 계시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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