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대에서 존재감이 좀 부족한 편이었다.
내 밑으로 새로운 신병들이 엄청나게 들어와서 일병달때쯤에 이미 소대중간짬이 될 정도였고,
애들이 한번씩 크게 사고를 쳐 그 존재감을 뚜렷히 나타내는데 반해,
나같은건 안그래도 소심한 놈이 사고를 쳐도 워낙 소소하게 쳐대서 금방 잊혀졌다.
데리고 있으면 속은 썩이지 않는 놈이지만, 워낙에 재미대가리가 없어서 병장들과 경계를 나가는 일은 거의 없고,
항상 일병상병들과 경계를 나가다보니 경계머신이 되어있었다. 내무실보다 초소가 더 편함-_-ㅎ
군대란 곳이 중간만 가는게 가장 왕도의 길이지만,
나같은 경우는 너무 존재감이 없다보니, 후임들에게조차 뭔가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이대로라면 내 군생활 최대 최고의 목표
"군생활 딱 2년. 730일만 하자."는 수월히 달성할것 같았다.
(그때는 그럴줄 알았다.)
아직은 후임들 열손가락으로 셀 수 있던 시절의 어느 저녁이었다.
그 날은 기상악화로 밀어내기근무못나가고, 고정초소근무나가느라 많아야 20명있던 내무실이 모처럼 복작복작하던 날이었다.
"당직사관님이 오늘은 점호를 하고싶지않은 기분이시래.
이따가 보고자가 행정반와서 인원보고나 하고, 뭐...애들 잡아먹지만 말고 소대별로 자율적으로 점호하란다."
당시에 말년이던 소대장은 점호조차 잘 안하던 양반이었다.
그냥 스윽 들어와서 인원맞나 세어보고, 감기조심해라. 약없다. 잘자고 내꿈꿔라ㅎㅎㅎ.하던 양반.
이제는 와서 들여다보는것도 귀찮아라했다.
"아놔...그럼 테레비스위치나 올려주던가."
말년들이 잽싸게 테레비를 켜보았지만, 행정반에서 통제하는 테레비스위치는 OFF상태.
"야. 우리 야자타임하자. 야자타임."
재미없어 심심해 놀아줘애들아.하고 내무실침상을 뒹굴거리던 말년 하나가 문득 야자타임을 하자고 한다.
아직 군대를 가지않은 미필들에게 조언하자면...
뒤끝없는 야자타임이란, 지금 내 여자친구와 같다.
그런거 없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ㅠ.ㅠ
병장들이 말놔봐야 소용없고, 일이등병들은 눈치나 보느라 그냥 그렇게 의미없는 시간만 지나갔다.
"와~드릅게 재미없네. 마!!! 니들 야자타임 모르나???"
소대분위기메이커인 A상병이 벌떡 일어나더니, 병장들한테 말놔가면서 막 갈궈댔다.
그건 저 양반이 평소 군생활을 잘해와서 고참들한테 인정받고 평소 분위기메이커라 병장들이 웃어주는거다.
저 양반 동기는 이등병때 야자타임하자니까 눈치없이 까불었다가 그때까지도 고참들한테 찍혀있었다.
악마같은 인간들은 전역해서 없고, 그나마 이런 장난 좋아하는 고참들만 있어서 지금이 기회니까 하라고.
그 A상병이 살신성인하며 분위기를 뛰우려해봤지만 분위기는 영 글쎄올시다였다.
"야!!! 내 밑으로 한마디도 안하면 다 쥑이삔다!!! 마 말 안하나?
야!!! B병장!!! 니 인나가 애들 좀 갈궈라!!! 분위기가 이기 뭐꼬!!! 분대장이 삐리하니 놀라캐도 아들이 놀도않쿠마!!!!"
굳어있던 소대원들이ㅋㅋㅋㅋㅋㅋ하고 웃어버렸다.
A상병은 자기 분대장한테 말 막놔가면서 분위기를 뛰우려했고, 일이등병들이 크득거리며 일단은 성공했다.
B분대장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가서 그랬지.
A상병도 좀 당황했다.
분대장이 받아줄거라고 생각했는데 얼굴표정이 너 이따가 막사 뒤로 콤. 이리로 콤. 나에게로 콤. 이러고 있어서였다.
그래도 벌린 판. 이래뒤지나 저래뒤지나. 다 똑같지 뭐.라며,
A상병은 다른 분대장들한테도 "니들이 하자매!!! 이기 뭐꼬???"
홀로 처절하게 야자타임을 진행해나갔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마!!! A!!!! 시끄럽다!!! 소대에 니 혼자있어? 미친거 아이가????"
소대원 모두가 눈이 땡그래져서는 나를 쳐다보았다.
"뭐...머....뭐라꼬?"
"내가 평소에 맨날 뭐라카더나? 아앙? 분위기파악카라했제? 맞나안맞나?"
이등병인 내가 나대주자, 상병장들이 빵 터져버렸다.
"니...마...미...미칬나?"
"미치긴 뭐가 미쳐? 니가 미쳤지. 마!!! 엎드려!!!"
도대체 무슨 깡이었을까...정말 당황했던 A상병은 진짜로 엎드렸다.
"하나에 분위기를!!! 둘에 파악하자!!! 하나!!!!"
"부...분위기를...;;;;;;;"
"목소리봐라!!! 애인한테 속삭이나??? 그리고 니 애인도 없잖아!!! 두울!!!!!"
"파악하자!!!!"
"오옳지!!! 하나!!!!!"
"분위기를!!!!"
"두울!!!!"
"파악하자!!!!"
"좋아. 기상."
"기상!!!!"
"A!!! 니 요즘 후임들 들어온다고 군생활 다 끝나가제??? 어? 군생활이 마냥 편하고 좋아??? 뽀이스카웃이야??? 대답안하나???"
"아닙니다!!!"
"짬 좀 먹었다고 고참들한테 막 기오르고, 소대일은 하나도 안할라카고!!! 말년이야? 군생활 얼마 남았어???"
"3XX일 남았습니다!!!!"
"니 짬에 그걸 또 세고 있어??? 엎드렷!!!!!"
"엎드렷!!!!"
"하나에 주제를!!!! 둘에 파악하자!!!! 하나!!!!"
"주제를!!!!"
"두울!!!!"
"파악하자!!!!"
"정신들어???"
"예!!! 그렇슴다!!!"
"또 그럴거야?"
"아닙니다!!!"
"옳지. 기상!!!!"
"기상!!!!"
"땀봐라~ 이따 점호끝나고 샤워하고, 다시는 그러지마. 알았어?"
"예!!! 알겠슴다!!!"
"그래. 이등병들...특히 X이병 갈구지말고. 사랑으로 대해라. 알았어?"
"예!!! 알겠슴다!!!"
"자리에 앉아. 각잡고. 눈깔을 확 파버릴라. 왜 눈깔 굴려대? 시선 어데둬야돼???"
"건너편 관물대 방독면입니다!!!"
"그래그래. 잘아네. A. 잘하자 알았제?"
"예!!! 알겠슴다!!!!"
그러고 내가 깔깔이 주기맞추고 태연하게 자리로 돌아가 앉자, 소대는 그야말로 빵 터져버렸다.
야자타임하쟀더니 이것들이 코메디를 한다고 다들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A상병은 뜬금포로 푸쉬업해서 땀을 줄줄 흘렸고, 나는 제 정신이 돌아오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점호는 끝났다.
A상병은 혼자 쌩쑈를 하느라 빡쳤는데 내가 제대로 받아쳐줘서 재밌었다고, 이따가 막사 뒤로 따라오라고 했다.
말했잖아...뒤끝없는 야자타임은 없다고...
그래도 뭐 크게 혼나지는 않았고, 자기 애인없는거 지적했다고 싫은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때 여자친구 있었거든...(인생의 전성기가 군대있을때라니...)
그날 밤 야자타임과
소대에서 내 존재감은 확실해졌다.
그리고 우리 소대 야자타임의 스탠다드는 이등병이 상병 하나 굴리는걸로 정해졌다ㅋ
거꾸로 걸어놓아도 국방부시계는 돌아가고, 나는 상병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개념은 안드로메다에 두고 입대한 이등별새끼가 우리 소대로 들어오고
어느 병장님이 야~우리 야자타임할까~라고 하는데...
다시 한번 말합니다.
세상에. 뒤끝없는 야자타임이란. 없습니다.
너와 나의 연인처럼 말이죠.
그 날 소대내무실에는 악마가 소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