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육사출신들로 가득찬 국군수뇌부
1949년 이승만대통령은 국방부장관으로 신성모를 기용한다. 신성모장관은 군사(軍事)에는 문외한인 해양 전문가였으나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이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잘 보여서 그런지 전격적으로 국방부장관에 기용된다. 한마디로 국방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이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이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확충하기 위해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끌어안음으로서 대한민국은 다시 친일파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일제에 빌붙어 기생하던 자들이 다시 대한민국 정부의 권력자들이 된 것이었다. 군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후 미군정 때부터 군 수뇌부의 대부분은 일왕에게 자신의 영혼(靈魂)을 바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었다. 초기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들은 거의 일본육사 출신들이었다. ( )는 일본육사 출신기수이다.
1대 이응준(26기) - 2/4대 채병덕(49기) -3대 신태영(26기) - 5/8대 정일권(55기) - 6대 이종찬(49기) - 7대 백선엽(만주군관학교출신) - 9대 이형근(56기)
6.25 당시 군 수뇌부를 봐도 일본 육사 일색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군 수뇌부란 참모총장과 작전국장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서부전선의 지휘관들을 말함이다. 참고로 동부전선의 6사단장 김종오대령은 징용으로 임관했으며, 8사단장 이성가대령은 독립군 출신이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소장 작전국장 장창국대령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대령 1사단장 백선엽대령 (만주군관학교 출신)
2사단장 이형근준장 7사단장 유재흥준장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비(非)일본육사 출신들이 사단장을 맡고 있던 동부전선은 서부전선처럼 일방적으로 뚫리지 않고 오히려 인민군을 격퇴한다. 그렇기 때문에 “6.25 때 인민군의 갑작스런 남침과 적 탱크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라는 서부전선 지휘관들의 말은 자신들의 무능을 합리화하기 위한 치졸한 변명으로 봐야 한다.
1) 6.25 직전 단행된 군 인사이동
여하튼 인민군의 남침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6월 10일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군에 인사 명령을 내린다. 남침 시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인 포천과 의정부의 사단장들을 교체하였고, 전방사단과 후방사단을 맞바꾸는 등 전선을 혼란케 하였다. 서부전선의 3개 사단장 중 1사단장 백선엽대령을 제외한 2사단장과 7사단장은 6월 10일 인사명령에 의해 새로운 보직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초기 작전에 실패한 서부전선의 사단장들은 한결같이 “지형도 낯설고 부하들의 신상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전쟁이 발발해 어쩔 수 없이 밀렸다.”라는 변명을 하며 자신들을 합리화시킨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혼(靈魂)이 없는 군인’이라는 말은 죽어도 안한다.
그런데 동부전선의 6사단과 8사단도 6월 10일 같이 인사 이동된 사단장들이었으나, 그들은 인민군의 남침을 잘 막아냈다. 따라서 초기 작전에 실패한 당시 서부전선의 지휘관들이 한결같이 변명한 말은 자신들의 무능함을 방어하기 위한 미사구어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일방적으로 패한 서부전선의 지휘관들이 나중에 대한민국 육군의 최고봉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또 6월 10일 인사이동에 포함되지 않은 백선엽 1사단장은 지형도 낯설지 않고 부하의 신상파악도 했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자신의 방어구역인 개성을 제대로 사수하지 못해 문산 축선이 일방적으로 뚫리게 되었다. 초기 작전에 실패해 수많은 인명을 손상케 한 백선엽장군이 어떻게 ‘한국전의 영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진정한 ‘한국전의 영웅’은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이었던 백선엽장군이 아니다. 이승만정부 때부터 정치군인이면서 관운이 좋았던 백선엽장군이 ‘한국전의 영웅’이 된 이유는 백선엽장군 덕분에 남로당 숙군 때 목숨을 구한 박정희대통령이 5.16 쿠데타에 성공했고 장기집권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 처럼, 6.25 때 이 나라를 구한 진정한 ‘한국전의 영웅’은 6사단 7연대장이었던 임부택중령이었다. 진정한 ‘한국전의 영웅’인 임부택중령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연재에 자세히 언급하기로 한다.
2) 전방의 남침정보를 묵살하는 참모총장
(1부)에서 살펴보았듯이, 북한은 소련의 군사지원과 중국의 병력(5만)지원으로 38선 전역에서 전쟁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아무리 극비리에 진행된 전쟁준비라 하더라도 그 징후는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한 적정이 미리 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은 그에 대한 대비가 없이 오히려 인민군의 작전을 도와주는 행동을 했다.
우리가 6.25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듣는 말 중 하나는“6월 25일(일) 새벽에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갑자기 밀고 내려왔고, 국군은 이에 대한 대비를 전혀 못했고 장병들이 휴가 나가 속수무책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말로 국군 수뇌부에서는 그러한 남침 징후를 전혀 몰랐을까?
전쟁발발 수개월 전부터 직전까지 보고된 수많은 정보들 중 몇 개만 예를 들어 보겠다.
▪ 6월 10일, 강릉 해상을 통해 인민유격대가 침투되었는데, 잡힌 포로를 심문한 결과 “전쟁준비는 완료되었고, 명령하달만 기다리고 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 6월 22일, 동두천 1연대에 인민군 전사가 귀순해서는, “남진을 위한 38선 지뢰해체 명령을 받고 전쟁이 무서워 탈영했다.”고 진술했다.
▪ 6월 22일, 6사단 7연대는 화천에 있는 인민군 부대에 1개 대대의 전차가 집결해 있고, 포진지를 만들어 포신이 남쪽을 향해있고, 빈번한 차량 이동을 관측하고는 육본에 보고를 했으나 육본에서는 이 첩보를 묵살했다.
여하튼 6월 22일부터 24일 오후까지 육본 정보과는 전방부대에서 걸려오는 첩보보고 전화를 받느라 24시간 정신이 없었고, 정보국장(장도영)은 각종 정보보고를 종합 분석한 결과 인민군의 전면남침 가능성을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정식으로 보고하나 묵살 당한다.
그런 여러 징후가 있었음에도 미 군사고문단은 전부터 줄곧 “북한의 남침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다보니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방에서 올라오는 이러한 보고들을 묵살하고 기존의 미군의 주장을 되새길 뿐이었다. 미군에게 잘 보여야 출세(?)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3) 오히려 비상경계령을 해제하다
여하튼 북한의 남침조짐이 오래전부터 심상치 않자 육군은 수개월 전부터 ‘비상경계태세’를 내렸었다. 그러한 비상은 6월 초 잠시 해제되었다가 6월 11일 16시를 기해 다시‘비상경계령’이 내려지게 된다.
그런데 채병덕 참모총장은 그렇게 내려진 ‘비상경계령’을 오히려 전쟁 발발 직전인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하고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보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명분은 농번기이므로 군 장병들이 휴가를 가서 농사일을 돕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자상하신(?) 참모총장이었다.
육본 정보국에서는 24일 오후에 참모총장에게 경계령 부활을 건의했다. 하지만 채병덕 참모총장은 전날 비상을 해제하고 다음날 다시 경계령을 내릴 수는 없다며 건의를 묵살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전방부대는 텅텅 비고, 주말 도심은 휴가를 나온 장병들로 북적거렸다.
4) 6.25 전날 밤에 열린 댄스파티
24일 밤 장교구락부에서 개관 파티가 열렸는데 몇 달째 계속되던 경계령이 해제된 주말 밤이라, 육본 수뇌부와 일선 지휘관을 포함한 50여 명의 고급장교들이 참석했고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도 여럿 참석을 했다. 이 파티는 밤 10시경 끝났지만, 참석자들은 장소를 옮기며 25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몇 시간 후 6,25는 터졌고, 전쟁발발 후 각급 지휘관들은 인사불성인 상태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남침에 대한 대응은 커녕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육본 장교들은 6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북한이 전면공격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인민군이 포천을 점령하고 의정부를 향해 진격태세를 갖추고 있을 때였다.
5) 남로당의 공작원이 군부에 있었다.
49년에는 남로당 세력이 군에서 축출되었지만 비밀리에 군 수뇌부에 잔존세력이 남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인 라엄광은 장교 병적부에도 없는 남로당 공작원임이 밝혀져 채병덕총장은 남로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의정부 주둔 7사단 공병대장 최정훈 소령은 6월 25일 오전 9시에 운현궁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주위에 알려, 7사단 참모들과 공병대대 작전과장을 포함한 상당수 공병대대 장병들은 24일날 모두 서울로 외출을 나왔다.
그러나 최소령의 결혼식은 위장결혼식이었고, 6.25로 비상이 걸렸으나 최소령과 작전과장은 끝내 부대에 복귀하지 않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 바람에 7사단 공병대는 완전히 마비되어 동두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구간의 교량폭파, 장애물 설치 등을 전혀 하지 못 해 인민군에게 성문을 열어준 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출처] 6.25 초기방어의 실패는 누구 책임인가?|작성자 성 훈
제대로 모르시는사람들이 많은거같아서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