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리고 데모 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 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 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사태입니다." - 김재규
10.16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반대파 정치인들을 숙청할 때나 고만고만한 시위 진압하는 정도를 벗어났죠. 그건 유신의 주도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김재규는 (속내야 어떻든) 거기서 받은 충격을 10.26의 가장 큰 이유로 얘기했습니다.
비록 이 부마항쟁이 4.19나 6월 항쟁처럼 박정희 정권을 끝장내지는 못 했습니다. 대신 박정희는 측근의 손에 죽었죠. 하지만 그 충격은 오히려 박정희와 그 뒤를 잇는 신군부에 더 강했을 겁니다.
왜 하필 광주였나... 여기에는 참 많은 악선전이 끼어들죠. 홍x니 전x디언이니 슨x님이니 하는 말을 동원하면서요. 광주 사람들이 김대중 광신도라서 그렇다, 그들이 더 과격했다로요. 여기에 하나 더 있죠. 북괴군이 개입한 것이었다요. 아마 그 이전의 사건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79. 10. '부마시위'를 진압한 뒤 보안사에서 작성한 작전 결과를 평가하는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에 의하면, '시위 발생시 초동단계에서 강경하게 진압해야 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압작전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점이 있다."
"이 보고서에는 출동부대가 '초동단계에 신속 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함. (후략)"
- 12.12, 5.17, 5.18 사건 조사 결과 보고서 :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과격함으로 따졌으면 부마항쟁도 그리 못지 않았습니다. 초반에 발생한 경찰 부상자만 95명이었고, 계엄군이 내려온 후에도 시위는 계속됐으니까요. 만약 시위의 과격함이 문제였다면, 물러나지 않는 게 문제였다면 부마에서 그런 참사가 벌어졌을 겁니다.
한 달 전인 4월 18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서는 광부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합니다. 여기서도 광부들은 군경과 강력하게 대치하면서 사북읍을 장악합니다. 하지만 24일 양측의 합의 하에 파업이 종결됩니다.
5월 15일의 서울역 회군, 여기서는 시위를 주도한 운동권에서 먼저 물러납니다. 이 때도 과격함으로 따지면 그리 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군이 개입하기 전에 자진해산했죠.
광주에서는 서울역 회군에서처럼 군이 오기 전에 물러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마항쟁이나 사북 사건에서처럼 군이 와도 딱히 물러나지 않은 경우가 있었죠.
여기에 "경상도 군인들이 잡으러 왔다"든지 하는 유언비어도 한 몫 하긴 했습니다. 이것이 시위의 과격함에 영향을 주긴 했겠지만, 그것도 다른 곳과 비교해서 더 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4.19 때라고, 부마에서라고 그런 유언비어가 없었을까요. 그런 유언비어는 최근의 시위에서도 계속 나오는 것인데요.
그 원인은 시위대가 아닌 진압군에서 찾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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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부산-마산 소요사태 당시, 파견된 특전사 소속 장교와 사병들은 '머리를 박살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럴 의지도 있었다."
"가장 최근 원주에서 대기상태에 있었을 때의 태도에 대한 뚜렷한 변화가 있었다. (사북사태에서의) 광부들이 옳다는 의견들을 피력한 바 있다. 광부들의 임금인상 요구는 옳다는 것이였다. 학생 데모진압 활동에 대해서는 이와 다소 다른 견해이긴 하지만, 적극적인 자세는 아니다. 특전사가 학생들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요구들은, 특전사 내의 기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기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
부마항쟁 때 계엄군은 준비돼 있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도 그 때까지는 강경 진압을 시도하지는 않았죠. 10.26 당시 차지철의 캄보디아 어쩌고 하는 것을 보면 "다시 한 번" 일이 터진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의 '머리를 박살낼'이라는 말은 발포까지는 아니더라도 강경 진압을 뜻 하는 것이겠죠.
어찌됐든 박정희는 생각은 했더라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혹은 못)은 채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신군부는 더 큰 부담감을 느꼈죠.
박정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 모르는 시위에 "정권 유지"를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권 창출"을 위해 싸워야 했죠. 자신들의 쿠데타가 집권으로 안전하게 이어지기 위해서는 국내의 안정이 필수였습니다. 여기에 이어진 사북 사건은 그 위기감을 부채질했을 겁니다.
"전 특전사 부대는 소요 사태 진압을 위한 집중 훈련을 받아왔다. 특히, 최루가스 (CS Gas) 사용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아왔으며" - 미 해제된 기밀문서
"많은 공수부대원들은 1980 초반부터 이어진 충정훈련 시간이 많아졌으며,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 못 한 채 계속 충정훈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 군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선택된 것은 한국군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특수부대, 이들은 시위 진압훈련인 충정 훈련만 계속 받았습니다. 진압의 방식도 달랐죠.
+) 이하 미 기밀문서와 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는 출처를 표시하지 않겠습니다. 어투를 보면 짐작 가능하실 겁니다.
"우리 위원회와의 면담에서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한국 육군은 전라도 출신 장교들을 폭동 진압임무를 위해 광주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이 지역 출신 장교들이 더 성공적으로 데모를 진압할 것이며, 지역 유대감과 지역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말투를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명령을 하달한 이유다. 이 명령은 일부의 반발을 샀지만, 큰 저항은 아니였으며, 대부분은 마지못해 명령에 복종했다."
"제606대대로 추정되는 1개 대대는 특수 훈련을 받았다. 이 부대 소속병력 모두가 머리를 기르고 있으며, 작업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병력이 학교 구내에서 활용할 병력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날 회의의 결론은, 개강 후 부분적인 저항운동은 예상되며 군의 토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요망된다는 것이다."
신군부의 준비는 철저했습니다. 계속된 훈련으로 시위진압에 특화된 군인들을 양성하고 전라도에 전라도 군인들을 몰아넣었죠. 거기에 시위대 사이에 끼어서 뒷공작을 할 "머리를 기른" 병력도 준비합니다. 그리고, 시위대 해산이 아닌 마지막의 한 사람까지 체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죠. 물론 그들의 명령 곳곳에 "불순분자와 일반 시민을 구별하라"든지 "적당히 체포하라"든지 하는 미사여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과 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이 사진을 구하려는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신 보도가, 저항하는 민간인에 대한 군인들 - 대부분이 특전사 병력 (Special Force)이 잔인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도한 것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그러한 물증은 반정부 활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도 있다. ▒▒▒▒▒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친정부적으로 비쳐지거나, 광주 시민에 호의적이지 않게 보이기 위해 편집된 영상물을 구하려는 노력과 관련하여, 전두환은 주일 한국 대사관에 일본 TV에 방영된 영상물 VTR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 일본 TV의 보도물은 전두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광주 사태에서 특전사 병력이 과잉대응했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전두환이 그 영상물의 일부라도 활용하고자 할때는, (그 필름에) 꽤 상당 부분에 손을 대야 할 것이다."
지워진 부분은 아직 기밀이 풀리지 않은 부분입니다. 저 안의 내용도 정말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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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는 이 정도면 자기들이 원한대로 "군인들을 무서워해" 시위가 끝날 거라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과잉 진압을 똑똑히 지켜 본 광주 시민들의 참가가 늘어났죠. 시위도 과격해져 갑니다.
"(19일) 광주은행 앞에서는 대학생 200여명이 투석하며 대치했고, 같은 날 15:55에는 계엄군이 시위대에게 구타당하고 총기를 뺏기기도 했다."
"광주 시민들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공사장의 인화물질로 불을 지르는 등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에 적극 저항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11:10 계엄군은 광주시 금남로 소재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장갑차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장갑차의 등장이었죠. 그리고
"대검을 M16에 착검한 사례는 사진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중 도망가는 시위대원을 착검한 채 쫓아가는 사진 속의 주인공은 7공수여단 서00 중사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위원회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면담조사를 거부했다."
진압봉(이 때 진압봉도 더 긴 신형이 보급됩니다)과 개머리판으로 때리는 것이 아닌, 총검을 꽂기 시작한 것이죠.
참고로 23일, 가슴에 자상을 입고 사망한 이가 있었습니다. 진압군이 여학생의 젖가슴을 잘랐다는 말이 유언비어인 것만은 아닌 것이죠.
"군인들의 데모 진압이 너무 가혹하여 주민들의 증오감이 너무 큰 것 같다" - 국방대학원 중령 김00
"최초 11 공수단이 군중들에게 몽둥이로 과격하게 때리고 군홧발로 밟아서 "전라도 새끼들 다 때려 죽인다"고 하여 자극받은 것이 크게 확대된 원인" - 5공병여단 중령 장00
20일, 강경 진압에도 시위 규모가 더욱 커지는 것에 대한 회의가 진행됐고, 공통적으로 과잉 진압과 유언비어를 문제 삼습니다. 이 때 뭔가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면 일은 더 커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윗선의 생각은 달랐죠.
당시 기갑학교장 준장 이구호는 21일 16:00 육군참모차장 황영시에게 전차를 동원하라는 전화를 받습니다. 정식지휘계통에 따라 명령하라는 그의 대답에 이렇게 말 했다고 하죠.
"이 자식, 전차포를 쏘면서 밀고 들어가면 되는 것 아니냐"
시민들은 강경진압에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신군부는 그런 시민들의 저항에도 물러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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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포는 5월 19일 16:50, 고장난 장갑차가 시민들의 공격을 받아서였습니다. 장갑차에 불 붙은 짚단을 던지려 하자 작전장교 차00 대위가 M16을 발포한 것이었습니다.
첫 발포에도 시민들은 물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규모는 더 커졌고, 차량을 동원하기 시작했죠. 20일 당일로 가 보겠습니다.
20일 18:40, 무등경기장부터 금남로까지 200여대의 택시와 버스가 차량 시위를 시작합니다. 이들은 도청으로 진군을 시작하죠.
21:05, 시위대 버스가 경찰저지선으로 돌진, 경찰 4명이 사망합니다.
21:50에는 광주역에서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시위대의 차량에 깔려 사망하죠.
이 때 3공수여단에 실탄이 지급됩니다.
같은 시각, 시민들은 광주 MBC 건물을 방화하고 시위를 계속했죠.
그리고 23:00이 옵니다.
"3공수여단 소속 하사 이00는 (중략) 작전 참모와 작전과 선임하사의 지휘 아래 지프와 트럭에 실탄을 싣고 전남대에서 광주역으로 지원 나갔으며, 그 과정에서 지원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루어졌다고 진술했다."
이 날 발포 및 진압으로 사망자 2명, 부상자 5명이 나옵니다. 3공수여단에서는 이를 "폭도들에 의한 공격에 의한 사망자"로 왜곡합니다. 그 외에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주민들의 신고가 있었지만 3공수여단의 상급부대인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나 31사단에서는 발포 경위를 파악하는 조치가 없었습니다.
사북 사건 당시 1군사령부는 투입될 예정이었던 11공수여단에 총기사용 원칙을 제시합니다. 거기서 총기 사용은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는다는 방침이 분명히 있었죠.
이 발포 후, 2군사령부는 22:30에 작전지침을 추가하는데 거기에는 발포 금지와 실탄 통제부터 특전사를 20사단으로 교체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가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침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 중심은 11 공수여단, 20일부터 21 새벽까지 11공수여단에는 실탄이 분배됩니다.
"이 같이 발포의 경우 육군참모총장의 승인을 받는 중요 사안임에도 광주에서의 실탄 분배와 발포는 공식적인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이루어졌고, 이후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히려 관련자들 중 일부에게는 무공훈장이 주어졌다."
그렇게 21일이 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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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위원회는 발포를 비롯한 발포 명령 문서를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발포는 이루어졌습니다.
"현장에서 발포로 인한 인명살상이 행해졌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는 지휘관이 없었다. 발포 장병들에 대한 문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현지에서는 물론 계엄사 단위에서도 이 발포를 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지 않았습니다.
"이는 과격진압이 현장에 투입된 장병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계엄사 당국의 암묵적 지원 아래 행해졌다고 추정케 하기에 충분하다."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지막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그런 문서는 절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대신 다른 걸 찾을 수 있죠.
5월 21일 04:30 계엄사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립니다. 이 때 "자위권 발동"에 대한 것이었죠. 그 결론은 이랬습니다.
"전 각하 : 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
여기에는 그의 이름부터 수경사령관 노태우 등의 이름도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있죠.
"이에 대하여 계엄사령관 이희성 장군은 '도청이든 어디든 군인이 가서 보초를 서는데 무기를 뺏거나 생명을 위협할 때는 군인복무규율에 의하면 초병이 정당방위로 자위권을 자동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광주의 상황이 그러한 정도라면 위의 경우가 적용되기 때문에 여기서 자위권 행사에 대해서 특별히 논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발언하고 거기 있는 모두가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계엄군의 자위권 행사 문제는 그 회의에서 자동적으로 결정됐다."
"19:30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방송으로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했고, 20:30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자위권 발동 및 실탄 분배를 지시했다."
이에 대한 전교사의 방침은 이랬습니다.
"31사단은 주로 부대에 접근하는 시위대에 대해 발포할 것인가를 검토했다. 그런데 이 때마다 31사단장은 상급부대인 전교사에 문의했고, 전교사령관은 번번이 이를 금지시켰다."
"(교도소에) 시위대 1000여명이 접근하자 31사단장은 문을 부술 경우 발포하라고 명령했으나 전교사령관은 이를 금지시켰다. 31사단장은 5.21. 18:00에 발포명령을 취소한 뒤 어떤 경우라도 허가 없이 발포하지 말고 탄약 장전도 금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21일, 도청 앞에는 시위대와 공수여단이 대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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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 11여단과 7여단 35대대가 도청에 집결합니다.
08:00 전옥주씨 등이 묵념을 올리고 도지사와의 면담을 요구했죠.
09:00 아세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가 진입해 장갑차 3대와 대형버스를 몰고 옵니다.
09:25 시민대표들이 장형태 도지사에게 "계엄군 투입, 무차별 구타에 대한 공개사과, 연행 학생 및 시민 석방, 금일 12:00까지 공수단 완전 철수"를 요구합니다.
10:00 시민측의 장갑차가 군 저지선으로 돌진,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저지합니다. 공수부대는 뒤로 후퇴했고, 시위대를 막던 자들은 63대대 공수부대원과 교돼합니다. 그들은 실탄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11:00 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공수부대가 12:00까지 철수할 것이라는 방송을 합니다.
하지만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시민측의 장갑차와 버스는 계속 전진했고, 계엄군은 계속 물러납니다.
13:00
군은 최루탄에 이어 공포탄을 난사합니다. 시민들은 일순간 흩어졌지만 공포탄인 것을 확인하고 다시 모여서 전진하죠.
시위대는 기갑학교 소속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고, 불 붙은 장갑차는 뒤로 후퇴합니다. 그 때 시위대의 장갑차가 돌진, 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무전병 권용운 일병이 깔려 죽습니다.
발포는 이 때 시작됩니다.
장갑차를 뒤따라오던 버스에 10여명의 공수부대원들 발포를 시작, 운전사가 사망합니다. 이를 본 시위대는 차량을 동원해 돌진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맞이한 것은 집단 발포였습니다.
그 때 도청 앞에서는 애국가가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 이것이 발포와 관련됐느냐는 의혹은 있지만, 당시 전남도청 내무국장이 상황을 진정시키려고 틀었다고 합니다.
당시 11 공수여단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4일, 11공수여단은 전교사 매복부대와 한 차례, 31보병사단 (이들은 시위진압이 아니라 기지경비에 투입됐었죠) 과 한 차례 오인교전을 벌입니다.
11여단이 전체 기간 동안 사망한 수는 11명, 그 중 3명을 제외한 이들이 이 오인 사격으로 사망합니다. 반면 전교사에서는 2명 중 1명, 31사단은 전체 피해 3명 모두가 이 오인교전에서 발생합니다.
이 때 11여단은 매복한 전교사의 조직적인 사격에... 반자이 돌격으로 맞섭니다. -_- 무턱댄 돌격에 아군의 피해가 커진 것이죠. 반면 31사단에서는 자기 병사 3명이 사망했음에도 그것도 중상을 입은 중대장이 상황판단을 제대로 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았죠.
이 11여단이 도청 앞에서 발포한 이들입니다. 유명한 버스 공격을 한 것도 바로 이들이구요. 도청 발포 후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 "조준 발포"를 한 것도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그 외의 부대 역시 무차별 발포를 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피해자는 한두명 정도였고, 31사단 등은 시민군이 조직된 후의 교전을 했지 무차별 발포를 하진 않았죠.
대규모 무차별 발포를 한 주역, 아군과의 오인 교전에서 돌격을 해서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 같은 여단이라는 것이죠.
첫 발포와 두번째 발포가 있은 후, 전교사와 31사단 측에서는 실탄 통제에 나섭니다. 위에 올렸듯 그 때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발포하지 못 하게 했죠.
바로 그 때 공수여단은 실탄을 분배하고 있었습니다.
도청에서, 31사단은 철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교사 측에서는 일단 한 발 물러서려 했습니다.
그 때 공수여단은 실탄이 없는 병력이 실탄을 소지한 병력과 교대하고 있었습니다.
상급부대는 한 발 물러서려 했는데, 왜 하급부대인 공수여단은 오히려 실탄을 분배하고 발포를 했느냐, 이것이 문제의 중심이죠. 지휘권의 혼란, 다시 말 하면 누가 정상지휘계통을 깨뜨리고 공수여단을 조종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 의혹을 받는 인물이 바로 특전사령관 정호용입니다. 그가 직접 서울과 광주를 왕복하며 직접 월궐행위를 한다고 한 것이죠. 1996년 당시 법원에서는 작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긴 했지만 실질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하진 않았다는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작전지휘권을 행사해야 하는 전교사 등에는 이 공수여단의 발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공수여단, 특전사 병력은 UN사 및 한미연합사에 포함되지 않는 부대입니다. 다른 부대가 미군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 이 부대는 "통보"만 하면 되죠. 국가에서 보다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부대입니다.
정호용은 12.12 후 50사단에서 특전사령관이 됩니다. 그 역시 12.12의 주역이며, 하나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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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쏘는 거야?"
"아직 쟤네들이 안 쐈어!" - 블랙 호크 다운
"도청 안에서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데 중사 한 명이 들어와서 '그 녀석들이 내 부하를 죽여서 무차별 난사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군요. 그때까지도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했어요. 아무리 수만의 시위대에 포위됐고 군인의 희생이 발생했더라도 시민들한테 총을 겨누고 쐈다니..." - 진압군 출신 이경남 목사
시민 측의 공격에 위험해서 자위권을 발동했다, 이것을 자위권이라 한다면 그들의 말이 틀린 건 아닙니다. 첫 발포는 자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니까 쏜 것이고, 두 번째 발포는 몇 명이 시위대의 차량에 압사당한 후 쏜 것이었으며, 도청 앞 발포 역시 한 명이 죽은 다음에 쏜 것이니까요.
문제는 왜 그런 상황이 생겼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현지 상급부대가 실탄을 금지했음에도 실탄 발포가 계속됐고, 현지 상급부대가 상황을 진정시키고 철수하는 가운데에서 계속 시민들과 부딪히게 됐느냐는 것입죠. 왜 발포가 됐음에도 31사 및 전교사에는 제대로 보고가 안 들어간 것인지, 왜 31사단은 철수하고 있는데 공수여단은 철수 명령 없이 계속 도청에서 버티게 됐는지...
"전 각하 : 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
그가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는 답밖에 나오지 않죠.
공수여단의 지침은 군인에 대한 두려움을 줘 조기에 뿌리를 뽑는 것, 하지만 그 결과는 시위대의 확대만 불러왔습니다. 군 내에서도 상황을 진정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걸 거부하고 자위권 발동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공수여단은 다른 부대보다 더 강한 "자위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철수 명령을 받지 못한 채 분노한 시민들과 맞서게 됩니다.
"현지 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 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5공 청문회 국회증언 속기록
그가 발포를 명령한 증거는 절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는 단지 과잉 진압을 명령해 시민들을 분노하게 했고, 그런 시민에 맞서는 진압군에 자위권 발동을 강조한 후 둘을 부딪히게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그는, 신군부의 주역들은 발포의 책임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발포를 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광주 시민들이 자기 말만 잘 들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라 생각하겠죠. 그리고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은 이상 발포라도 해서 말을 듣게 하려 했겠죠. 하지만 그것을 직접 명령하면 안 됐습니다. 그것은 "불행한 사고"여야 했으니까요.
유태인에 대한 "최종 해결책", 그가 여기에서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는 그저 유태인에 대한 "추상적인 분노"만을 보여줬을 뿐이었죠. 그 부하들은 알아서 "효율적으로" 유태인 문제를 처리했고, 그는 이것을 "모른 척" 합니다.
+) 최근에 발견됐다는 카더라는 들은 적 있습니다만, 어쨌든 자기가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확실하겠죠.
이 경우도 다를 바 없습니다. 그가 명령을 내렸다는 증거는 영영 발견되지 않을 겁니다. 빠져나갈 구멍을 모두 만들어 놓고 한 것이었으니까요.
시민들이 무장한 이후에는 참 편했을 겁니다. 이렇게 "폭도"가 "무장"했으니까요. 광주를 고립시킨 후 굳이 공수여단이 아니더라도 시민군만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던 민간인을 사살한 것은 투입된 전군이 저지른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11여단은 여전해서 미니버스를 공격해 말 그래도 "학살"한 것이 바로 그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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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가 일어난 것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제... 좀 남은 얘기를 해 보죠. 이 얘기들도 짧진 않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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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폭도가 되고 싶은 거야?"
"폭도요? 우리가 폭도라고요?"
시민들의 첫 무장, 이건 그리 좋게만은 볼 수 없습니다. 첫 무장은 두 번째 발포가 일어난 새벽부터 아침에 걸쳐 이루어졌고, 특히 발포가 시작된 13:00부터 14:00까지 각 파출소나 무기고를 공격합니다. 마치 도청에서의 발포를 기다렸다는 듯이요. 광주부터 화순, 나주 등에 걸친 조직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진압군이 철수한 이후에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협상과 무력 항쟁으로 나뉘어진 것이죠. 교련수업이 남아 있었다 하나 총기에 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발이 많았죠. 이들이 온건파를 그리 좋게 대하지도 않았구요. 폭발을 우려해 탈취한 폭탄들의 뇌관을 제거하고 진압군에게 넘기려 했던 이는 끝까지 같이 싸웠음에도 프락치로 몰렸다가 최근에야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유언비어 역시 마찬가집니다. 경상도 군인이 죽이러 왔다는 말이 퍼지면서 19일부터 경상도 출신의 가게가 불 탔고, 이것이 시위를 과격하게 하는데 일조하기도 했습니다. 시민군 무장 당시, 발포로 300명이 사망했고 그에 대응해 총기를 탈취하는데 성고했다는 삐라가 돌기오 했구요.
만약 광주에서 추가 발포가 없었다면 이건 비판받기에 충분했겠죠. 이런 모습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저 쪽에서는 이를 핑계로 폭동이 맞다고,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을 정당하게 만든 건 바로 진압군이었습니다.
①사태수습 전에 군 투입을 하지 말라.
②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③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④사후 보복 금지.
⑤책임면제.
⑥사망자 보상.
⑦이상이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광주 내의 여러 인사들이 만든 수습대책위원회와 온건파 학생들이 만든 수습대책위원회, 이들은 서로 의견을 모아 위와 같은 조건을 진압군에게 내밉니다. 그 대답은 다들 아시겠죠.
광주의 시민군들이라고 다 이성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이성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죠. 그럼에도 광주는 이성을 어떻게든 지키고 있었습니다. 강경파는 일부였고, 같이 총을 들었다 하더라도 협상이 이루어지면 총을 내려놓을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강경파와 대립했을,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던 수습대책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조비오 신부, 그가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 봅시다.
"나에게 총이 있었다면 나도 총을 쐈을 것이다"
선후관계로 다시 얘기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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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14일과 16일에 시위를 엽니다. 경찰은 이를 크게 제지하지 않았고 이 "횃불 시위"는 평화롭게 끝났죠.
18일에 다시 시위가 열릴 때, 학생들은 별다른 무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압군은 이를 아주 철저히 짓밟았죠.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폭행이 가해졌습니다.
19일부터 시민들이 과격해지기 시작하고 전교사와 31사가 실탄 통제를 하고 한 발 물러서려 할 때, 진압군으로 파견된 공수여단은 명령을 무시하고 실탄 사격을 시작합니다.
그게 자위권 발동이든 뭐였든, 총을 쏜 것이었죠. 그리고 강경파 쪽에서 총기를 탈취하는 동안 대규모 발포가 있었습니다. 당시 11공수여단의 기록에는 시민 측의 발포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때 죽거나 다친 이들 중 총상이 있는 군인은 없었습니다. 대규모 발포 전에 총을 쏘며 맞서려 했던 이들이 있었지만, 최소한 그들은 그 전에 총을 쏘진 않은 겁니다.
과격했다는 비판은 가능할지언정, 그들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죠.
시민들 내에서는 온건과 강경 사이의 다툼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진압군과의 협상을 하려 했습니다.
그 동안 진압군 내의 온건한 움직임은 다 밀리고 강경 진압만이 계속됐죠.
침소봉대라고 하죠. 그들은 시민들 내의 과격했던 움직임만 강조해서 그것을 폭동으로 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후관계에서 보듯 모든 원인은 진압군 쪽에 있었습니다.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까지 남은 200여명의 시민군에게 실탄을 주고 발포명령을 내렸던 이가 있었습니다. 결국 진압군에 의해 생포되고 무기징역을 받은 이였죠. 그는 최근 정반대의 판결을 받습니다. 재판은 하루도 끌지 않았습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20303030824689&p=donga&t__nil_news=downtxt&nil_id=10 "따라서 피고인의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로서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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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증언에서는 진압군들이 막걸리를 먹었다는 것이 나옵니다. 직접 이들에게 물어봤던 이는 식사 추진이 제대로 안 돼서 술이라도 먹는다는 대답을 들었죠. 이것이 군인이 술 쳐먹고 사람들을 죽인다는 유언비어의 원형입니다. 뭐 크게 틀린 말은 아니네요.
진압군은 연초부터 휴가가 통제된 채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자기들의 행동이야 어찌됐든 생명의 위험을 받으며 계속 작전을 했습니다. 상부에서는 강경 진압을 강조했고, 하급 부대에서는 이를 충실히 따랐죠. 그렇게 그들은 "폭도"를 때려잡는 일에 동원됐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같은 국민에게,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쏘게 됐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좀 특이한 수 있는 부분이 있죠. 군 내에서 범죄를 저질러 징계를 받은 이의 수입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일을 저질렀던 11공수여단에서 나온 인원은 44명, 그보단 덜 했지만 다르지는 않았던 7공수여단에서는 29명이 나왔습니다. 3공수여단에서도 23명이 나왔구요. 모두 광주에 갔다 왔던 이들입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 아닌, 모든 일이 끝난 후 나왔던 범죄들입니다.
광주에 투입되지 않은 1여단은 7명, 9여단은 18명, 13공수여단은 15명 등으로 광주에 다녀온 이들이 대체적으로 높습니다. 특히 11여단은 44명이라는 참 독보적인 수죠. 그들이 광주에서 얻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들 역시 이런 상황에 몰린 또 하나의 피해자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시민들을 마구 때려죽이고 총을 쏜 것을 무마할 수 없습니다. 사병 단위까지 일일이 찾아 처벌하는 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최소한 개인 단위의 반성이 없다면, 후회가 없다면, 피해자들의 짐은 물론 자기 자신들이 지고 있을지 모르는 짐을 내려놓을 수도 없을 겁니다.
군은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찌 당당히 국민을 지킨다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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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이 김대중 때문이다... 라 한다면 어디까지를 말 하는 걸까요?
초기 시위에서 김대중 석방은 분명 중요한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김대중이 체포된 게 바로 그 시점이고, 고인이 된 지금도 김대중은 호남권에서 지지받는 정치인이니까요. 이것이 강경 진압에도 맞서는 이유의 하나로 볼 순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지하던 정치인이 투옥된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건 정당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일이 커진 것은 이를 강경 진압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이미 김대중 석방 문제는 둘째였습니다.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시민들 역시 마구 구타 체포한 것이 문제인 것이죠.
김대중부터 김영삼 등 야당 인사들은 이 때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받던 이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시위의 이유 중 하나가 될지언정, 광주 전체가 그것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고 할 순 없습니다. 부마항쟁의 발단 역시 김영삼에게 있는데, 그렇다면 부마항쟁이 김영삼 하나 살리려고 한 것이었을까요? 거기다 이들이 무슨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하라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고, 김영삼이 대통령이 됐다고 광주에서 무장 봉기라도 일어났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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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군부를 막을 수 없었고, 또 다른 독재가 7년간 계속됐습니다. 그 원인을 찾자면 다시 박정희에게로 갈 수밖에 없죠.
박정희는 군부를 너무 키웠습니다. 아니 군부가 문제가 아니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주축이 된 하나회가 문제였죠. 전두환은 5.16 당시부터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벌였고 박정희의 맘에 딱 들었습니다. 하나회는 박정희의 보호 아래 군을 장악했죠.
군부터 최규하 등 당시의 정치인들도 이에 너무 무력하게 당합니다. 삼김을 대표로 한 야당 인사들 역시 바로 붙잡혀서 이들을 막을 수 없게 됐죠. 그나마 이를 막으려 했던 광주에서는... 군의 무력 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3개의 공수여단이 서울에 배치됐고, 2개의 여단은 부산 일대에 배치됩니다. 전국은 계엄령으로 군에 장악돼 버렸죠. 서울에서는 이 힘에 굴복해 물러났고, 광주에서는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그 많은 피를 낳았죠.
다른 지역에서 같은 일이 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아마 전국에서 그런 유혈사태가 벌어졌다면 또 모를 일이긴 하죠. 그렇게 됐다면 미국도 그냥 두고 볼 순 없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미국 역시 유혈사태가 일어난 후라면 모를까, 군 동원을 막진 않았습니다. 광주에서 병력이 추가 투입됐듯이, 부산과 대전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신군부는 해병대를 투입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승인할 예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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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이라고 해야 될까요. 국민은 미국의 본 모습을 알게 됩니다. 미국에게 중요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가 아니라 한국의 안정이었죠. 박정희의 최측근이자 역시 반공을 내세웠던 신군부는 딱히 거부할 필요 없는 파트너였습니다. 한국에 큰 신경을 쓸 수 없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지미 카터 정권이 최악의 레임덕을 겪고 있었거든요.
그들이 군 동원을 묵인하긴 했지만,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때가 그 대신이라고 해야 될 지 그는 유신 때처럼 김대중을 필두로 한 야당 인사들의 목숨을 최대한 구했죠. 하지만 이미 미국은 낙인이 찍힌 상태였습니다.
이후 전반적으로 나타난 반미 흐름, 미국은 그제야 민주화 세력의 편을 듭니다. 6월 항쟁 때 계엄령을 철저히 막았고, 아예 출동하려는 군을 무력으로 막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이후 5.18의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때 기밀 문서를 잔뜩 해제해 신군부 인사들의 왜곡을 막아주기도 했죠. 그 양 덕분에 아예 독립된 카테고리로 승격됐죠.
그래도 부족하다는 생각은 드네요. 어찌됐든, 미국이 그냥 좋아서 한국을 도왔던 게 아니라 자기의 이익에 맞췄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광주에서 흘린 피는 미국 역시 책임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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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개입설, 뭐 그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간첩 한둘은 있었겠죠. 하지만 시민군은 그런 간첩을 진압군에게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 역시 잊으면 안 됩니다.
진압군의 피해 중 시민군의 총에 사망한 것은 3명, 원인이 확실하지 않은 것을 다 여기에 넣어도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총 쏘는 데는 지지 않을 북한군이 있었으면 이것밖에 안 됐을까요? 이 차이는 양 쪽의 화력과 훈련도가 얼마나 차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게, 강원도 쪽으로 침투해도 소수밖에 못 오고 나라 자체가 들썩거리는 상황에서 광주에 수백명이나 어떻게 알고 침투했을까요? 그리고 진압군은 그걸 파악도 못 했을까요? 왜 이렇게 너무나도 좋은 거 놔두고 "폭도들의 난동"으로 계속 발표했을까요? 정작 이 말이 나온 건 민주화 이후입니다.
그 때 북한도 좋다고 사람 보내려 했지만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는 결론을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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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사태, 광주 사건, 광주 항쟁...
광주 사태라는 말을 무조건 배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서의 "사태"는 "발포"를 뜻 해야죠. 이걸 쓴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 에 따른 분노를 감당할 수는 있어야 될 겁니다. "사태"는 광주 시민들을 "폭동"으로 밀어붙이던 말이고, 그들은 지금도 그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만약 광주가 약간의 충돌로 끝이 났다면 그 명칭은 "항쟁"이 됐을 것입니다. 사실 민주화 운동이라기보다는 항쟁이 더 어울리죠. 문제는 5.18이 현 민주화에 끼친 영향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광주 시민들은 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자기 가족들을 위협하는 군에 싸웠고, 무고한 시민들을 폭행하고 발포한 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최소한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 발포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광주에서의 일도 하나의 항쟁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민주화도 조금 늦어졌을지 모르고, 신군부를 욕 할 큰 이유 하나도 줄어들었겠죠. 주사파나 극단적인 반미 등도 조금은 줄었을 것입니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민주화의 성지라는 영예로운 말을 듣지 않더라도 피해가 조금이라도 더 줄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그건 강경 진압한 신군부에 물어야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 분들께 말 할 것이 아닙니다. 그 분들은 그렇게 군부의 압제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 분들이 흘린 피 앞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말도 부족합니다.
한국인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죠. 그 때도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정치인들에게 잘 속고, 유언비어에도 잘 휩쓸리고, 자기 앞가림에 바쁘고, 이익에 따라 잘 기울기도 하구요. 그 때의 광주 시민들도 그렇게 민주주의만을 위해서 싸우진 않았을 겁니다. 그 중에는 "저 학생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왜 시위냐 하냐"고 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정말 아무 관심 없었는데 끌려가고 총 맞아 죽은 이들도 있을 것이며, 하다못해 박정희를 지지했던 이들도 없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군이 같은 국민을 때려잡는 것을 막기 위해 일어섰고, 싸웠습니다. 그들이 꿈꾼 세상이 완벽하게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이상의 세계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국민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있고 그걸 위해 싸울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웠습니다. 군의 무력에 의해 짓밟혔지만... 그래도 싸웠습니다.
신군부가 그 이후 어떻게 했고, 지금 어떻게 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 때 싸우신 분들과 그 가족분들이 어떻게 됐고... 이런 얘기도 하지 않겠습니다. pgr에도 그런 분들이 많으실 테니까요.
잊지 맙시다.
32년 전 5월 18일 오늘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는, 광주 시민들은 독재에 맞서 싸웠습니다.
출처 : pgr21 눈시BB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