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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 박근혜
게시물ID : sisa_6314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윤소현
추천 : 4
조회수 : 888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12/07 23:10:50





박근혜

최근 수정 시각 : 2015-12-06 16: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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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8대 9대 10대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 -

이름 박근혜 (朴槿惠)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본관 고령 박씨
소속정당 한나라당→한국미래연합→한나라당→새누리당
종교 (없음)[1]
배우자 (없음)[2]
선거 슬로건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준비된 여성 대통령, 희망의 새 시대
생몰년도 1952년 2월 2일 ~ 현재 만 63세
재임기간 2013년 2월 25일 ~ 2018년 2월 24일(예정)
서명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경력2.2. 정치 경력
2.2.1. 선거의 여왕
2.3. 제18대 대통령 선거2.4. 임기 중 주요 사건/사고
2.4.1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2.4.2. 인사 참사2.4.3. 한국사 교과서 사태2.4.4. 철도 및 의료 민영화 논란2.4.5. 개인정보 유출 사태2.4.6. 언론 통제2.4.7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등의 안전사고2.4.8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2.4.9단통법 및 도서정가제 시행 논란2.4.10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개정 논란2.4.11성완종 리스트2.4.12메르스 사태2.4.13. 국회법 개정안 논란2.4.14. 북한 대남 도발 사태2.4.152015년 11월 민중총궐기2.4.16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 불참2.4.172015년 12월 1차 민중총궐기
2.5. 개인적인 논란
2.5.1. 역사관 논란2.5.2. 권위주의와 소통부족2.5.3. 최저 임금 논란2.5.4창조경제2.5.5증세없는 복지?
3. 기타
3.1. 각종 타이틀3.2전두환과의 관계3.3박근혜 화법3.4대중매체에서
4. 선거이력5. 저서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3] 
2015-12-07 23:05:39 현재 재임 중인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며 대구 출신.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 사후 대한민국의 제8·9대 영부인을 대행했다. 
1998년, 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소속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제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제 16·17·18·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자신이 출마한 선거에서 단 한 번도 낙선한 적이 없으며,[4] 소속당 내 주요 인사로서 각종 선거에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판세를 뒤집고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어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명을 얻기도 했다. 

미혼이라 부군(夫君, 여성 대통령의 남편)이 없다. [5] 

2. 생애[편집]

2.1. 정계 입문 전 경력[편집]

잘 알려진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며, 군사정변 이전 유년시절에는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광주시(현 광주광역시)와 서울특별시를 오가며 생활했다고 한다. 이런 이력 때문에 출신지는 대구광역시이지만 대구 방언이 아닌, 오랜 서울 생활과 옥천군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영향을 받아 충청도 억양이 살짝 섞인 서울말을 구사한다. 아버지가 집권에 성공한 뒤로는 청와대에 거주하였으며, 군사정변 당시의 자신 주변의 일을 회고하기도 했다.
그날 아버지께서 들어오셔서 저를 한번 보고 나가신 것은 기억나는데요. 무슨 숙제를 하고 있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아요. 어머니께서는 집안을 정리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평소와 다르게 긴장되어 있었으나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어머니께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정리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 박근혜의 회고록[6]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던 모습[7] 젊은 시절의 모습
학력은 서울장충초등학교[8] - 성심여자중학교 -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원조 공대녀 이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으나, 재학 도중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하자 귀국 후 공석이 된 퍼스트 레이디를 맡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청와대에서 나온 뒤 1980년 영남대학교,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자리에 올랐고 영남대 이사장에서는 1988년 사임했다. 한국문화재단은 2012년 해산될 때까지 줄곧 이사장 자리를 유지했다. 영남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던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1990년 사임했다. 

2.2. 정치 경력[편집]

199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회창을 지지한다는 선언을 하며 한나라당에 입당,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9] 1998년 전반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2000년에 한나라당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대통령 영애 시절부터 널리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짧은 정치 경력에 비해 당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구축했고, 대권 잠룡으로 부상하였으나 2002년 한나라당 개혁 문제로 총재였던 이회창과 반목하다 탈당하여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다. 이 당시 김정일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김정일과 면담하기도 하는 등 눈길을 끌었으나, 현직 의원이라고는 그 하나뿐인 미니 정당으로 대선 정국에서 운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으로 복당한다. 

대선 패배 이후 총재였던 이회창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최병렬 체제가 들어섰으나, 불법 대선 자금 수사(속칭 차떼기 파동)으로 인해 한나라당이 코너에 몰리는 정국이 되었고, 지역 구도를 극복하는 전국 정당을 표방한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한나라당 내 진보/개혁 성향의 인사들[10]인 김부겸이우재김영춘이부영, 안영근 등이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위기에 봉착한다. 대선 이후 줄곧 노무현과 대립하다[11]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인해 반토막난 야당이 되어 버린 새천년민주당이 대통령 탄핵을 시도하자, 한나라당 역시 숟가락을 얹어 버린다. 그러나 탄핵을 주도한 양당은 엄청난 역풍을 맞았다. 한나라당이 차기 총선에서 두 자릿수 의석을 얻을 것이네 마네 하는 상황이 왔고, 결국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가 대표에 올라 사태 수습과 선거 지휘에 나섰다. 차떼기로 모금한 돈을 되갚기 위해 당사를 매각하고 천막당사를 차려 소탈한 이미지를 어필한 것이다. 당내 소장파들이 탄핵 찬성 철회를 주장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지지층 이탈을 막는 한편, 거대 여당 견제를 부동층에 호소했다. 이외 동시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실언을[12] 하면서 바닥을 찍는 듯했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반등했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에 과반을 내 주었으나, 100여 석을 확보하면 다행이라던 한나라당은 121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한다. 이후 박근혜는 참여정부와 강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존재감을 과시했고, 한나라당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2007년 참여정부의 인기는 시들해졌고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유행어까지 떠도는 상황이었다. 열린우리당 내에는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어 한나라당의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를 영입하여 대권 주자로 내세우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13] 한나라당은 박근혜가 잡고 있었으므로 박근혜의 차기 대권이 유력할 상황이었으나, 독재자의 딸이라는 거부감, 참여정부와의 대립 과장에서 보인 강경함은 지지율 외연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고, 당내 지지는 다소 부족하지만,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둘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고 이때 당은 각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친이와 친박으로 갈라져 진흙탕과도 같았던 폭로전으로 두 사람에 대한 의혹은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의 재탕삼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여담으로 그 유명한 명언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가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과 보궐선거 패배로 박근혜에게 불리한 요소가 하나둘씩 터졌고 경선 룰 공방을 거쳐 결국 이명박이 승리한다. 박근혜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다음 대선으로 기회를 미룬다.[14] 

2.2.1. 선거의 여왕[편집]

한나라당 대표 당시 천막당사로 현판을 옮기는 모습
박근혜가 당 대표로 선거캠페인을 지휘할 때, 당이 언제나 승리했기 때문에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위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총 3번의 선거를 당대표 또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진두지휘하면서 승리를 이끌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121석을 가져서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확보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원래 탄핵정국에서 열린우리당 180석 vs 한나라당 60석까지 밀릴 것으로 예상되던 것을 크게 반등해서 이 정도로 막아낸 것은 천막당사, 거대여당의 폭주를 막을 야당의 존재어필 등 박근혜 대표의 캠페인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된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워낙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권에 대한 반대여론이 커서 이기기 쉬운 선거였지만, 유일한 광역자치단체 접전지였던 대전광역시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가 서울에서 유세도중 괴한이 휘두른 커터칼에 얼굴을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수술직후 깨어난 박근혜가 당직자에게 첫마대로 대전은요?라고 선거판세를 물은 것이 큰 화제가 되고, 결국 대전시장 판세가 역전되어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 때 한나라당은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광역자치단체 12곳을 모조리 이기는 역대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친이계가 한나라당 당권을 장악하면서, 친박계 현역의원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한 이른바 '친박계 공천 학살'이 일어났다. 이에 불복한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여 이른바 친박 무소속[15]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16]라는 당을 급조해 출마했고, 박근혜 본인은 탈당은 안 했으나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습니다"와 같은 발언으로 은근히 친박세력을 지원했다. 이것이 또 한번 대박을 낸다. 친박연대는 무려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정당득표율 13.8%)으로 14석이나 의석을 확보했고, 이와 별도로 친박으로 분류되는 약 16명의 무소속 지역구 의원도 당선되었다. 이들 친박 후보들 덕분에 한나라당은 최대 200석까지도 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과반을 조금 넘기는 대패를 당했고, 친박세력은 한나라당 내의 친박 의원 10여 명과 함께 '한나라당 내 야당'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17]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근혜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연이은 선거에서의 패배, 정권심판론에 따른 당 지지도 추락의 위기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총선과 대선에서 필패라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에 일시적으로 당권을 쥐어 주고[18], 강력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김종인이상돈 등 개혁적 인사와 이준석손수조,이자스민문대성 등 젊은 인사를 영입하였으며, 경제민주화와 같은 개혁적 공약과 행보를 보였다. 때마침 민주통합당의 당내 공천문제와 통합진보당과의 단일화 갈등까지 겹치면서, 선거 판세는 참패 위기에서 '그래도 제1당은 할 수 있겠다'(과반까진 힘들겠지만)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보니 152석의 단독과반 확보

이를 기반으로 박근혜의 선거의 여왕 이미지는 확고해졌으며 그후 자연스레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선주자로 발돋움하였다. 

참고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모든 선거를(재보궐선거 포함) 새누리당을 승리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19]비록 선거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맞게 자신의 이미지 어필을 잘 조절했다는 평.

2.3. 제18대 대통령 선거[편집]

박근혜 대선 후보 포스터
선거캠프에서 처음 발표한 슬로건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으나, 2012년 11월 18일부로 '준비된 여성 대통령'으로 변경하였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박근혜와 대적할만한 인물이 없다시피 했기에 경선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84%에 달하는 득표율로 어렵지않게 통과하며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되었고, 본선에서는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와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토론회에서 눌변을 보이기도 하며 안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20]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게 면전에서 부친을 욕보이는 고인드립(...)에다 패드립(...)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고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라는 어그로발언으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일으켜 박근혜 당선에 한몫하는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켰다. 거기다 훗날 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역관광을 맞게 되었지

그러나 '선거의 여왕' 이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게 복지관련 공약을 선점하며 문재인 - 안철수 후보 단일화에도 단 한번의 지지율 역전도 허용하지 않고 승세를 이어갔고[21]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51%의 득표율로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8대 대선 진행과정에서 국정원의 여론조작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고.

2.4. 임기 중 주요 사건/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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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많다. 사실 많을 수밖에 없었던게, 이 위키가 개설된 때의 현역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리그베다시절 대통령은 정치인에 대한 내용 작성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내용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사회, 정치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이 유난히 많아 다사다난하다.

박근혜정부와 하위 문서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다.

2.4.1.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편집]

제18대 대선에 국정원이 개입하여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글과 댓글 등을 인터넷에 유포한 사실이 검찰 조사 확인되면서 임기 초반부터 곤혹을 치뤄야 했다. 국정원의 여론조작 활동이 대선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리서치뷰 등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김용판의 지시에 따른 서울지경의 허위수사발표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22][23]

리서치뷰 측은 이러한 결과를 두 후보의 최종득표율에 반영할 경우 박근혜 후보는 51.55→47.27%, 문재인 후보는 48.02%→52.3%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의 이택수대표는 김용판의 허위수사발표 직전 문재인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후보의 지지율을 추월하였지만, 경찰의 발표 이후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고 밝혀서 정통성 문제는 반대파에서 계속 거론될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2.4.2. 인사 참사[편집]


당시 여론을 반영한 풍자 개그.[24] 

당선 되었을 때부터 탕평책 인사를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고 인사 선임에 대한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성시경 인사[25]라는 코드 인사를 보이기도 했지만, 전임의 논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윤창중 성추문 사건으로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의 비리에 이어서 아래 논란까지 이어지며 곤혹을 치뤄야 했다.

당장 국무총리 자리만 보더라도 김용준[26]·안대희[27]·문창극[28]이 후보 심사 중 낙마했고 정홍원간신히 세월호 사건으로 중도 사퇴, 이완구는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 정치자금 의혹으로 총리가 된 지 불과 70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김명수 교육부장관 후보의 경우 논문을 표절하고 제자의 연구비를 갈취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청문회에서 무신불립[29]의 뜻을 몰라 뒤쪽 직원들에게 물어본 뒤 "신뢰가 없으면, 뭐라고?"라고 되물어 제지를 받았으며,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은 청문회에서 청문위원들의 질문에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으며, 대답하지 못할 때마다 뒷사람이 답답하다는 듯 시키는 것을 그대로 따라 대답하여 앵무새 장관(...)에다 시도 때도 없이 웃는 태도 때문에 크크큭(...)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윤진숙을모래 속의 진주라며 장관에 임명 강행했으나 여수 기름 유출 사건이 터진 이후 "1차 피해자는 해당 기업, 2차 피해자는 어민"이라는 발언[30]으로 질타를 받자,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가 올린 해임건의안을 박근혜 대통령이 받아들여 결국 경질되었다. 

그리고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메르스 방역 실패로 경질되었다. 

뽑은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역량 부족, 비리 의혹 때문에 청문회 통과에 난항을 겪거나 청문회에도 가기 전에 낙마하는 바람에 "저런 사람들만 뽑는 것도 능력이다"라며 조롱을 받기도 했고,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박근혜정부는 외부에서 인사를 기용하기보다는 이미 청문회를 통과한 사람을 다른 자리에 앉히거나[31], 아니면 국회의원들을 입각시키는 방법으로 인사를 단행하기 시작했다[32].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장관직이나 국무총리직을 맡을 수 있는데,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에게는 신상털기에 가까운 날선 비판을 하지만 현직 동료 국회의원이 장관으로 내각에 들어가게 되었을 경우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확률은 100%(...)라고 한다.

2.4.3. 한국사 교과서 사태[편집]

2015년 하반기 논란의 쟁점

2013년 교학사 출판 한국사 교과서가 일제에게 쌀을 수탈당한 것을 '쌀 수출'이라 기술하고, 일제의 의병 학살을 두고 '의병 소탕'이라 기술하는 등 이념 편향성과, 무려 2,000여개의 오류가 발견되는 등 내용도 부실해 검정교과서의 흑역사가 되었고, 사실상 0%에 수렴하는 채택률을 보이면서 일각에서는 학계의 다양성이 부정되는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결국 이는 2015년 추진되고 있으나, 보수 정권의 장기화로 인한 교과서의 우편향이 나타날 것이란 우려와 세계의 교과서 추세가 현재 우리나라가 채택 중인 검인정을 넘어 자유발행제로 넘어가고 있다는 점, 국정교과서의 저작권은 교육부에게 있기 때문에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으며 만약 보수에서 진보 쪽으로 정권이 바뀌면 역사교과서 내용 또한 바뀌게 될 가능성이 높아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점, 현재 사용되고 있는 검인정 역사교과서들이 대개 좌편향되었다고 하지만 이 교과서들의 내용을 검사해 학생들에게 교과서로 사용하도록 허가해준 건 다름 아닌 교육부라는 점 등등 다양한 문제점으로 인하여 정치권은 물론 학계, 대학생 및 중고등학생들까지도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와 맞물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10월 22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원유철 원내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당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와의 회담에서 "우리 역사를 스스로 비하하는,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역사 서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책을 읽어보면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끔, 우리 역사는 부끄러운 역사인 것으로 기술돼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에 이종걸 원내대표가 "부끄러운 역사로 보이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인가"라고 묻자 "전체 책을 다 보면 그런 기운이 온다"(...)라고 답해 누리꾼들로부터 또다시 조롱을 받기도 했다.


오마이뉴스 레알영상.
http://wiki.dcinside.com/wiki/%EB%B0%95%EC%A0%81%EB%B0%95 디시위키에 박적박 문서
그리고 과거 한나라당 대표 시절의 주장과 현재의 행보가 정확히 반대되고 있어서 일관성 없는 자세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한편 한국 갤럽이 국정화 확정고시 직후 전국 남녀 유권자 14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한 결과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전주 대비 3% 하락하여 41%, 새누리당은 2% 상승한 41%, 새정치연합은 2% 하락한 20%를 기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2013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2015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 참조.

2.4.4. 철도 및 의료 민영화 논란[편집]


정부 자체가 우익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인 정책 때문에 논란이 된 것은 2015년 현재 이 것 말고는 없는 듯하다. 박근혜 정권 자체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권위주의 우익 정권이라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애초에 철도 민영화 논란 자체가 이명박 정권 말기에 시작된 일이기도 하고. 

사실상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진보 세력 입장에서는 민영화가 덜 논란이 되는게 편할 수도 있겠다. 민영화 보다는 권위주의에 맞서는게 차라리 더 모양새가 그럴싸하고 호응을 얻기도 쉽기 때문. 

2.4.5. 개인정보 유출 사태[편집]

개인정보 유출사태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건 참조.

사실 개인정보 유출사건은 인터넷 보급과 함께 시작됨으로서 박근혜 이전에도 발생되어 왔으나, 빈도도 점점 늘어나고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사건'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는 등 사회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심지어 박근혜 본인도 털렸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었다(...)

2.4.6. 언론 통제[편집]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개정에서 10조 2항 '명예훼손 등 타인의 권리 침해와 관련된 정보는 당사자 또는 그 대리인이 심의를 신청해야 심의를 개시한다' 라는 규정을 삭제 하겠다고 하였다. 별거 아닌것처럼 보이지만만약 현 정부에 반하는 내용이 인터넷에 보인다면, 제3자의 요청, 방심위 내부판단에 따라 삭제가 가능하다는 것. 정보통신에 관한 심의규정 문서 참조.
국경없는기자회와 보수 성향 국제인권감시단체 프리덤하우스는 2013년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2014년 세월호 관련 보도규제[33], 통합진보당 해산사건, 주요 언론사의 친정부성향과 대기업 자본, 정권과의 유착관계 등을 이유로 들어 2015년 박근혜 정부 집권기의 대한민국 언론자유도를 분명히 문제 있음부분적으로 언론자유가 있는 국가로 분류하였다. 2015년 KBS 특집 프로그램으로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의 친일파와 간첩조작 사건을 주도한 인물들의 훈장 서훈을 다룬 <친일과 훈장>, <간첩과 훈장> 방영이 보류되는 등 공영방송 인사권을 가진 대통령 권한 특성상 이런 현상은 상당히 우려할 만하다. 더불어서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포털 심사, 대통령 직속기관인 방심위/방통위의 정보통신 심의규정 등 언론통제정책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반면 국제사면위원회와 국제노동기구(ILO)는 각각 세월호 시위진압과 2013년 전교조 법외노조화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

2.4.7.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등의 안전사고[편집]

2014년 4월 16일,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뒤집어져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및 교사 250명과 일반인 승객 54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해상 참사가 발생했다. 사고 발생 직후 세월호에 타고 있던 승객 모두 구조되었다는 발표와 보도가 나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을 때 가까스로 바깥으로 탈출한 승객들은 출동한 해경과 인근 어민들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끝내 탈출하지 못한 나머지 승객들은 모두 배와 함께 가라앉아 버렸다. 이후 배 안의 시신들을 바깥으로 꺼내는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이 작업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논란이 많았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가 뒤집어진 지 7시간 만에 현장을 방문해 중앙재난대책본부 관계자들과 회의를 하면서 "(단원고) 학생들은 모두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던데 발견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관계자가 승객들이 배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구명조끼가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 회의로 대통령이 어떻게 7시간 동안 승객들이 뒤집어진 배 안에 갇혀 있다는 상황을 몰랐냐는 질타를 받았다.해당 영상. 박 대통령의 구명조끼 질문은 1분 10초부터

이 7시간을 놓고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 시간 동안 박근혜 대통령이 어디에 있었으며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34] 일본의 한 극우 신문은 후술할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정윤회 씨와 이 7시간 동안 밀회를 했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세월호 외에도 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가진 문민정부 가 연상될 정도로 수많은 안전사고를 겪기도 했다. 세월호 사건 불과 2개월 전에는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가 일어났고, 판교 공연장 환풍구 붕괴 사고 및 뒤이은 해양 사고인 돌고래호 전복 사고가 일어났다.[35]

2.4.8.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편집]

별도 문서 참고.

2.4.9. 단통법 및 도서정가제 시행 논란[편집]

별도 문서 참고.

2.4.10.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개정 논란[편집]

일명 딸통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별도 문서 참고.

2.4.11. 성완종 리스트[편집]

별도 문서 참고.

2.4.12. 메르스 사태[편집]

적절한 초동 대응에 실패하여 사태가 악화되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특히 중국에서 사스가 창궐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하여 사스의 국내 진입을 잘 막아내서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받았던 노무현 정부와 비교되면서 박근혜 정부의 방역 실패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평이 압도적인 국내 여론과는 달리, 해외에선 한국 정부의 메르스 대처에 대해 긍정적인 평과 부정적인 평[36]이 모두 나왔다. 기사

나빠진 여론을 의식해 사전에 계획되어 있었던 6월 14일 방미 일정을 취소하였다.

2015년 9월 1일, 신규질병이 생기면 질병관리본부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2015년 10월 12일 80번 환자가 재 감염된 것이 확인되어 10월 19일 현재 입원치료중이다.기사

2.4.13. 국회법 개정안 논란[편집]

2015년 5월 29일, 여야의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일이다. 국회법 개정안의 골자는 대통령령, 총리령 등 정부에서 내리는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법률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판단 할 경우 이를 정부에 '통보' 할 수 있었던 것을 '수정 요구' 할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인데, 이는 재판부의 법률해석권과 행정부의 행정권에 대한 국회의 월권 소지와 논란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법안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한다며 거부권을 행사하였는데, 이를 두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의원과 마찰을 빚어 언론에서 크게 다루어 졌으나 청와대의 압력 끝에 유승민은 원내대표직을 사퇴하고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소위친박을 필두로 나뉘어진 새누리당 내부의 계파갈등을 보여준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국회법 및 유승민 문서 참고.

2.4.14. 북한 대남 도발 사태[편집]

목함지뢰 사건을 필두로 시작된 김정은의 대남 도발로 남한 측에서는 대북 확성기를 실행시키는 반격을 개시했고, 북한측은 철회를 요구하며 서부전선을 포격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김정은은 '준전시상황'을 발표하며 으름장을 놓으며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였으나 확성기 및 미군의 부담으로 인해 김정은이 남북 회담을 제안하여 33시간의 회담끝에 협의문을 타결하고 사태는 종결되었다. 일관성 있고 단호한 대북외교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계속되는 논란 및 실책으로 위기상황에 놓인 지지율에 오랜만에 반등의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DMZ 목함 지뢰 도발 사건서부전선 포격 사건 문서 참고.

2.4.15.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편집]


추가바람.

2.4.16.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 불참[편집]

2015년 11월 26일 건강상의 이유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헌화을 하였으나 국회의사당 앞 뜰에서 약 1시간 20분정도로 진행되는 영결식에는 대통령 주치의인 서창석 서울대병원 교수의 권고로 불참. 박 대통령의 건강상태를 피로가 누적돼 면역력이 감소한 상태이며, 안정이 필요한데 오늘 같은 추운 날씨에 1시간 30분 동안 실외에 있기에는 무리라는 얘기다. 최근 고열과 인후염을 동반한 감기증세를 보여 운구차가 떠나는 8분동안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로서 최초로 국가장 영결식에 참가하지 않은 현직 대통령인 기록 아닌 기록을 쓰게 되었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일고 있는데 박 대통령의 개인사을 이유로 참석을 하지 않는 것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참고로 바로 29일에 기후회의 참석으로 출국하는데다 잦은 출국이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지라 '영결식 갈 힘은 없는데 여행갈 힘은 있다' 라는 확대해석이 이는 중이다.

2.4.17. 2015년 12월 1차 민중총궐기[편집]


추가 바람. 

2.5. 개인적인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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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역사관 논란[편집]


오마이뉴스.

진보진영 쪽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이 독재자인 아버지의 행보를 옹호하고 역사를 왜곡한다며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로써는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역사의식을 가졌다고 비판한다. 1989년 5월 19일 MBC 시사토론 방송,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회,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 등 여러 차례5.16 군사정변에 대해서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며 구국의 혁명이라고 발언했으며, 10월 유신은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버지 시절 일어난 인권유린과 간첩조작,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해서는 일체 부정하거나 침묵하였다. 한편 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 합동토론회에서 5.16 구국 발언은 국민 과반수가 동의한다면서 자신의 역사관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이후 반대되는 조사결과가 나오자##2#3 침묵을 선택했다. 이후 임태호가 재차 질문하자 과거에 묻혀 사시네라고 답변했다. 대선 후보 시절에서부터 집권 3년차에 이른 현재까지 매우 일관적으로 여론조사에 따른 자신의 발언과 정책에 대한 지지율을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하다. 특히 위의 5.16 구국 발언과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맹목적 옹호에 대해서는 아직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렇게 동의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론조사를 통한 자신의 지지율이 고점을 찍고 있을 때 2015 한국사 국정 교과서 사태 와 같은 굵직한 일들이 발표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왜곡될 수도 있는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엿보인다.

대표적으로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해서는 우리 아버지가 그런 일을 지시했을 리가 없다. 북한의 소행이다라고 부정했으며, 대선 때 박정희 정권 말기에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의 진상조사를 약속했으나 국회 상임위에서 관련 특별법이 일반법으로 바뀌고, 여아 원안에 있던 '진상규명'이 삭제되었으며, 진상조사에 합의한 여야 위원 수를 줄이고 대통령 임명 위원 수를 크게 늘렸다. 가해자의 동행명령권도 삭제되는 등 상당히 공정성을 해치는 사례이다.

또한 박정희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이자 간첩조작 사건인 인혁당 사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04년 8월 29일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시절엔 인혁당사건 사과를 요구받자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 헐뜯기에 불과하다. 법적으로 이미 끝난 일이라고 주장했고, 2005년 12월 8일 국가정보원에서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음을 발표하자 한마디의 가치도 없는 모함이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인사들이 모여 역사를 왜곡하고 헐뜯는 수작에 불과하다며 노 대통령을 비난했다. 2012년에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했지만, 아버지 시대에 간첩이라고 판결이 났다. 판결이 두 개지 않느냐'''는 망언을 했다. 이 말은 2012년 9월 10일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서 한 말인데 인혁당 사건에 관한 손석희 진행자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인터뷰했다.

☎ 손석희 / 진행 : 예를 들면 말이죠. 사실 그동안에 특히 유신 피해자한테 그동안에 정치과정에서 나름 깊이 생각하고 사과한다는 말도 일부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예를 들면 유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라고들 얘기하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 대해서 혹시 사과할 생각이 있으신 건지요? 

☎ 박근혜 : 그 부분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어떤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답을 제가 한번 한 적이 있습니다.

☎ 손석희 / 진행 : 거기서 특별히 더 진전된 것은 없다.

☎ 박근혜 : 예, 왜냐하면 다른 판단이 나왔기 때문에, 똑같은 대법원에서.[37]


이 사건은 삼권분립이 보장되지 않던 제3공화국 군정시기에 일어난 사법살인이란 점을 감안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다. 비판이 짙어지는 와중에도 대법원 판결은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당시 조직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증언까지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끝까지 버티다가 9월 24일, 아버지 시대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지만, 87년 민주화 이후부터 쭉 아버지를 옹호해왔던 사람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 한번 안하다가 대선이 가까워지자 사과한 것이야말로 대선을 의식한 행보였고 기자들의 질문을 일절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떨어진다.

2015년 최근에는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상당한 논란과 함께 우려를 불러 일으켰고, 결국 2015 한국사 국정 교과서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때 마침 대통령 자신은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민주주의 국가 중 국정교과서를 채택한 나라가 단 한 군데도 없으며, 오히려 북한러시아베트남 등의 정치 후진국에서 국정교과서를 쓴다는 점에서 기득권의 입맛에 맞춰 미래 세대에게 왜곡된 역사를 주입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박 대통령 본인의 역사관 문제도 그렇거니와, 박 대통령이 극우 진영으로 식민지근대화론과 친일, 독재 미화로 지탄받았던 뉴라이트 인사들과도 상당히 친하다는 점도 중대한 문제다. 2005년 뉴라이트 전국연합과 한나라당의 길은 다르지 않다며, 뉴라이트가 미래의 희망이고, 뉴라이트 교과서를 극찬했다. 그리고 이 뉴라이트 진영이 만든 교과서가 2013년 논란을 빚은 교학사 교과서.

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 줄곧 자신과 역사관이 비슷한 인사 또는 뉴라이트 출신들을 각계각층에 앉히면서 꾸준히 야권과 진보진영에게 비판받아 왔다. 노무현과 김대중,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란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며 교학사 교과서는 훌륭하다고 말한 이인호 KBS 이사장, 식민지배는 하나님 뜻 발언으로 총리 후보자에 지명됐다 사퇴한 문창극이 대표적이다. 김기춘 청와대 전 비서실장 역시 유신헌법의 초안을 만든 사람이다.

1989년 MBC 박경재 방송에서 5.16는 구국의 혁명이었고, 아버지의 업적이 폄하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싶다고 발언했는데 지금 청와대가 균형잡힌 역사교과서 만들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입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대선 시절에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분, 저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태도를 고수하며 가급적 역사관 논란을 피하려 시도했지만, 집권 이후 하나의 역사를 가르치겠다며 돌변한 것. 급기야 5자 회동에서 현 검정교과서는 좌편향북한의 정통성을 주장한다는 발언을 했다. 극우세력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연좌제가 폐지된 지금 와서 아버지가 독재자였다고 해서 딸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지만, 사상적으로 아버지에게 많이 영향을 받았으며, 아버지와 딸이란 개인사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아버지란 이유 하나로 과거사를 부정하고 진실을 왜곡한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지금 박 대통령은 일국의 국가원수란 자리에 앉아 있단 점에서... 

사실 박 대통령이 독재자의 딸이란 사실 자체가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김정란 상지대학교 교수의 경우, "박근혜를 인정하는 것은, 박정희를 완전히 복권시키는 일이며,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민주화의 역사적 의미를 완전히 무로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근혜가 아버지의 유산을 단호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 그 신화를 누리려고 하는 한, 박근혜는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와 육영수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으며, 더불어 "우리 사회를 지역주의의 망령 속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이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적 판단에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염려했다. 참고로 김 교수는 박 대통령이 여자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여성인권이 신장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박근혜 지지는 순진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작동할 확률이 거의 없다"며 "합리적 정책 개발이 아니라 지역감정을 이용해 정치적 기반을 쌓았다"며 일축했다.

기타사항으로 취임사에 환단고기 단군세기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는 위서인데다가 해당 구절은박은식의 <한국통사>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다.[38] 환빠대통령이라니 맙소사 아니, 수첩 대통령이라는 이명을 생각해보면 직접 쓴건 아닐거다. 아마...

2.5.2. 권위주의와 소통부족[편집]

정계 입문, 새누리당 국회의원 및 대표, 대선 후보에서부터 집권 3년차에 이르는 현재까지 박근혜 대통령이 일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문제점 중의 하나이다.[39]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권위주의와 불통은 결국 그녀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몰이해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대통령이라는 직분을 민주주의하에 통치행위를 양도받는 계약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아버지-박정희와 함께 운명적으로 엮여진 일종의 소명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왕권신수설? 실제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갖는 권력은 조선시대 왕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범위도 넓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통치행위를 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기술된 편향된 역사 및 이념관 그리고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2015 한국사 국정 교과서 사태를 보아도 이는 어느 정도의 사실로 보인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10살 때부터 20년이 가까운 시간을 권좌의 자리에 있었던 아버지와 함께 청와대에서 생활을 하였고, 정계에 입문한 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항상 권력의 최정점 또는 그 근처에서 살아왔다.[40] 또한 이것이 계속 되면 남은 2년여의 재임 기간 및 그 이후에도 암군 또는 혼군으로서 역사에 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

국민과의 소통의 부재역시 권위주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취임 3년차인 2015년까지 공개 기자회견을 가진 횟수가 열손가락 안에 드는데, 이는 국민과의 소통을 중요시한 노무현은 물론 같은 보수성향인 이명박 보다도 한참 모자란 수치다. 세월호 사건을 보더라도 국민과의 소통 부족으로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 등 논란이 생겨났으며 미숙한 해명으로 국민의 신임을 잃어가는 것이 현황이다. 좋게 표현하자면 외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걷는 리더쉽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의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맞는 길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2.5.3. 최저 임금 논란[편집]

박 대통령은 2012년 8월 7일 뉴미디어 토론회에서 최저 시급을 묻는 사회자에게 5000원 좀 넘는 것 아니냐고 대답했다. 알다시피 당시 시급은 4580원이었으며, 이에 박 대통령은 아르바이트 시급이 5000원이 안 되느냐고 대답했다. 참고로 박 대통령은 지난 18대 대한민국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이었다. 결국 야권에서는 박근혜는 "평생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사람", "서민과 노동자의 생활에 관심이 없는 사람" 이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의 서민 코스프레가 위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강력히 비판받았다. 이는 (그의 현직 대통령의 위치를 감안하면) 그의 위선과 서민 코스프레에 더하여 국가의 현황에 대한 지식이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41]

2.5.4. 창조경제[편집]

별도 문서 참고. 박 대통령이 대선 때부터 줄곧 내세웠던 창조경제는 비전이 불명확하고 구체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2.5.5. 증세없는 복지?[편집]

대선 후보시절부터 '증세없는 복지' 라는 슬로건을 외쳤으나, 아직까진 뚜렷한 복지정책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담배값 인상 등 증세의 움직임만을 보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3. 기타[편집]

이런 게 아니다.(...)[42]
  • 벨기에 만화 땡땡의 모험의 열렬한 덕후팬, 속칭 땡땡주의자다. 농담 아니다! 이 때문인지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던 시절, 육영재단에서 발간했던 만화 잡지 보물섬에서 땡땡의 모험이 연재되기도 했다. MBC에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기도 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시절에 브뤼셀에서 한국전 참전 기념탑 참배 행사 일정 이후 계획에도 없던 만화 박물관을 방문하기도 했다. 여기서 수행원들에게 열심히 땡땡을 설명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취임 첫 해인 2013년 프랑스와 벨기에 영국 방문 당시 벨기에 국왕 앞에서 이 만화를 언급하며 팬 임을 인증한 바 있다.
  • 정계 입문 시절부터 수첩을 애용(?)하는 모습을 보여와 수첩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있다.
  • 는 암살당했고 본인도 괴한의 습격으로 면도날에 오른쪽 뺨을 베여 생명을 위협당한 적이 있다.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때에는 본인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 마크 리퍼트 대사를 위로했다.
  • 대통령 선거 연설 중 배경에 있는 새누리당 로고앞에서 묘한 위치선정으로 사진이 찍히자 네코미미(..)가 연상되어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
  • 커뮤니티에서 '박근혜'의 야민정음 버전으로 '박ㄹ혜'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물론 대부분 비하적 의미.
  • 관용차는 에쿠스 특수제작 모델을 탄다. 대통령님 에쿠스 타신다
    제네시스를 타기도 하는 것 같다. 여담으로 뒤의 인물은 국가과학자문기술위원회 부의장이자 울산과학기술대[43] 초대 총장이자 마지막 총장인 조무제 전 총장.자세히 보면 본인이 직접 운전석에 타신다
  •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박연대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하는 쾌거를 맛봤으나, 박근혜 팬클럽인 박사모가 기자회견장을 점령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졌고 한나라당 의원이 출동하는 소란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같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두 단체에서 일어난 싸움이라 주목을 받았다.영상
  • 가족으로는 여동생 박근령, 장남이자 남동생 박지만이 있다. 박근령은 최근 친일관련 실언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었고, 박지만은 예전에 마약으로 여러번 구속된 흑역사(?)가 있었다. 지금은 손을 뗐고 기업인으로서 잘 살고 있는듯. 물론 이들의 논란은 연좌제마냥 박근혜를 공격하는 소재가 되지 말아야 할것이다. 정작 박근혜 본인은 둘과의 관계는 좋지않아 선을 긋는 분위기다.
  • 前 젝스키스 멤버이자 가수 은지원과 친척관계다. 박정희의 누나 박귀희의 친손자, 즉 5촌 관계로서 은지원 입장에서는 진외당고모, 약칭으로 고모라고 부르는 사이다. 2011년 같이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와 화제가 된적이 있었으며, 박근혜가 대선 후보였던 시절 선거운동에서 지원유세를 했던 적도 있었다.[44] 대통령의 8촌 이내의 가족 및 친척들은 특별관리대상이 됨으로서 은지원도 그 덕택을 누리게 되었다.[45] 더불어 방송국에서 그를 건들 일은 없을 것이다
  • 믿는 종교는 없지만 종교활동을 한 이력이 다소 독특하다. 현재는 종교가 없지만 가톨릭을 믿은 적도 있고 불교를 믿은 적도 있는데 둘 다 세례 및 수계만 받고 종교활동을 하지 않는다. 박근혜의 가톨릭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불교 법명은 '해당화'이다.
  • 다른건 몰라도 볼펜하나는 잘세운다.
  • 말이 험해지고 있다고 한다.
  • 음모론적인 요소로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순방에 나설때 마다 나쁜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뉴스
  • 어떤 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중 지금의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는 말에 자신의 촌평을 붙여 놓았다기사

3.1. 각종 타이틀[편집]

  • 최초의 여성 대통령
  • 최초로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과반을 득표한 대통령
  •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선거에서 박근혜와 문재인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의 득표율 총합이 1%도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실상 문재인 한 사람과의 대결에서 이긴것이라 이렇게 된 것인데 그래서 문재인에게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하고 낙선한 대통령 후보라는 기록이 추가되었다. 이는 제18대 대통령 선거가 얼마나 빅 매치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 역대 최다 득표수를 얻은 대통령
  • 이전 기록은 02년 대선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얻은 1201만 4277표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물론 2위로 낙선한 문재인까지 이 기록을 깼다.
  • 최초의 부녀 대통령
  • 최초의 미혼 대통령
  • 대한민국 정부수립(1948년 8월 15일) 이후 태어난 첫 대통령
  • 참고로 광복(1945년 8월 15일) 이후 태어난 첫 대통령은 노무현. 차이점은 노무현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 최초의 이공계 학과 출신 대통령
  • 이승만은 정치외교학, 윤보선은 고고학, 최규하는 영어영문학, 박정희,전두환,노태우는 육군사관학교, 김영삼은 철학, 김대중, 노무현은 고졸, 이명박은 경영학. 박근혜는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참고로 대통령은 아니였으나 행정부 수장이였던 장면은 법학,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허정은 법학(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現 고려대) 및 항해학(유학), 국무총리 고건은 도시계획학 출신이다.

3.2. 전두환과의 관계[편집]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사후 청와대에서 나온 박근혜는 1979년 당시 보안사령관 신분이었던 전두환으로부터 맡고 있었던 박정희 재산 10억 중 6억을[46] 예우 차원에서 받은 사실이 있었다.[47] 처음 알려졌을 당시에는 9억 원이니 뻥튀기해서 6억 달러(!)라니 수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청문회를 통해서 수령한 9억 중 3억은 김재규 사건 수사 격려금으로 지급한 것으로 알려졌고 6억은 본인 및 형제의 생계비로 썼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찌됐든 이는 적잖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둘의 일정이 안맞았는지 박근혜의 이미지 관리 때문이었는지 정계 입문 후 전두환과는 접촉은 몇 되지 않았고, 공식적인 만남은 2004년 이후로는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다 2013년 박근혜 대통령 취임을 시작으로 약 10년만에 전두환과의 접촉이 있었으니, 그것은 전두환 재산 압류. 기껏 챙겨준 당사자에게 통수를 맞았다. 검찰의 전두환의 미납 추징금 수사가 진행되었고 100억 가량의 예술품 및 부동산이 발견되어 몰수되기도 했다. 은닉 재산 수사의 자세한 내용 추가바람.

3.3. 박근혜 화법[편집]

대통령 특유의 화법은 대중들에게 여러모로 관심을 받고 있다. 자세한 사항은 별도 문서 참고. 

본래부터 이름값 높은 정치인에 어울리지 않게 눌변으로 유명했으며 대선 토론회를 계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48] 토론 중 나온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거 아니겠어요" 라는 발언은 현재도 화자되는 흑역사 눌변의 표본. 별개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선거 경선 당시 연설 중 "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 몰아치면 다 들통나게 됩니다" 라는 발언도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49]

박근혜 화법과 별개로 말실수로도 꽤나 유명하다. 2012년 대선을 위해 비례대표직을 사퇴한다는 기자회견에서15년 동안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눠왔던 대통령직을 사퇴한다는 발언을 해 마음속으로 줄곧 자신이 대통령이라 생각한게 아니냐는 비아냥을 받았다. 서강대 공대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대선 토론에서 이산화탄소를 이산화가스, 탄소로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거나, 힐링캠프에서 윌리엄 블레이크의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말을 인용하며 꿀벌을 벌꿀(...)로 잘못 말했다. 그 외에 18대 대선토론에서 솔선수범을 특유의 박근혜화법인 "솔선을 수범해서..."라고 발언하거나 "지하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실수하였다.

3.4. 대중매체에서[편집]

제4공화국(드라마)에서 전유진이, 그리고 제5공화국(드라마)에서 고정민이 연기했다. 코리아게이트에도 출연했다. 

4.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98 1998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15대 국회 대구 달성)[50]
한나라당 34,271 (61.3%) 당선 (1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 한나라당 37.,805 (61.4%) 당선 (1위)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 한나라당 45,298 (70.2%) 당선 (1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성) 한나라당 50,149 (88.6%) 당선 (1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 1번) 새누리당 - 당선 (1위) 2012년 11월 의원직 사퇴
(제18대 대통령 선거출마)
2012 제18대 대통령 선거 새누리당 15,773,128 (51.2%) 당선 (1위)

5. 저서[편집]

파일:x9788960860339.jpg

6. 관련 문서[편집]


[1] 천주교에서는 세례만 받았고 불교에서는 수계만 받은 채 양쪽 모두 믿지는 않고 있다. 박근혜의 천주교 세례명은 '율리아나'이며 박근혜의 법명은 '해당화'이다.[2] 결혼을 안해서 부군이 없다.[3] 한반도에서 신라 진성여왕 이후로 처음 등장한 여성 국가 수반이다. 사실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서조차도 여성 국가 지도자는 현대까지 상당히 드물다.[4]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출마한 선거'가 아니라 '자신이 관여한 선거'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졌다.[5] 보통 통령직 여성의 남편을 '영부군'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부인'의 영(令)은 남을 높여 부를 때 쓰이는 접두어로, '대통령'의 '영/령(領)'과는 다르다. 따라서 영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남편을 높여 부르는 호칭인 '부군(夫君)'이 적합하다. 실제로 부군이라는 말은 영어에서 여왕이나 여성 대통령의 배우자를 지칭할 때 쓰이는 consort라는 말의 번역어로도 쓰이고 있다.[6] 박정희가 정변을 위해 떠나기 직전 숙제를 하던 당시 초등학교 5학년 박근혜를 포함한 가족들을 둘러본 일이었다. 정변이 실패하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만남을 가질 목적이었던 듯.[7] 우측 상단이 박근혜. 중앙은 박정희, 우측 하단 박근령 - 좌측 상단 육영수 - 좌측 하단 박지만.[8] 이때 정몽준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동창이었다.[9] 이 때 본인의 자서전에는 'IMF 사태를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적혀있다.[10] 의외겠지만 당 총재가 공천권을 휘두르던 시절, 김영삼이 개혁 공천을 표방하면서 많이 끌어들이기도 했고, 97년 대선 직전 민주당이 정권 교체냐 3김 청산이냐의 갈림길에 있을 때 3김 청산을 주장하던 인사들이 이회창 지지로 돌아서면서 넘어가기도 했다.[11] 대립의 근원을 앞으로 당긴다면 2000~1년 전후로 나타나 이어진 민주당 정풍 운동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이후 대선 과정 및 대선 자금 수사, 대북 송금 수사 등으로 곪아 터졌다.[12] 젊은이에게 투표를 독려하는 의도로 한 발언이 노인폄하 발언으로 번지면서 생긴 논란이었다. 정동영 문서 참조.[13] 그도 그럴 것이, 손학규 지사가 명망 높은 대권 주자이긴 했지만, 한나라당에서는 3위권 주자였다.[14] 박근혜는 당원, 대의원,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전화 여론조사에서 뒤집혀 이명박에게 패배했다. 이 전화 여론조사도 사실 뒷말이 엄청 많은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의 이명박에 대한 비판 문서에 다 나와있다.[15] 김무성김세연 등이 유명하다[16] 서청원이 당대표를 맡았다[17] 총선 직후에는 이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친박세력이 전략적으로 야권과 공조하면, 친박+자유선진당+토압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 세력이 사실상의 여소야대를 이루며 친이계 한나라당의 정국주도권을 뺏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천시에서,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자 친이계의 실세로 평가받던 재선의원이방호가 민주노동당 강기갑에게 178표 차이로 패배했는데, 이것이 친박성향 한나라당 지지층이 단지 이방호를 떨어뜨리기 위해 강기갑을 지지하면서 벌어진 결과라고 평가받았다. 비록 현실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만 제외하면 보수성향에 맞춰 알아서 잘 협력했지만.[18] 한국의 정당은 200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모두 당권과 대권을 나누어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를 한 사람에게 몰아 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당과 정당 구성원의 생사여탈권을 넘긴다는 것을 의미한다.[19] 지방선거서 광역자치단체장이 새정치민주연합보다 1석 뒤진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초자치단체장은 새누리당의 압승이었다.[20]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 화법 문단 참고.[21] 초창기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의 3자 대결에서도 모두 우위를 이어갔다. 다만, 박근혜 - 안철수 양자대결에서는 밀린적이 있었다.[22] 전국 득표율과 거의 비슷하게 나온 인천광역시의 시민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경찰이 사실대로 발표했을 경우 박근혜 투표층의 13.8%가 문재인을 찍었을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는 전체 득표율의 7.12%p에 해당된다[23] 리서치뷰가 2013년 10월 27일 전국 만 19세 이상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도 경찰이 제대로 발표했었다면 대선 결과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박근혜 투표층 중 8.3%는 경찰이 사실대로 발표했을 경우 문재인 후보를 찍었을 거라고 응답했다.[24] SNL 코리아 글로벌 텔레토비 2013.03.30 방영분[25] 성균관대 - 고시출신 - 경기고. 물론 해당 가수 본인은 잘못 없다[26]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으로 자진 사퇴[27] 부당한 전관예우 의혹으로 자진 사퇴[28] 일제강점기는 당시 조선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하는 강연동영상이 유포돼 친일 논란으로 자진 사퇴[29] 믿음이 없으면 일어설 수 없다는 뜻으로, 공적 사적 관계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자성어[30] 기름이 유출되어 1차적으로 기업이 손해를 입고, 사고로 인해 2차적으로 어민까지 피해를 입었다는 취지로 풀이되나 당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였다.[31] 황교안 현 국무총리가 대표적인 예. 원래 법무부 장관이었지만 이완구 사퇴 이후 국무총리로 임명됐다[32] 최경환 기획경제부 장관, 황우여 교육부 장관,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이 그 예[33] KBS 길환영 사장, 김시곤 보도국장이 관여하였다.[34] 물론 대통령의 동선은 기밀이기 때문에 물어본다고 대답하는 게 맞느냐는 쪽과 이미 다 끝난 과거의 스케줄인데 반드시 비공개해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는 쪽이 맞섰다.[35] 앞선 세월호 사건을 제외한 나머지 사건은 사실상 정부의 잘못보다는 안전불감증의 탓이 더 크다. 마우나리조트의 경우나 판교의 경우나 모두 설마설마하다 일어난 대형 사고였다.[36] 특히 중국의 경우는 메르스 환자가 방역 당국의 관리 소홀로 중국으로 출국하게 놔둬서 병이 중국에까지 퍼지게 되자 반한 감정이 증가했다[37] 참고로 박 후보가 말한 "대법원의 두 가지 판결"은 고 박정희 대통령 통치 기간의 대법원과 2007년의 대법원의 판결을 말하는 것이다.[38] 이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증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39] 이를 상징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사용하는 어휘가 "좌시(하지 않겠다), 엄단(하겠다)" 등이다. 전임 이명박 대통령 때도 이런 어휘가 쓰였지만 그 빈도가 늘어나는 추세[40] 즉 60여년의 시간 동안에 그녀가 가진 직업(?)은 20년 동안 대통령 (그것도 엄청난 힘을 가진 독재자)의 자식-15년 동안 정수장학회/영남대학교의 이사장-15년 동안 국회의원 및 거대야당의 대표-대통령.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권력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시민을 비롯한 진보계열의 정치평론가들은 현재까지 문제가 되고 있는 그녀의 권위주의와 불통은 그녀의 삶 전반을 아우르는 제왕적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으며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71화)[41] 비단 박근혜 뿐만아니라 정치인에서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에 가깝다. 정몽준도 버스비를 70원이라고 말한 사실은 유명하고 70년대서 타임슬립 하셨나, 야당도 예외는 아닌게 안철수도 질의에서 라면값을 몰라 진땀을 뺀 사실이 있었다. 그렇다고 정치인으로서 서민 생활치를 모른다는 사실은 정당화해선 안될 부분.[42]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 참석할 당시 탄소 소재로 만든 기타를 만져보는 모습. 실제로 코드 몇개는 칠 줄 안다고 한다.[43] UNIST가 울산과학기술원으로 전환한 이후는 총장직에서 물러났다[44] 공인이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이유로 잠시 논란이 된적이 있었는데, 대다수는 "친척 일을 도울수도 있지" 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45] 사실 은지원이 1978년 생으로서 태어나자마자 박정희가 서거하기까지 1년간 같은 혜택을 누린 적이 있었다.[46] 물론 지금 기준으로도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상당한 거금이였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물가 기준치로는 당대 최고의 부동산으로 꼽히던 은마아파트를 30채 가량(1978년 31평형의 분양가가 2,090만원)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한다. 2015년 기준으로 대략 300억 원 정도.[47]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재현되기도 했다.[48] 사실 문재인까지도 눌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ㅅ' 발음에 약하다는 분석이며 토론에서는 유례없이 양측 후보 모두 말을 버벅거리는 진광경(...)을 보이기도 했다.[49] 여담으로 이때 이명박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거 아시죠" 라는 발언도 나왔다. 아쉽게도 쓰나미는 이 발언에 비해 임팩트가 후달렸다(...)[50] 전임자 김석원 의원직 사퇴[51] 다소 권위적인 모습에다 코렁탕이 성행하던 시절이 연상되는 출신성분 때문인지 박근혜 관련 유머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출처 https://namu.wiki/w/%EB%B0%95%EA%B7%BC%ED%98%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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