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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하시마, 다카시마와 관련된 이야기
게시물ID : muhan_631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닥호
추천 : 12
조회수 : 2157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5/09/13 01:23:31
1. 저는 일제강점기를 전공하고 있고, 대안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2006년에 우토로를 방문하기도 했고, 2010년과 올해에는 학교의 선생으로서 하시마와 다카시마 나가사키 일대를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는 저희가 하하보다 1주일 먼저 다녀왔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오늘 무도가 저에게 주는 의미가 참 컸습니다. 무도를 본 김에, 그 지역을 둘러보면서 느꼈던 것들과 몇 가지 사실들을 불페너 분들과 더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적어봅니다.

2. 하시마와 인접한 나가사키, 그리고 그 일대인 큐슈 지역에 수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 탄광노동을 했습니다. 홋카이도 지역도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끌려갔죠. 특히 1930년대 후반 이후 전시체제기가 되면서 채탄량이 급증한 데에는 큐슈지역 조선인 노동자들의 역할이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무도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하시마에 있던 조선인들은 석탄을 캐다가 사고사로 죽기도 하고, 섬에서 탈출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실종되기도 하였으며, 하시마 내 일본 경찰에 구타당해 죽기도 했습니다. 무도에서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이후,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가사키 지역을 '청소'하는 업무를 배당받기도 했습니다. '탄광노동'뿐만 아니라 '피폭'의 아픔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3. 다카시마에 있던 조선인 위령비는 무도 편집상 마치 하하와 서경덕이 '발견'한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재일조선인 사회에는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당연히 현지 코디의 도움을 받았기때문에 위령비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겠지만요. 무도 제작진이 '발견'한 것 처럼 편집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보셨다시피 조선인 희생자이 구석진 자리에 위치할 수 밖에 없는 슬픈 현실 때문입니다. 다카시마는 하시마와 약 3~4km 떨어진, 가장 근접한 섬입니다. 섬을 탈출하려는 조선인들이 나가사키에 가기 위해 경유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나가사키에서 하시마에 가려면 배를 타고 왕복 2시간이 소요됩니다. 헤엄으로 탈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4. 큐슈 일대의 탄광노동은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닙니다. 이 지역의 탄광노동으로 현재 일본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의 3대재벌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는 바로 큐슈지역의 탄광노동을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입니다. 무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다카시마섬과 하시마 섬을 운영하고 관리했던 것이 바로 미쓰비시 기업입니다. 미쓰비시에 대해 불페너 분들은 물론 잘 알고 계시겠죠. 또 하나, 일본의 전 총리였던 아소 다로의 경우, 이 지역에서 탄광을 운영하던 가문 출신입니다. '아소 탄광'이라는 곳에서 역시 조선인들이 강제로 노역한 사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조선인들의 강제노동은 일본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5. 여러분들이 무도를 보시고,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을 적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인데요.
다카시마에서 보셨던 조선인 위령비 역시 비참하고 안타까운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곳이 있습니다. 바로 '휴우가 묘지'라는 곳입니다. 
이 곳은 탄광에서 일하던 조선인들이 사고로 죽자, 함께 일했던 조선인 동료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인근 묘원에 묻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곳은 본래 사유지여서, 돈이 없던 조선인들은 죽음을 맞은 자신의 동료들을 밤중에 몰래 묻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잊지 않기 위해 자그마한 돌들을 올려놓았습니다. 다카시마의 위령비처럼, 누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마음을 한번 헤아려보십시오. 그들의 이야기가 재일조선인 1세들의 기억에 남아서 2세, 3세들에게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이런 곳이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이 묘원 앞쪽에는 일본인들의 가족묘와 그들이 기르던 개, 고양이의 비석이 번듯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저 길에 굴러다니는 돌덩이 하나로, 어디에 묻혀계신지 겨우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나마도 이 묘원은 사유지이기때문에, 전부 분양되어버리면 이 돌들은 언제라도 걷어내어지고 그 위에 다른 일본인의 가족묘가 들어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국기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분들은 조국을 그리워하며 돌아가셨을 것이지만, 대한민국은 이들을 잊어버렸습니다. 꽂혀있는 태극기는 알수없는 누군가(아마도 민단쪽 재일조선인 분들이겠지요)가 꽂아 놓고 갔겠지요. 가운데 있는 한반도 기는 저희가 이 묘지를 방문했던 2010년에 꽂은 것입니다. 

6. 가슴 아픈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이 곳은 오다야마 묘지라는 곳입니다. 여기는 약 6~70명의 조선인들이 묻혀져있다고 추정됩니다. 이 묘지에 얽힌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을 맞은 조선인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날 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편이 많지 않았습니다. 해방 직후 부산으로 가는 시모노세키 항에는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이 너무나도 많아 일대가 극도로 혼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둘째로는, 돌아갈 여비가 없었던 것입니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그냥 나룻배로 조선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 기상 예보나 있었겠습니까. 부푼 꿈을 안고 떠났던 작은 나룻배는 이내 태풍을 만나 뒤집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 죽음을 당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시체는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일본 땅으로 파도에 밀려왔습니다. 

7. 이들을 위해 한국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과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 그리고 조사기구가 있었지만, 그나마도 피해자의 유가족이 존재하는 경우나 기록에 남아있는 경우만 일정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쓴 글에서 등장하는 휴우가묘지, 오다야마묘지에 묻힌 조선인들은 보상은 커녕 정부차원의 추모비조차 건립된 일이 없습니다. 이를 기억하는 것은 재일조선인들, 그리고 소위 '양심적'인 일본인들입니다. 대한민국 국가도, 국민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8. 무도가 이러한 사실들을 다루어주면서 조선인 강제연행에 대한 관심도 생기고, 우토로 문제 같은 재일조선인 문제도 한번 환기가 되어지는 계기를 맞겠지요. 다만, 이러한 일회적인 관심도 참 감사한 일이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현실적인 문제임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국회에 계류되어있는 법안들 가운데는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관련 법안과 기타 등등 여러 과거사 법안들이 있습니다.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만, 과거사 관련 법안은 진상규명과 보상, 추모, 위로를 위해 국가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번번이 통과되지 못하고, 법안 자체가 상정되지도 못하는 경우가 7~80%입니다.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꼭 투표를 잘 해 주시길 바랍니다.

9. 두서없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도 몇 번 글을 남긴적이 있었는데, 탈퇴후 재가입을 하는 바람에 다 날아가고 없어졌네요. 끝으로 제 여자친구가 제 아이디를 무척 알고 싶어하는데, 이 글이 들키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덧, 혹시 궁금하신 분이 있으시다면, 2부에 큐슈지역 일대에서 꼭 들러야할 조선인 강제연행 유적들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2&mbsIdx=3252295&cpage=&mbsW=&select=&opt=&key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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