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아닙니다, 1791년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때죠. 유럽 대부분에서 공개처형이 당연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프랑스는 2년 후에 그 이름도 공포스러운 공포정치가 시작되어 단두대 서컹서컹하게 되는 그 시절에, 벌써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그것도 국회의원이 있었던 겁니다!
원문은 당연히 프랑스어고, 영어 번역되어 있는 것을 제가 번역한 것입니다. '1.', '2.' 식으로 번호 붙이고 적은 제목은 제가 그 아래 부분의 요점을 요약한 것이고, 각 문단 아래에 '*' 표시 하고 적은 각주는 제가 덧붙인 설명입니다. 각주 중 긴 것들은 배경이 되는 정치철학 이론이나 역사를 설명한 것이라서, 안 읽어도 대충 이해는 될지도요. 굵은 글씨는 제가 보기에 핵심적이거나 멋있는 부분을 강조한 거고요. 좀 부드럽게 읽히게 하려고 의미 적당히 통한다 싶으면 막 바꾸면서 의역 많이 했는데, 오역이나 어색한 번역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1791년 6월 22일에 한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그 때 프랑스 국회는 제헌국민의회(Assemblée nationale constituante)라고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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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민들이 아르고스*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이 아테네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신전으로 달려가, 신들에게 그런 잔인하고 끔찍한 생각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신들이 아니라 입법자(의회 의원)들에게 부탁하러 왔습니다 — 신이 인간에게 명령한 영원법의 기관이자 해석자*인 사람들에게 — 프랑스의 법규에서 사법적 살인을 명령하는 피의 법을 없애달라고, 입법자 자신들의 양심과 새로운 헌법이 거부하는 그 피의 법을 없애달라고 말입니다. 저는 여기 의원들께 증명하고 싶습니다: 첫째- 사형은 근본적으로 부당합니다, 둘째- 그것은 가장 억압적인 처벌이 아니며 범죄를 막기보다는 늘립니다.
*아르고스 : 고대 그리스 남동부의 도시
*영원법의 기관이자 해석자인 입법자 : 로크 등의 자연법 이론에서 신은 세상을 마음대로 변덕스럽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자신의 이성에 따라 다스린다. 세계를 지배하는 신의 섭리를 표현하는 영원불변의 규칙을 영원법이라고 한다. 자연법은 영원법 중 신이 인간에게 명령한 것으로, 인간의 본성에 반영되어 있고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자연법은 국가의 시민법(실정법)의 상위법이다. 자연법은 추상적이기에 시민법이 그것을 보완하고 구체적으로 재천명한다. 실정법은 자연법에 위배되어서는 안 되는 자연법의 주석이다. 따라서 실정법은 자연법의 해석이고, 실정법을 만드는 입법자는 자연법과 그것을 포함하는 영원법의 해석자이자 그것을 시민 사회에서 실현하는 기관이다.
1. 이미 붙잡힌 범죄자는 위험하지 않다.
시민 사회 밖에서, 무서운 적이 저를 죽이려고 하거나, 스무 번 쫓아내도 다시 돌아와 제 손으로 경작한 밭을 황폐하게 만드려고 든다면; 그에게 맞설 것은 저 개인의 힘 뿐이기에, 저는 죽거나 그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기보존의 자연법*은 저를 정당화하고 승인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모두의 힘이 국가의 공권력으로 뭉쳐서* 그 범죄자 단 한 명에게 맞서는데, 정의의 원칙이 그 모두의 힘에게 그 범죄자를 죽일 권한을 주겠습니까? 그렇게 죽여도 된다고 할 수 있는 필연적인 근거가 있습니까? 자신에게 이미 사로잡힌 적들을 죽이는 승리자는 야만인이라고 불립니다! 자신이 무장해제시키고 처벌할 수 있는 아이를 죽이는 어른은 괴물로 보입니다! 사회에 의해 유죄선고받은 피고는 패배하고 힘을 잃은 적일 뿐입니다. 그에 앞서, 그 피고는 어른 앞의 아이보다 더 약합니다.
*자연법 : 자연법 이론에서 자연법은 자연권의 원천이다. 자연권이란 자연법이 규정했으므로 신 외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이다. 로크는 자연권으로 생명권(생명 보존권), 자유권, 소유권(사유재산권)을 꼽았다.
*모두의 힘이 국가의 공권력으로 뭉치다 : 홉스, 로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정치공동체(국가)가 생기기 전을 자연상태라고 부른다. 이 상태에서는 개인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 줄 상위의 권력이 없다. 따라서 각 개인은 자신의 안전이나 권리 보호을 위해 오직 자신의 힘과 지혜에만 의존해야 하고, 자기 안전과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해도 정당하다. 자신의 안전이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없기에 불안해진 개인들은 계약을 맺어 국가를 형성한다. 모두가 그 국가에 복종하고 자기 권리를 지킨답시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그 대가로 국가가 모두를 규제하는 법을 통해 개인 간 분쟁을 중재하고,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국민들을 보호해준다. 그래서 국가를 모두의 힘을 모은 것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2. 사형제는 폭군이나 압제자가 민중을 억압하는 도구였다.
따라서 진실과 정의의 눈으로 보면, 국가가 격식을 갖추어 죽음을 명령하는 그런 광경은 비겁한 암살일 뿐이고, 개인들이 아니라 국가 전체에 의해 합법적 형식을 사용해 저질러지는 엄숙한 범죄일 뿐입니다. 아무리 잔인하고, 아무리 터무니없는 법이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몇몇 폭군들의 작품이고, 폭군들이 인류를 짓누르는 사슬이고, 폭군이 인류를 복종시키는 무기이고, 피로 쓰여진 것입니다. 로마 시민을 죽게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이것이 민중이 통과시킨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스킬라*는 승리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대항해 무기를 든 모든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 옥타비아누스*와 그 공범들은 이런 법을 만들었습니다.
*스킬라 : 그리스 신화 속 머리가 6개인 바다의 여자 괴물
*옥타비아누스 :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브루투스*를 칭찬하는 것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리굴라*는 황제의 그림 앞에서 옷을 벗지 않는 '무엄한' 사람들에게 죽음을 선고했습니다. 옛날에 폭군정이 불경죄 — 폭군의 부당한 권력에 개의치 않거나 그에 저항하는 영웅적인 행동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 를 고안했을 때, 자신이 불경죄의 죄인이 되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 그런 행동에 대해 죽음보다 부드러운 처벌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티베리우스: 고대 로마 제국의 2대 황제. 말년에 폭군적인 은둔생활을 하면서 로마의 중요 인물들에게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브루투스 : 카이사르를 암살한 공모자들의 지도자. 고대 로마 공화정을 지키려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해 자살했고 고대 로마는 곧 제정이 되었다.
*칼리굴라 : 고대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사치와 낭비로 재정을 파탄시키고 잔혹한 독재정치를 벌여 암살당했다. 대표적인 폭군으로 꼽힌다.
무지와 압제의 결합에서 태어난 광신이 결국 신성모독죄를 고안했을 때, 그 광신이 광란에 차서 오히려 자신들의 손으로 신을 모욕하게 되는 기획을 생각해냈을 때, 신에게 피를 제공하고 신을 그들이 상상한 괴물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필요치 않았을까요?
(*아마 중세 시대에 마녀재판 등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이교도로 낙인찍어 학살하던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3. 사형은 범죄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시민들의 도덕성을 해치고 범죄를 늘린다.
사형제는 필요하다고, 고대의 야만스러운 관례의 지지자들은 말합니다. 사형이 없으면 범죄를 막을 만큼 충분히 강한 제동장치가 없다고 말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했습니까? 여러분은 형법이 인간의 감정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전부 계산하셨습니까? 아, 죽기 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견딜 수 있을까요?
생존 욕구는 자존심에 앞서고,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감정 중 가장 긴급한 것입니다. 사회적 인간에게 내리는 벌 중 가장 끔찍한 것은 불명예이고, 그것은 전체 공동체의 저주라는 압도적인 시선입니다. 입법자는 매우 많은 장소에서 매우 많은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른 시민을 공격할 수 있는데, 왜 사형제의 도입으로 스스로를 격하시킵니까? 처벌은 죄책감의 고통을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라, 처벌이 초래하는 공포로 범죄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더 부드러운 처벌보다 죽음과 잔인한 처벌을 더 좋아하는 입법자는 공공의 감정을 짓밟고, 자신이 다스리는 사람들의 도덕적 감정을 약화시킵니다; 잔인한 체벌을 자주 사용해 학생들의 영혼을 마비시키고 손상시키는 서투른 교사처럼 말입니다; 그런 입법자는 정부의 태엽을 너무 강하게 감으려 들어서 그것을 닳게 만들고 약화시킵니다.
사형을 도입하는 입법자는, 범죄를 억제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범죄가 낳는 다양한 감정들의 성격에 맞게 처벌하는 것이라는, 입법자들 스스로도 말하는 그 유익한 원칙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관념을 혼란시키고, 모든 관계에 문제를 일으키고, 드러내 놓고 형법의 목표를 부정합니다.
사형제는 필요하다고,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럼 왜 몇몇 국민들은 사형제 없이 살아왔습니까? 이런 국민이 가장 현명하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자유로운 것은 뭔가 다른 운명 때문일까요? 사형이 큰 범죄를 막는 데에 가장 적절하다면, 그럼 사형제를 채택하고 사용하는 국민들에게 큰 범죄가 가장 드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확히 반대입니다. 일본이 그 증거입니다: 사형과 고문이 이곳보다 더 널리 사용되는 곳도 없고, 범죄가 이곳보다 더 빈번하고 극악무도한 곳도 없습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격노시키고 자극하는 야만스러운 법 때문에 흉포하게 다투고 싶어 한다고 말하는 것이 거의 옳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공화국들은 처벌이 부드럽고 사형이 대단히 드물었거나 전혀 없었는데, 피의 법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들보다 범죄가 더 많고 미덕이 더 적었습니까? 여러분은 고대 로마가 포르시안 법*이 왕들과 10대관*들이 만든 몇 개의 법들을 없앤 그 영광의 시대에, 그것들을 되살린 스킬라의 치하와 악명 높은 폭정에 걸맞게 가혹했던 황제들의 치하에서보다 더 많은 범죄로 더럽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러시아는 그곳을 지배하는 폭군이 이 인간애와 철학의 법으로 그 폭군이 수백만의 사람들을 절대 권력의 멍에에 메어 놓은 범죄를 속죄하고 싶어했기라도 한 것처럼 사형을 완전히 금한 이후로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까?
*포르시안 법 : 고대 로마 공화국의 법으로 기원전 199년이나 195년에 P. Porcius Laeca의 이름을 따 만들어졌고 대(大) 카토가 인준했다. 정당한 재판에 의해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매질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범죄 혐의를 받는 로마 시민들을 법적으로 보호했다.
*10대관 : 10인위원회decemviri에 속한 위원. 10인 위원회는 이후 로마의 모든 법의 원천으로 여겨진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을 제정한 임시입법위원회다. 기원전 499년 고대 로마 평민들이 기존의 법이 사제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전승되고 행정관들이 멋대로 적용한다며 불만을 품어, 공개된 성문법을 제정하라고 철수 투쟁—평민들이 귀족의 지배를 벗어나 무리지어 도시를 떠나는 것. 평민들이 수적으로 우세하고 대부분의 생산을 담당했기에 철수 투쟁이 벌어지면 도시의 일체 산업이 마비되었다.—을 벌였다. 평민의 요구를 받아들여 집정관 대신에 BC 451년과 BC 450년 두 차례에 걸쳐 뽑힌 10인위원회가 구성되어 12표법을 만들었다. 12표법으로 평민들은 재판에서 부정과 자의적인 판결에 대해 어느 정도 보호받게 되었다. 그러나 평민들이 요구한 토지의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고 채무노예제도 유지되는 등 현상유지적이었다.
4. 오심 가능성은 항상 있는데 사형이 이루어지고 나면 되돌릴 수 없다. 범죄자가 회개할 기회를 없앤다.
정의와 이성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에게, 인간의 사회가 다른 인간의 죽음을 잘못 다룰 수 있어도 괜찮다고 할 만큼 인간의 심판은 절대 확실하지 않다고 외칩니다. 가장 완벽한 사법 명령, 가장 올바른 판결이라도, 잘못 판단할 여지는 약간이라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왜 그것들을 바로잡을 수단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않으십니까? 왜 억압당하는 결백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빌려줄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선고하십니까? 무익한 후회와 환상에 불과한 배상이 헛된 그림자와 의식 없는 유골 가루에 뭐가 중요합니까? 그것들은 여러분의 형법의 야만적인 무모함의 슬픈 증거입니다. 범죄자가 회개나 덕의 행동으로 자기 범죄를 속죄할 가능성을 없애십시오; 그가 덕과 자부심으로 돌아올 모든 길을 무자비하게 차단하십시오, 그의 내리막길을 재촉하십시오, 말하자면 그의 범죄의 최근의 얼룩이 무덤 속에서도 여전히 덮여 있게 하십시오, 제 눈에는, 그것이 잔인함을 가장 끔찍하게 정제시킨 것입니다.
5. 잔인한 법보다 온건한 법이 시민들을 더 도덕적이고 자유롭게 만든다.
입법자의 첫 번째 의무는 공공의 도덕률, 모든 자유의 원천, 모든 사회적 행복의 원천을 형성하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런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목표를 외면하고 다른 특수한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 그는 가장 저속하고 끔찍한 오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은 민중에게 정의와 이성의 가장 순수한 모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강력하고 침착하고 적정한 엄격함이 있어야 할 장소에 분노와 복수를 놓는다면; 피할 수 있고 뿌릴 권리가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다면; 민중 앞에 잔인한 광경과 고문으로 다친 시체들을 펼친다면, 그럼 그것은 시민들의 마음 속에서 정의와 불의에 대한 관념을 변질시킬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려 드는 흉포한 편견의 씨앗을 사회 속에 심을 것입니다. 사람은 더 이상 사람에게 그렇게 신성한 목적이 아닐 것입니다; 정부 당국이 한 사람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할 때 우리는 그의 존엄성에 대한 위대한 생각을 덜 가지게 될 것입니다. 법 스스로가 살인을 저지른다면 살인이라는 관념은 두려움을 덜 일으킬 것입니다. 범죄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그것이 또 다른 범죄로 처벌받는다면 약해질 것입니다. 처벌의 효과성을 과도한 엄격함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하나는 다른 하나에 완전히 반대됩니다. 모든 것이 온건한 법을 지지합니다; 모든 것이 잔인한 법에 맞서 협력합니다.
자유로운 국가들에서는 범죄가 더 드물고 법이 더 부드럽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생각들이 한데 모입니다. 자유로운 국가들은 인간의 권리가 존중되고 그 결과 법이 정의로운 곳입니다. 과도한 엄격함이 인간애를 해치는 곳에서, 지나치게 엄격한 법은 인간의 존엄성이 그곳에 알려져 있지 않고 시민의 존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입법자가 노예들에게 명령하고 노예들을 자기 변덕에 따라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주인일 뿐이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저는 사형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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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인간애가 넘쳐나는 연설이죠? 아, 물론 사형제를 존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인간애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형 존치론자들도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기에 다른 인간을 해쳐 인간 존엄성을 모독하는 범죄자들에 대해 완강한 것이지요. 사형 폐지론자들도 인간애 때문에 가장 사악한 인간조차도 인간이기에 존중하자고 말하는 것이고요. 사형제 존폐 논쟁에서 서로가 인간애를 지니고 있다는 걸 명심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 논쟁을 벌였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이 글은 사형제가 존치돼야 하는지 폐지돼야 하는지 말하려고 쓴 글은 아닙니다. 다시 프랑스 혁명기로 돌아가죠.
아직 프랑스 대혁명이 과격화되기 전, 입헌군주정으로 평화롭게 마무리될 것 같았던 시절이고, 민중이 왕을 끌어내린다든가 공포정치가 벌어진다든가 하는 건 누구도 예상 못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사형, 그것도 공개처형이 당연하던 때였죠. 이 의원이 열심히 연설했지만 제헌국민의회는 법을 만들며 사형제를 도입했습니다. 사형 도구로는 그 유명한 단두대(guillotine, 기요틴, 길로틴)가 채택되었죠.
프랑스 대혁명은 급류를 타고...저 연설을 한 뒤 1년 하고도 두 달 쯤 지나, 1792년 8월 10일, 파리 상퀼로트*들이 국왕이 사는 튈르리 궁전을 습격해 왕실 가족을 탕플 탑이라는 감옥에 가두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걸로 왕은 모든 권력을 잃고 사실상 왕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가 구성되어 1792년 9월 21일에는 프랑스에는 더 이상 왕이 없다고, 왕정 폐지를 공식 선언하고, 22일에는 공화정을 선언했습니다.
*상퀼로트(Sans-culotte) : 귀족이 입는 우아한 반바지인 퀼로트를 입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 주로 수공업자, 장인, 소상인, 근로자 등 도시 하층민들. 소규모 공방을 소유한 중산층에 가까운 사람들부터 그런 공방에서 하루하루 노동해서 먹고 사는 빈곤층까지, 현대에 생각하는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보다 넓은 개념이었다. 이들이 무장 투쟁을 벌이며 혁명 정부를 압박하고 이들과 결속한 혁명가 세력인 자코뱅파가 점차 주도권을 잡게 되며 프랑스 대혁명이 과격화, 급진화되었다.
그리고 또 두 달 쯤 지나, 이제 왕이 아니게 된 루이 16세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국민공회에서 논의되기 시작했습니다. 급진 좌파인 자코뱅파(산악파)는 무려 왕을 재판도 없이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온건 우파인 지롱드파는 왕의 처형에 반대했고요. 중도파인 평원파는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상퀼로트의 힘을 등에 업은 자코뱅파가 점점 힘을 얻고 있었고, 한 사람을 재판도 않고 처형해라는 무서운 이야기가 의회 안에서 높이 울려퍼졌습니다. 후에 루이 16세는 재판을 하긴 했는데, 권력분립 씹어먹고 사법부가 아니라 입법부(의회)의 의원들이 투표해서 다수결로 사형을 결정했고 1793년 1월 21일에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 무서운 시기에, 그 어떤 범죄자도 처형해서는 안 된다며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의원은 국민공회에서도 재선되어 의원이었고 1792년 12월 3일에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마지막 왕이라는 이 비루한 개인이 민중에게 왜 중요합니까? 의원 여러분, 민중에게 중요한 것, 여러분 자신에게 중요한 것, 그것은 민중의 신뢰가 여러분에게 부과한 임무를 여러분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었습니까? (중략) 나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마지못해 선언하지만,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네, 사형제 폐지하라던 그 의원이, 왕을 재판 없이 처형해야 한다는 무서운 주장을 가장 선봉에 서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동명이인 아닙니다. 그 사람 맞습니다. 단두대 서컹서컹 '공포정치(la Terreur)'의 기수이자 이론가인 그 사람입니다.
보통 로베스피에르 이미지로 많이 등장하는 건
이것인데, 너무 많이 보니 지겨워서 다른 걸로... Louis Léopold Boilly의 그림입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 본인도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나죠. 잘린 후 본을 떠서 만든 데스 마스크(death mask)입니다. 투소 박물관(Tussaud Gallery)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출처 :
데스 마스크와 라이프 마스크 모은 어느 웹페이지) 처음에는 큰 사진 넣었는데 데스 마스크가 크니까 좀 무서워서 작은 사진으로 바꿨어요. 큰 사진은
여기에.
그토록 인간애가 넘치는 연설로 그 어떤 범죄자라도 처형해서는 안 된다며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1년 두 달 후에는 국왕의 재판 없는 처형을 주장하고, 그로부터 또 여덟 달 지나 93년 9월 5일부터는 그 이름도 무서운 공포정치를 수행했던 겁니다. 공포정치 중에 약 30만 명이 용의자로 체포되었고, 17000명이 공식 처형당했고, 감옥에서 죽은 사람이나 내전 지역에서 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도 많아서 전체 희생자는 4만 명 정도 될 것으로 추측됩니다.
.....놀랍지 않나요? 전 놀랐는데ㅋ 알고 계셨으면 말고요ㅋㅋ 설마 몰랐는데 짐작하셨어요? 전 로베스피에르가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 못했는데...
연설 자체는 멋지고 제법 논리적인 것 같은데, 현대의 사형폐지론자들이 인용해도 될 법한데 연설자가 문제네요. "이런 말도 있어. 법 스스로가 살인을 저지른다면 살인이라는 관념은 두려움을 덜 일으킬 것입니다. 범죄에 대해 느끼는 공포는 그것이 또 다른 범죄로 처벌받는다면 약해질 것입니다." "올ㅋ 누가 한 말임?" "로베스피에르." ...설득력이 확 사라지죠? ㅋㅋㅋㅋ
글쎄요, 어쩌다가 사람이 그렇게 정반대로 바뀌었을까요?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1) 사형제 폐지 연설이 진심이 아니었다 : 진심이 아니었는데 다른 이익을 노리고 그런 연설을 했다? 그런데 저런 주장을 해서 얻을 이익이 딱히 없었습니다. 사형은 물론 공개처형도 당연하던 시절이었는데요. 자코뱅파 지도자들 중 한 명이었던 로베스피에르의 지지 기반은 파리 상퀼로트들이었는데, 그들은 과격하게 기득권층을 쓸어내고 싶어했죠. 상퀼로트들은 혁명의 주도권을 잡기 전에도 봉기나 소요를 자주 일으켰습니다.
2) 그 연설은 진심이었는데 권력 잡고 나니까 사형제가 좋아졌다 : '민중 앞에서 그런 잔인한 광경을 펼치면 안 됩니다! ...어? 막상 피 뿌려보니까 괜찮네? 크큭...피 냄새...흑화한다...' 뭐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가 지나치게 막 가는 걸 염려했습니다. 에베르파와 그들을 지지하던 과격 상퀼로트들은 경제통제와 공포정치를 더 과격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거부하고 에베르파를 숙청했습니다. 그건 에베르파가 민중봉기 계획을 들켜서였고, 공포정치를 아예 멈추자는 당통파도 숙청했지만요. 지방의 반혁명 봉기를 진압하러 가서 지나치게 학살을 저지른 순찰의원(파견의원)들을 비판하기도 했고, 지롱드파나 에베르파나 당통파 등 적대 세력을 숙청할 때 지도자급만 처형하고 덜 중요한 사람들은 살려두려고 했어요. 그렇게 남은 적대 정파 잔존 세력이 죄다 뭉쳐서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켜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고, 나름 혁명을 위해 그런 건데 비판받아서 빡친 순찰의원들도 테르미도르 반동에 합세했죠. 속으로는 피가 좋았는데 어떤 이익을 위해 절제했다고 보기에는, 결과가 자기에게 안 좋았어요. 피가 좋았는데 절제하는 게 이익이 될 거라 오판했을 수도 있는데, 그런 거라면 피가 좋아도 이성으로 어느 정도는 절제할 수 있었단 거겠죠. 절제했으니까 정당한 숙청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싹 다 숙청하는 것보단 덜 나쁘단 겁니다. 나쁜 건 맞죠...
그런데 94년 6월 10일에 프레리알 22일 법이라고, 재판에서 변호와 증인 심문을 없애 배심원 심증만으로 유죄가 될 수 있게 하는 말도 안 되는 법을 도입해서(만든 건 최측근인 조르주 쿠통이지만 입법되도록 적극 지지했음), 파리에서 사형선고 받은 사람이 1793년 3월 1일부터 1794년 6월 10일까지 1,251명인데 이 법 만든 1794년 6월 10일부터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는 1794년 7월 27일까지 47일동안은 1,376명이나 되었대요.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재판소 판사나 검사는 아니었고, 프레리알 22일 법을 남용한 사람들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법을 애초에 도입하게 만든 게 누구인데... 그 47일 간은 절제를 잃었거나 별로 못한 것 같습니다.
3) 그 연설은 당연히 진심이었고 후에 공포정치는 마지못해 고통스럽게 받아들인 것이다 : 공포정치 때 상황이 급박하긴 했습니다. 프랑스 밖에서는 저 혁명이 우리나라에 번지는 걸 막겠다며 거의 전 유럽이 뭉쳤고(제1차 대불동맹), 프랑스 안에서는 리옹, 낭트 등 지방 곳곳에서, 특히 방데에서 거세게 반혁명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까딱하다가는 혁명이나 공화국이 문제가 아니라 프랑스 자체가 사라질 판이었죠. 그래서 당대 사람들이 공포정치를 1년 채 안 되는 기간이나마 '참아준' 거고요.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는 정치 하기 전 아라스(Arras)라는 지방에서 변호사 일을 하다가 지방 판사가 됐는데, 사형선고를 해야 한다는 데에 절망해서 판사 직은 그만두고 변호사만 했습니다. 공포정치를 주도하면서 속으로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사형은 어느 때고 절대로 안 되는 거다'라고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공포정치를 정당화하는 연설이나 보고서의 어조가 매우 단호하거든요. "범죄는 원하는 바를 얻으려 결백을 도살하고, 결백은 범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운다.", "폭군의 잔인함은 그저 잔인함일 뿐이지만 공화국의 잔인함은 미덕입니다.", "인류의 적을 처벌하는 것은 관용이고, 그것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잔인함입니다."
4) 그 연설이 진심이기는 했으나 일반적인 시기에 그렇다는 거고, 위기 시에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그 때부터 쭉 생각했다 : 어느 날 로베스피에르보다 과격했고 기득권층을 싹 쓸어버려야 한다고 늘 주장해 왔던, 자코뱅파의 또 다른 지도자 장 폴 마라(Jean-Paul Marat)가 로베스피에르를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마라는 혁명 정부가 '혁명의 적'에 대해 너무 무르다고 했고, 로베스피에르는 마라의 의견이 너무 과격해서 혁명이 증오받게 만든다며 "처형대는 끔찍한 수단이고, 언제나 통탄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중하게 그리고 조국을 파괴할 수 있는 심각한 경우에만 사용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라가 "우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해 유감스럽습니다. 당신은 공회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걸 보면 국민공회가 수립된 92년 9월 20일 이후의 일이겠죠. 루이 16세를 재판 없이 처형하라는 연설보다 석 달 이하 앞서거나 그 뒤겠군요. 회고록(
영어 번역문)에 이 일화를 쓴 로베스피에르의 여동생 샤를로트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거나 convention이 국민공회가 아니라 그냥 의회나 다른 회의일 수도 있겠지만요^^;; 샤를로트가 자기 오빠 감싸려고 쓴 회고록이라 저 일화 자체가 지어낸 것일 수도 있긴 한데, 92년 1월 중순에 마라가 찾아와서 폭력적인 방법을 제안했을 때도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한동안 말을 잃더라고 마라가 자기 공책에 적었어요. 대담하지 못하다면서 까는 내용이니까 그 일화는 아마 사실이겠죠.
사형제는 원칙적으로 안 되는 거지만 위기 시에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루이 16세의 처형과 공포정치는 조국이 무너질 수 있는 위기 상황에 있다고 판단해서(그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는 제쳐두고 그냥 로베스피에르는 그렇게 판단했다는 거죠) 시행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제일 그럴싸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범죄는 원하는 바를 얻으려 결백을 도살하고, 결백은 범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운다." 반혁명이 혁명을 도살하려 하니 혁명은 반혁명에 맞서 뭐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었겠죠.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하기는 힘드니 그 생각이 옳다고는 못하겠지만요.
어느 게 맞든 간에,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던 사람이 대규모의 처형을 주도했으니 참 지독한 아이러니입니다...
※단두대에 대해
단두대(기요틴)는 공포정치와 연관되는 바람에 끔찍하게 여겨지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자비로운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그 전의 사형 방법은 참수형 아니면 교수형이었죠. 교수형이 지금은 잘 계산해서 떨어져 매달리자마자 의식을 잃게 만들지만, 그 때는 그런 요령이 없어서 한참 몸부림치며 고통스럽게 죽었어요 ㄷㄷ 도끼로 목을 내리치는 참수형은 그나마 고통이 적었는데, 그것 역시 한 번에 죽으면 운 좋은 거고 대부분은 사형집행인이 실수하거나 도끼날이 무디거나 해서 몇 번 내리쳐야 했습니다. 그래도 참수형이 고통이 적어서 귀족들만의 특권이었고, 평민들은 교수형을 당했죠.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 기간의 폭동에서 성난 평민 하층민들이 너희도 똑같이 죽어보라며 성직자나 귀족들을 매달곤 했습니다. 그 때문에 <라 마르세예즈>와 함께 대표적 혁명가였던 <싸 이라(Ça Ira, It'll be fine, 잘 될 거야)>의 후기 상퀼로트 버전에 '귀족들을 가로등에 매달자'라는 가사가 나오죠.
그런 맥락에서 프랑스 대혁명 때는 혁명의 평등 정신에 맞게, 그리고 인도적으로 처형하기 위해 사형도구로 단두대가 도입된 겁니다. 단두대를 도입하자고 주장한 조제프 기요탱은 사형제 폐지론자였고, 사형이 존속될 거라면 그래도 모두에게 공평하고 고통이 덜한 단두대를 써야 한다고 한 겁니다. '단두대를 발명한 기요탱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라는 이야기가 떠도는데, 단두대 비슷한 건 그 전부터 있었고 조제프 기요탱은 프랑스에 공식도입하자고 주장한 거고, 또 그는 76살에 자연사했습니다. (출처는
동아일보)
그런 아름다운 이유 말고도...사형집행인이 힘을 덜 들이고 사형을 집행할 수 있어서 신속한 처형이 가능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이게 제일 큰 이유일 수도 있어요. 혁명 때 '반혁명 분자'들도 많이 처형됐고 특히 공포정치 시기에는 혁명가들끼리도 정파 싸움 하다가 많이들 처형되어서......
그러니까 혹시나 프랑스 대혁명 시기로 시간여행 갔다가 사형당하게 되었는데 사형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절대 교수형을 선택해선 안 됩니다! 그게 제일 고통스러운 거예요. 사형 방법 선택권 따위는 없었으니 쓸데없는 지식이지만요 ㅋㅋㅋ
※루이 16세 처형에 대해
반전 효과를 위해 루이 16세 처형이 엄청 끔찍한 것처럼 위에는 썼고, 사실 한 사람을 재판 없이 처형하자는 이야기가 끔찍한 것은 맞는데, 루이 16세의 처형이 그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루이 16세가 유죄라는 것은 707대 0으로, 반대 한 명 없이 통과됐습니다. 왕의 죄를 판단한다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생각해서 기권한 사람들 외에는, 모두들 유죄에는 동의한 거죠. 사형 투표의 1차 투표 결과는 387 대 334로, 사전 흥정을 수반한 수정 표결의 결과는 표차가 더 줄어 361 대 360으로 사형이 결정됐습니다.
루이 16세는 혁명을 절대 바라지 않았고 마지못해 인정해왔습니다. 전대 군주들에 비해서는 검소하고 성격도 온화했으나 그래도 전제군주였던 거죠. 혁명 전에 삼부회(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평민의 대표들이 모이는 회의)의 제3신분 대표들이 특권층의 반대를 뿌리치고 개혁을 관철시키기 위해 따로 국민의회(후에 제헌국민의회로 이름 바꿈)를 결성하자, 그들을 해산시키려고 무장한 근위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국민의회에 합류해 있던 몇몇 귀족 대표들이 막아서자 곧 돌렸지만요. 그 후 파리로 군대를 불러모았습니다. 여차하면 국민의회와 파리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할 수도 있다고 적어도 당시 파리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게다가 안 그래도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는데 파리에 군사들이 모이니까 파리의 식량이 극히 부족해졌습니다. 자기들을 위협하는 군대를 먹여야 했던 파리 시민들은 매우 빡쳤겠죠? 더군다나 균등한 과세를 주장하고 삼부회 개최를 인정해서 하층민들에게 인기 있던 재무총감 네케르가 해임되자 극히 불안해지고 분노해서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무기와 화약도 확보할 겸 구체제의 상징이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으니, 그 때가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결국 루이 16세도 국민의회와 바스티유 습격을 인정한다고 선언했고 바스티유를 정복한 시민들은 기쁨에 겨워 "국왕 만세!"를 외쳤어요. 8월 4일에는 국민의회에 전원 합류한 귀족 대표들이 봉건적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요. 그렇게 평화롭게 잘 풀릴 것 같았더랍니다...
하지만 루이 16세는 '왕이 곧 국가'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혁명을 방해하려는 움직임을 여러 번 보였습니다. 혁명 초기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던 미라보를 매수했고, 의회가 결정한 법령들에 연이어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혁명이 진전되야 한다는 게 절대적으로 옳은 건 아니니 그런 방해가 꼭 악한 것이라고는 못하지만, 혁명을 진전시키려는 입장에서는 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결정적으로 루이 16세는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해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빌려 프랑스로 침략해 와 왕권을 되찾으려고 했습니다. 바렌느(Varennes)라는 마을에서 들켜 파리로 끌려왔기에 바렌느 탈주 사건이라고 부르죠. 후에 비밀 철제금고를 들켰는데 그 속에서 왕실 복원을 위한 구체적 계획들이 담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으로부터의 편지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혁명의 진전을 지지하는 관점에서 보지 않고 그저 국가 유지라는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명백히 '외환죄'입니다. 외환죄란 외국과 통모하여 국가의 대외적인 존립을 위협하는 행위를 말하죠. 현재 우리나라 형법에서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란죄와 함께,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등 어떠한 특권도 다 씹어버리는 건 물론, 공소시효 자체가 적용되지 않고, 미수로도 처벌받는 가장 중한 범죄 중 하나예요. 바렌느 탈주 사건 때 이제까지 혁명 조치들을 인정했던 건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다 무효라고 쓴 편지를 남기고 가서, 자신의 '반혁명 의도'를 명백하게 선언하기까지 했어요. 잡힐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나, 왜 그리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까요?
아무튼 그래서 루이 16세를 악인으로 봐야 할까요? 그는 왕실에서 태어나 '왕이 국가'라는 교육을 받았고 '국민이 국가'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이 국가'라는 견지에서 봤을 때 혁명은 왕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아 가는 것이었고, 왕이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정말 자국민을 학살하더라도 그건 반역자를 처단하는 자기 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국민이 국가'라는 견지에서는 그런 왕의 자기 방어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었고 용납할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루이 16세의 행동은 자신에게 당연했으나 시대가 그걸 용납치 않았기에 벌을 받은 거죠. 자기에겐 당연한 행동 때문에 처형당했으니 루이 16세라는 한 인간을 생각하면 불쌍하네요... 그래도 왕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혁명 세력 내부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고, 왕을 처형했다가는 유럽의 다른 군주국들을 자극할까 염려도 되었으니(실제로 루이 16세 처형을 계기로 제1차 대불동맹이 결성됨) 논란이 되었던 거지, 다른 누가 같은 일을 했다면 거의 이의 없이 사형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루이 16세가 유죄 판결 받고 뭔가 처벌을 받는 건 피할 수 없었어요. 사형까지는 하지 말고 그가 국민이 국가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정상참작을 할 수는 없었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요.
로베스피에르가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라고 했던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국민이 국가'가 된 공화국과 '왕이 국가'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루이 16세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저 연설 전체의 요지도 8월 10일 튈르리 궁 습격으로 국민은 왕을 없앤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의회는 그것을 그대로 실행할 수만 있을 뿐, 재판을 하면서 죽일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왕을 없애는 것과 왕 자리에 있던 개인을 죽이는 것이 동의어같지 않아서 납득 안 가지만요.
그나저나 1791년 6월 20일에서 21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왕실 가족이 궁을 빠져나갔고 21일 오전 6시에 탈주가 알려졌으니, 로베스피에르가 사형제 폐지 연설을 한 22일은 국왕이 혁명과 국민을 배신했다는 걸 알고 있을 때였는데, 그 때까지도 자신이 나중에 국왕 처형을 주장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입니다. 그 전까지는 뭐 문제 생기면 죄다 (적국이던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주는 것 없이 괜히 밉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탓으로 돌리던 파리 하층민들이, 바렌느 탈주 사건 이후로는 국왕까지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왕 자리 자체를 없애고 공화정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죠. 로베스피에르는 이 와중에도 합법적으로 국왕을 재판하고 폐위시키자고만 요구할 뿐 공화정 얘기는 안 했습니다. 코르들리에 클럽이라는 정치 모임을 중심으로 파리 하층민들이 국왕 폐위하라는 청원 운동 할 때도 안 끼고, 청원운동을 자코뱅 클럽도 같이 하자고 결정했던 것도 의회가 왕권 정지를 결의하자 바로 철회하게 만들었죠. 91년 7월 17일에 그 청원 운동이 코르들리에 클럽 단독 명의로 마르스 광장(샹 드 마르스)에서 열렸는데, 시민들이 먼저 폭도화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군대가 먼저 도발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아무튼 국민방위군(사령관은 라파예트. 혁명이 일어나자 기존 정규군과 별도로 결성된 민병대. 당시엔 일정 이상 재산이 있는 시민만 들어갈 수 있었다.)이 거기 모인 시민들에게 발포해서 수십 명이 죽었고, 급진 혁명 세력과 하층민들은 크게 위축되면서 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렇게 프랑스 대혁명은 급진화, 과격화되었던 것이죠.
다시 루이 16세 처형 얘기로 돌아가, 1791년 12월 6일, 로베스피에르가 처형 연설하고 3일 후, 장 폴 마라가 국왕 재판 투표를 할 때 의원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고 의원은 큰 소리로 견해를 표현해야 한다고 결정하게 만들었습니다. 투표할 때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나는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압제자들에 대해 완고합니다. 나는 민중을 학살하면서 전제군주를 용서하는 인류애를 알지 못합니다. 제헌의회에서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사형제의 폐지를 요구하게 만들었던 그 감정은 오늘 그것을 내 조국의 압제자와 그가 구현하는 왕정 자체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게 하는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 (중략) 나는 사형에 찬성합니다."
자기는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인류를 억압하는 압제자를 처형하라고 주장하는 거란 얘기고, 사형제 폐지 주장할 때나 국왕 처형 주장할 때나 자기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얘기죠. 그래서 위에 로베스피에르가 왜 바뀌었을까 추측하는 부분에서 '4) 그 연설이 진심이기는 했으나 일반적인 시기에 그렇다는 거고, 위기 시에는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그 때부터 쭉 생각했다' 쪽이 맞을 것 같다고 추측한 겁니다.
※공포정치에 대해
제가 위에서 프랑스 자체가 사라질 위기라서 당대 사람들이 공포정치를 1년 채 안 되는 기간이나마 '참아준' 거라고 썼죠.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이하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와 장 마생의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이 분석이 꼭 옳다는 게 아니고(어떤 판단을 내릴 만큼 제가 아직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고) 이런 분석도 있다고 소개하는 겁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엄청난 피를 뿌린 독재자로 보통 인식되는데, 사실 그의 권력은 상당히 취약했습니다. 그는 단지 국민공회에 속한―결코 전능하지는 않지만 가장 강력했던―소위원회에 불과했던 공안위원회의 한 위원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독재 권력이나 심지어 관직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장 영향력이 강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말의 설득력(진짜 논리 있고 내용이 옳아서라고 보든, 교묘한 말빨이라고 보든, 일단 사람들이 많이들 설득당했음)과, '부패할 수 없는 자(L'incorruptible)'라고 불릴 정도로 청렴결백한 데서 오는 도덕적 권위와, 그동안 모든 성인 남성이 투표권을 가지는 보통선거제를 주장하고 상퀼로트 민중운동을 지지해오면서 얻은 민중 사이에서의 인기에서 온 거였죠. 후의 나폴레옹 1세가 가진 것 같은 경찰이나 군대 같은 영속적인 권력 기반이 없었어요. 그래서 공포정치 마지막 한 달 정도, 공안위원회 다른 위원들과도 마찰이 생겼을 때는 힘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공포정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이 인정하거나 적어도 참아주긴 했기 때문입니다. 바깥에선 거의 전 유럽이 프랑스에 맞서 뭉쳤고, 안에선 지방 곳곳에서 반혁명 봉기가 일어났다는 건 이미 말했죠. 국가 재정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고, 경제도 안 좋았는데, 귀족 장교들이 대부분 도망가거나 쫓겨나거나 숙청되면서 제대로 된 군대도 없었어요. 확립된 정규군 없이 전면전에 대응해야 했고, 더 적은 재원을 가지고 더 악화된 위기에 대처해야 했던 거죠. 당시 자코뱅파는 평민 출신 젊은 하사관들을 급격히 승진시켜 맞섰습니다. 그게 오슈, 주르당, 클레베르, 마르소, 그리고 나폴레옹(사실 평민은 아니고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 소지주였다가 귀족 작위를 받았지만 진짜 귀족에 비해 미미한 출신인 건 맞음) 등이죠. 이런 우수한 신흥 장교들과 혁명의 열정이 충만한 병사들이 이후 나폴레옹이 승승장구하는 밑거름이 되었더랍니다...... 아무튼 이렇게 안팎으로 위급한 상황이라 전쟁을 수행하려면 전 국민을 총동원해야 했습니다. 군사를 대규모로 징집하고, 물자를 징발하고, 군수 생산을 국유화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자유를 억압하고, 반대 세력을 단호하게 쳐내야 했죠. 근대적 총력전의 유효한 동원이라는 형태로 이해될 수 있는데, 총력전이란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보인 것 같은 징병, 배급과 엄격하게 통제된 전시경제 및 국내외에서의 군인과 민간인 구별을 실질적으로 철폐하는 국가자원의 총동원을 말합니다.
그래도 공포정치는 정도가 심했다고 볼 수도 있죠. 특히 방데 반혁명 봉기의 진압은 여자와 아이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략 17만명이나 학살당했다고 하니...그러고도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 몰락 후 1795년 7월이 되어서야 진압되었으니 반혁명의 뿌리가 깊긴 했습니다만 정도가 심했죠. 또 통제 경제 정책 중에서도 핵심적이었던 최고가격제는 물자 공급을 줄게 하고 암시장을 형성시키는 등 부작용이 극심했습니다. 게다가 최고가격제에 맞추어 실시된 최고임금제는 자코뱅파 지지세력이었던 상퀼로트의 반감을 많이 샀고요.
통제경제 정책 때문에 자유롭게 돈벌이를 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들의 반감이 심했으나, 그런 전 국가적 통제가 아니면 혁명만이 아니라 국민국가, 어쩌면 프랑스 자체가 사라질 수 있었기에 참아주었습니다. 그랬는데 외국과의 전쟁이 성공적이고 내부 반혁명 봉기도 속속 진압되고, 특히 1794년 6월 22일 플뢰뤼스 전투의 승리로 대외적 위험이 거의 사라지면서 참아줄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공포정치는 계속되고, 그 조금 전 6월 10일에 제정된 프레리알 22일 법(혁명재판에서 변호사를 두지 않고 증인 심문도 없애 배심원 심증만으로 유죄선고가 가능하게 만듦) 때문에 오히려 처형이 급격히 증가하고 통제도 더 강해지니까, 참지 못하고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킨거죠.
최고가격제를 비롯한 통제경제 정책을 채택하라고 압력을 넣었던 상퀼로트들도 로베스피에르에게서 돌아섰습니다. 최고임금제로 인한 반감도 있었고, 무엇보다 더 과격한 공포정치와 더 강력한 통제경제정책을 주장하며 상퀼로트의 요구를 더 직접적으로 반영하던 에베르파를 숙청하고, 그 뒤 상퀼로트들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던 기관들이 로베스피에르파 관료들의 통제에 들어가면서, 상퀼로트들이 로베스피에르를 완전히 적대하게 된 건 아니었어도 무기력해지고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주지는 않게 된 거죠. 1794년 7월 27일 의회 의원들이 로베스피에르파를 체포하고(테르미도르 반동), 파리 코뮌의 봉기로 그들이 풀려나 28일 새벽까지 시청에서 농성할 때, 상퀼로트들이 모이기는 했으나 정부군을 이길 만큼 대규모는 아니었고(수백이란 말도 있고 1,2천이란 말도 있던데) 결국 로베스피에르파는 체포되어서 바로 그 날 28일 오후에 단두대에서 처형됐습니다.
그 외에 지방 농민들은 자코뱅파가 '자유를 누리려면 경제적 조건이 뒷받침 돼야 하므로, 모두가 작은 토지나 작은 작업장이나 상점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라는 이상에 따라 봉건적 공납(귀족 영주에게 세금을 바쳐야 함)을 무상 폐지하고 토지를 분배하자 거기에 만족해서, 그런데 최고가격제 탓에 원래의 시장가격보다 싸게 팔지 않으면 단두대로 보내니까 불만을 품어서 보수적으로 변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고 그 물자를 징발한 반가톨릭 운동(이건 자코뱅파 내에서도 에베르파가 주로 지도했고 로베스피에르는 비판했지만) 때문에 가톨릭 신앙이 투철하던 농민들이 혁명정부에서 돌아선 면도 있고요.
그런데 공포정치가 끝난 뒤에는 더한 헬게이트가 열렸습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대부분 통제경제 정책에 심히 반감을 품고 있어서 곧 최고가격제를 없애고 자유경제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아직 전쟁이 안 끝나 물자가 부족했는데 그렇게 하니,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뛰었습니다. 부자들이야 그 기회를 이용해 돈을 듬뿍 벌고 파티를 열며 흥청댔지만 하층민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죠. 그 때문에 파리 빈민들은 1795년 4월 1일에(제르미날 봉기), 그리고 더 대규모로 5월 20일에(프레리알 봉기)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당했습니다. 그 후 1830년 7월 혁명 전까지 파리에선 민중봉기의 맥이 끊어집니다. 게다가 공포정치에 억눌려 있던 왕당파도 준동해서 파리와 지방 곳곳에서 자코뱅파를 습격하고 살해했습니다. 이런 걸 부르봉 왕가의 상징색인 흰색에서 따와 백색 테러라고 불렀고, 반대로 자코뱅파의 공포정치는 붉은 프리기아 모자(외젠 들라르쿠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자유의 여신이 쓰고 있는 모자요.)에서 따와 적색 테러라고 불렀어요. 지금도 우파가 좌파에게 가하는 테러를 백색 테러, 반대를 적색 테러라고 부르죠. 정부는 부르주아 친화적인 자유주의를 고집하려 했으나, 왼쪽에선 민중 중심으로 가자는 자코뱅 및 상퀼로트들에게, 오른쪽에서는 왕정복고를 꿈꾸는 왕당파에게 양쪽에서 포화를 맞고 헤매다가 나폴레옹에게 권좌를 넘겨주었고, 그렇게 왕을 없앤 프랑스 대혁명은 황제를 세우면서 끝이 났더랍니다....
공포정치가 통념처럼 비상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저도 공포정치를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감안할 건 감안하면서 더 정확히 까자는 거죠 ㅋㅋ
겨우 전제군주 개인의 야심을 위해 더 많은 피를 뿌렸던 사례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많았다며 쉴드를 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남들이 더 했다고 자기가 괜찮았던 게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당시의 위급한 상황상 불가피했다고 해도 정도가 심했죠. 방데도 그렇고, 법에 혁명의 적을 애매한 말로 포괄적으로 규정해놔서 무고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 경우도 많았고, 외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내부 반혁명 봉기를 진압하여 위기가 해소되고 있었는데 공포정치는 오히려 더 많은 피를 뿌리기도 했어요.
어쨌든 대량처형과 자유 억압이라는 건 그 자체만 보면 끔찍하잖습니까. 상황의 압력이나 목표의 선함이 그걸 완전히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결과도 안 좋았죠. 공포정치 하에서도 최고가격제의 부작용 얘기하며 말했듯 경제는 어렵고 하층민들은 살기 어려웠습니다. 정치라는 게 자기에게 책임이 없는 상황도 수습해야 할 책임을 지는 것 아니겠어요. 또 많은 사람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치라는 장에서 중요한 건 정치인 내면의 의도보다는 정책의 실제 결과일테고요. 루이 16세도 자기 탓이라기보다는 전대부터 누적되어 온 문제인 재정 적자와 제도적 모순 때문에 혁명 크리 맞고 처형까지 당했으니, 로베스피에르도 설령 자기가 맞닥뜨린 상황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해도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루이 16세 처형 주도한 사람이니까 본인도 일관성이 있다면 결과적 책임을 피하진 않겠죠. 물어보진 않았지만요 ㅋ
가장 민중적인 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이 그 하층 민중의 힘이 가장 강해진 시기에 공포정치라는 억압적 정치를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게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사형제의 폐지를 주장했던 사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 정말 비극적이지 않습니까. 고결한 이상을 내세웠던(정말 믿었든 말만 했든 간에) 운동/인물이 악에 빠져드는(어쩔 수 없이 악한 행동을 했든 정말 마음이 악해졌든 간에) 것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비극의 단골소재잖아요. 하하...
제가 깔끔하게 요약정리하는 재주가 없어서 글이 제법 길어졌군요^^;; 아무리 프랑스 대혁명이 복잡하다 해도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