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야기는 100%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야기로 각색없이 구성하였습니다.>
창원군을 끝까지 지키고자 노력했던 성종은 결국 창원군 유배를 허가합니다.
이에 의금부에선 창원군의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하거나 진상을 알았는데 고발하지 않은 노비의 경우
장형을 내리고 양인은 천민으로 사노비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고장의 관노비로 영속하자 합니다.
그에 성종은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은 말한대로 처벌하지만,
사건을 알았지만 고발하지 않은, 직접적으로 사건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죄를 묻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요.
성종의 뜻이 관철되지 않은 건 아쉽지만,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잘 해결되었고 관련자 처벌 역시 납득 가능할 정도로 타당했습니다.
하지만 사건 이틀 뒤, 3월 13일 성종은 금방 마음을 바꿔버립니다.
그 이유는 대왕대비의 하교 때문이었지요.
'세조 대왕의 친자에 오직 창원군 형제만이 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외방에 방치한다는 것은 마음에 차마 할 수 없다.
하물며 창원군은 생계가 매우 어려우니, 만약 집을 떠나 생업을 잃는다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우선 너그럽게 용납하여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성종에게 물은 것입니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이런 말을 하니 성종도 어쩔 수 없는, 한 편으론 창원군을 보호할 좋은 핑계 구실이 생겼죠.
이에 창원군의 부처(유배)를 멈추고, 그 뜻을 대간과 정승, 삼사를 불러 알립니다.
당연히 이 일을 가장 크게 반대하고 나선 건 대간들이었습니다.
사간부 김괴가 나서서 반대하나 성종이 뜻을 굽히지 않으니,
사헌부 이세광이 같이 나서서 원래 창원군의 죄는 부처가 아닌 더 큰 벌을 받아야함에도
왕의 친족이라 오히려 감형을 받은 건데 아무리 대비의 하교라도 그 벌마저 주지 않으면 말이 되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성종이 그 뜻을 굽히지 않자 사헌부 대사헌과 사간원 대사간인 유지와 김자정까지 나서
창원군 이성의 부처 철회의 부당성에 대해 고하지만 결국 성종은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경연에 이 사건에 관련된 노비들에 대한 처벌까지 완화합니다.
고읍지를 죽이고 성 밖으로 내던진 직접적인 가담자들의 처벌은 필요하겠지만,
주인의 죄를 목격하거나 간접적으로 가담한 노비들은 그 죄를 줄여 관노비로 예속시킵니다.
이로서 두개골 깨진 여인 시체로 도성을 떠들석하게 했던 사건은 완전히 종결됩니다.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자 가해자로 밝혀진 창원군은 결국 유배형조차 받지 않게 되고,
사건 관련자 몇 명만 외지의 관노비로 영속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납니다.
이 사건 전까지만해도 행실문제로 실록에 빼곡하게 거론 됐던 창원군은 그 후로 아주 조용히 살았는지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성종은 그 후에도 창원군을 잊지 않고 말을 한 필 보내준다거나 쌀이나 콩을 하사하지요.
또 성종이 사냥을 구경 나갈 때 따라가기도 하고 궁에 입시하기도 하지만,
창원군의 행실에 대해 상소하는 글은 전무합니다.
이는 창원군이 정말 사건의 범인이라 더이상 죄를 지으면 안 된다 생각했기에 얌전히 지낸 것이었거나,
창원군이 범인이 아니라면 자신의 행실을 문제삼아 없는 죄도 만들어 내 자신을 벌주려하는 상황이
또 올 수 있다 생각했기에 죽은 듯 조용히 살 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원군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6년후 2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시호는 여도(戾悼). 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한다는 뜻이지요.
창원군 어머니인 근빈 박씨가 그 시호를 고쳐주길 원했지만 결국 대신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고종 때 가서야 장소공으로 추증됩니다.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땐 창원군이 왕실에 위협이 된다 생각하여
성종이 일부러 사건을 만들어 내 죽이려든 게 아닌가 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성종의 친형도 있는데, 서자인 창원군이 뭘 할 수 있겠으며 무슨 위협이 될까요.
게다가 창원군이 가장 유력한 범인이라 지목된 상황부터 성종은 창원군을 끝까지 지키려 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추측은,
창원군은 원래 행실이 아주 안 좋고 그 때문에 조정 안에서도 엄청난 말이 돌았던 인물이라
신하들이 어떻게든 벌주기 위해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종의 보호 아래 아무런 벌을 받지 않았고 때문에 그의 행실은 더욱더 나빠진 것이죠.
그런데 마침 두개골 깨진 여인 살해사건이 발생하고,
창원군이 원래 평소 행실대로 함부로 행동하며 성종의 명까지 어겨가며 수사를 방해하자
신하들 입장에서 그를 처리한 아주 좋은 구실을 스스로가 만든 게 아닌가 합니다.
이런 중대한 사건의 결론은 어떤 식으로든 나야했고,
정치적으로 힘없는 인물 하나를 제거하기위해 증거를 꾸미는 건 일도 아닌데다
증언은 관련자들은 고문하여 심사하면서 대답을 끌어내면 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물증이 미약하여 처벌한 근거가 애매모호하다면,
왕조시대의 최악의 폐륜인 왕명을 어긴 일을 빌미로 삼아도 됐고요.
흔히 이 사건을 평가하길 살인은 가볍게 취급하고 왕명을 어긴 건 무겁게 취급했다하여 비난하는데,
개인적으로 당시 왕명을 어긴 것이 더 중죄라 말한 건 어떻게든 창원군을 벌주기 위한 구실이었다 생각합니다.
뭐, 이런저런 제 분석이 다 헛발질이며 창원군이 진짜 범인일 수도 있겠지만요ㅋ
4부작쯤 끝나지 않을까 싶었던 시리즈가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네요.
겨우 6부작 쓰는 것도 이렇게 힘들고 지치는 걸 경험하고 글 쓰는 분들의 존경심이 한 없이 높아졌습니다.
장편 시리즈 글 읽을 때마다 글 길게 주절주절 쓴다고 혼자 속으로 욕했는데,
이젠 절대 그런 일 없이 감사하며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발 잘린 아이 사건과 두개골 깨진 여인 사건을 마치며,
앞으론 한동안 사건 중심의 글은 안 쓸 거 같고 조선시대 경제 이야기나 재미있는 실록 기사 이야기로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