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를 조상으로 둔 조기숙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요.
저는 굉장히 소모적인 논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ㅂㅈㅎ의 딸인 ㅂㄱㅎ를 대선후보로 두고 있고
오유에서 워낙 ㅂㄱㅎ를 많이 까서
우리의 일.베.충들께서 어떻게든 "너희들도 더러운 놈들이 많다!"라는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런 의미에서 몇 명의 '친일파'와 그 자손들을 언급해보겠습니다.
1. 임문호(林文虎, 1900~1972)
천도교 쪽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0년 이후 국민총력천도교총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을 맡았습니다.
또한 천도교 잡지 <<신인간>>에서 황민화정책과 일본 전쟁에 참여하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에 이 사람의 이름이 실려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누구일까요?
<<친일인명사전>>의 모태가 된 <<실록 친일파>> 등을 지었던 임종국 선생님입니다.
반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를 만들어서
친일 문제를 소상히 밝히는데 애쓰신 분입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비판을 하시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러나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밝히고 비판도 하셨습니다.
2. 백붕제(白鵬濟, 1910~?)
1934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요즘의 사법시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조선인이 붙기는 쉽지 않았죠) 합격
1935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요즘의 행정시험입니다. 사법과 시험보다 붙기 어려웠습니다.) 합격
그래서 당시 조선인으로는 거의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당시 군수(1937년)를 지냈습니다.
중일전쟁일 때 경북 군위 군수를 하면서 군수품 공출, 응소군인 유가족 위문, 국방헌금 모집, 군인 후원 등을 했고
1941년 내무부 국민총력과장 등을 맡았습니다.
해방 전 경력은 이만한 것으로 생략하고, 그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경기도 관리를 하다가 납북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백낙청 선생님입니다.
민족문학론을 이야기하시고 국문과 쪽에서는 원로라고 할 수 있죠.
민주진영 단일화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학계 원로 중 한 분입니다.
3. 소모적인 논쟁들
조상이 친일파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판단하는 것이 참 우습습니다.
무슨 연좌제도 아니고 말이죠.
친일파를 조상으로 두면 어떻습니까?
친일파가 뭡니까? 다른 사람들 먹고 살기 힘들 때 정치경제적으로 더 잘먹고 잘 살던 사람 아닙니까?
길지만 소설을 인용해봅시다.
“……그런 쳐죽일 놈이, 깎어 죽여두 아깝잖을 놈이! 그놈이 경찰 서장 하라닝개루 생판 사회주의허다가 뎁다 경찰서에 잽혀? 오―사 육시를 할 놈이, 그놈이 그게 어디 당한 것이라구 지가 사회주의를 히여? 부자놈의 자식이 무엇이 대껴서 부랑패에 들어?……”
아무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기 아니면 앉았을 뿐, 윤 직원 영감이 잠깐 말을 끊지자 방 안은 물을 친 듯이 조용합니다.‘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 오죽이나…….”
윤 직원 영감은 팔을 부르걷은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치면서 성난 황소가 영각을 하듯 고함을 지릅니다.
“화적패가 있너냐아? 부랑당 같은 수령(守令)들이 있너냐? …… 재산이 있대야 도적놈의 것이오, 목숨은 파리 목숨 같던 말세(末世)넌 다― 지내가고 오……, 자― 부아라, 거리거기 순사요 골골마다 공명헌 정사(政事), 오죽이나 좋은 세상이여……남은 수십만 명 동병(動兵)을 히여서, 우리 조선놈 보호히여 주니, 오죽이나 고마운 세상이여? …… 으응? …… 제 것 지니고 앉어서 편안하게 살 세상, 이걸 태평 천하라구 하는 것이여, 태평 천하! …… 그런데 이런 태평 천하에 태어난 부잣집놈의 자식이 더군다나 왜 지가 땅땅거리구 편안허게 살 것이지, 어찌서 지가 세상 망쳐 놀 부랑당패에 참섭(參涉)을 헌담 말이여, 으응?”
땅―바닥을 치면서 벌떡 일어섭니다. 그 몸짓이 어떻게도 요란스럽고 괄괄한지, 방금 발광이 되는가 싶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모여 선 가권들은 방바닥 치는 소리에도 놀랐지만, 이 어른이 혹시 상성이 되지나 않는가 하는 의구의 빛이 눈에 나타남을 가리지 못합니다.
“…착착 깎어 죽일 놈! …… 그놈을 내가 핀지 히여서, 백 년 지녁을 살리라구 헐걸! 백 년 지녁 살리라구 헐 테여…… 오냐 그놈을 삼천 석꺼리를 직분(分財)히여 줄려구 히였더니, 오―냐, 그놈 삼천 석꺼리를 톡톡 팔어서 경찰서으다가, 사회주의 허는 놈 잡어 가두는 경찰서다가 주어 버릴껄! 으응, 죽일 놈!”
“…이 태평 천하에! 이 태평 천하에…….”
쿵쿵 발을 구르면서 마루로 나가고, 꿇어 앉았던 윤 주사와 종수도 따라 일어섭니다.
“……그놈이 만석꾼의 집 자식이, 세상 망쳐 놀 사회주의 부랑당패에 참섭을 히여? 으응, 죽일 놈! 죽일 놈!”
- 채만식, <<태평천하>>
잘 먹고 잘 살려고 남들에게 오만 피해 다 끼치고 살면서, 손자인 종학이 민족해방운동(당시에는 사회주의도 민족해방운동의 범주에 속했습니다.)한다고 "이 태평천하에!"라고 이야기하는 윤직원 영감을 봅시다.
그러나 손자인 종학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삽니다.
민주당 신기남 씨요? 헌병 오장을 아버지로 두었다고요?
위의 임헌영, 백낙청 선생님의 아버지는 지금으로 따지면 각각 뉴데일리 편집진, 고위 공무원에 해당합니다.
죄질을 따질 수 없이 무겁죠.
그렇다고 해서 이 분들이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서 자기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고
한국에 제대로 된 민족주의를 세우기 위해 한 노력들을 무시해야 되나요?
오히려 아래와 같은 사람들이 비판을 받아야지요.
4. ㅂㅈㅎ(朴正熙, 1917~1979)
1932년 대구사범학교 입학, 1940년 2월까지 소학교 훈도로 재직.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당시 나이 23세)
4년제 만주국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제2기생 선발 입학시험으로 1940년 1월 15등으로 합격.
일본사람 외를 뜻하는 만계(滿系) 합격자 240명 중 조선인은 11명 밖에 없었죠.
상식적으로 지금 육군사관학교도 기혼자, 23세인 사람을 뽑지는 않죠.
얼마나 적극적으로 지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해방 후 형인 박상희(1946년 미군정에 반대해 일어난 대구항쟁에서 사망)를 따라 남로당 입당
동료들을 전부 팔아서 다 죽게 만들고 육군 편입.
이후 행적은 다 아시죠?
이거 ㅂㄱㅎ 씨는 다 인정하나요?
5. 홍진기(洪璡基, 1917~1986)
1940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
1942년 사법관시보.
1943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예비판사
1944년부터 해방까지 전주지방법원 판사
4월 혁명 당시 시위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서 이승만정권 부역 혐의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가 극적으로 살아남
이후 삼성회장이자 훗날 사돈 관계를 맺게 될 이병철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
1968년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71년 주식회사 동양방송 대표이사
1974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
1980년 중앙일보사 회장을 지냈죠.
자식으로는 누가 있냐면
첫 번째 딸 홍라희(洪羅喜) 1945년 7월 15일 - 이건희의 아내,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첫 번째 아들 홍석현(洪錫炫) 1949년 10월 20일 - 중앙일보 회장, 전 주미 대사
두 번째 아들 홍석조(洪錫肇) 1953년 1월 8일 - 보광훼미리마트 회장, 전 광주고등검찰청 검사장
세 번째 아들 홍석준(洪錫埈) 1954년 9월 17일 - 삼성 SDI 부사장
네 번째 아들 홍석규(洪錫珪) 1956년 1월 15일 - (주) 보광 대표이사
두 번째 딸 홍라영(洪羅玲) 1959년 1월 10일 - 삼성문화재단 상무, 노철수(노신영의 아들)의 아내
6. 친일파 자손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쎄요. 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조상이 일본 밑에서 떵떵거리고 잘 살았으면
반성하는 삶을 살면서 최소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것도 없이 사람들 대다수를 못 살게 만들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화가 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복지정책을 펴려고 하고,
반값등록금 하려고 하고
노동자 위한 정책을 하려고 하고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 노력하는
그런 사람을 친일파 아버지 두었다고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약
1. 임헌영, 백낙청 같은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 잘못 다 인정함.
2. ㅂㄱㅎ, 홍석현 같은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 잘못 인정 안 함.
3. 친일파 자손이라면 최소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 등에 짐이라도 얹지 말아야 안 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