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출신 관리자에서 비정규직 옹호 투사로
노컷뉴스 | 입력 2008.12.10. 06:02
◈ 육사출신 관리자에서 비정규직 옹호 투사로
지난 달(2008년 11월) 노사협상 타결 후 노조 위원장직에서 물러난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 전 위원장의 첫 인상은 부드럽고 얌전한 사람이라는 느낌이었다.
'육사'와 '노조' 두 단어 모두에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라고 인사를 건네자 "옛날부터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면서 "파업 중에는 그런 말을 별로 듣지 못하다가 요즘들어 과거의 부드러운 이미지가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고 말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관리직 중간 간부였던 그가 어떻게 해서 510일이 넘는 최장기 파업을 이끈 '열혈투사'로 변신한 것일까.
우선 협상타결 이후 근황부터 물었다.
"힘겨운 투쟁을 벌였던 조합원 186명 가운데 지도부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복직이 돼서 회사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정직 등의 징계를 받은 직원 몇 명이 다음달에 복귀하면 모두 일자리로 돌아가는 거죠"
사실 인간 김경욱의 이력은 노조와는 거리가 멀다.
1993년에 육사를 졸업한 그는 98년에 대위로 전역하면서 한국 까르푸에 입사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대한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하던 김경욱 과장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건은 예기치 못한 데서 벌어졌다.
"2002년에 새로 부임한 프랑스인 점장이 제가 맡고 있던 부서의 직원 15명을 무조건 내보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고연봉 정규직인 이들을 비정규직이나 연봉이 적은 신입사원으로 대체하려 한 것이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 부하들에게 사표를 강요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점장의 지시를 거부한 김과장은 그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고 2003년 10월에는 한국까르푸 노조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외국인 경영자의 부당한 지시 한 마디가 육사출신의 충직한 관리직 사원을 노동 운동가로 변신시킨 셈이다.
◈ 비정규직 고용보장 이끌어낸 '절반의 승리'
조합원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일터에 복귀했지만 김경욱 위원장과 노조 간부들은 돌아가지 못한다.
협상타결을 위해 파업 책임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측의 주장을 눈물을 머금고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랜드 파업은 비정규직 보호를 위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노사가 추가 외주화를 금지하기로 했고 비정규직 고용보장에도 합의한 것이다.
김경욱 위원장은 이를 두고 '반승반패(半勝半敗)' 즉 '절반의 승리'라고 표현한다.
"노조간부들의 복직에는 실패했지만 비정규직 고용보장이라는 소중한 성과를 거둔데다, 지난해 이랜드 투쟁을 보고 놀란 기업들이 비정규직 외주화 시도를 중단한 것도 보이지 않는 성과죠. 이랜드 투쟁을 통해 외주화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론화된 것도 보이지 않는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와 타협으로 극단적 파업 막아야"
김경욱 위원장은 이랜드 파업이 500일이 넘게 지속된 이유를 묻자 솔직히 노사 양측에 모두 문제가 있었다고 의외의 대답을 한다.
"회사 측이 경영마인드가 제대로 있었다면 타협이 됐을 겁니다. 그런데 경영이 아닌 신앙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노조에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박성수 회장은 지금도 '노조는 타협해서는 안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회사가 노조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파업장기화의 결정적 이유라는 것이다. 그러면 노조의 잘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해고가 계속 진행되는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매장 점거농성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면서 엄청난 피해가 유발됐습니다. 이로 인해 손해배상과 가압류, 구속 등으로 상황이 악화되고 비정규직 외주화와 차별 시정이라는 문제의 본질이 벌금과 가압류 문제 해결로 변했습니다. 노조가 비본질적 문제에 압박을 받게된 것이죠"
조심스럽게 이 말을 꺼낸 김위원장은 "파업이 극단화되지 않도록 회사가 대화와 타협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다른 해고자 생각해 사측 복직 제안 거부
김 위원장의 이같은 합리적 성품을 회사도 알았기 때문일까.
홈에버를 인수한 삼성테스코는 막판 협상과정에서 김 위원장 만은 복직해서 노사관계를 안정시키고 합의사항 실천도 담보하자는 제안을 내놨다고 한다.
이에 대해 묻자 김 위원장은 대답할 사안이 아니라며 피했다.
그러나 주변의 전언에 의하면 "다른 간부들은 복직하지 못하는데 나만 복직하는 것은 복직 못한 조합원들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라며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정확하게 말하면 김위원장은 복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돌아가지 않은 셈이다.
부하직원들에 대한 의리때문에 노조에 참여한 김 위원장은 원칙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던 직장에 돌아갈 기회도 포기한 셈이다.
현재 김경욱씨는 노사합의에 따라 이랜드 일반노조와 홈플러스테스코 노조의 분리작업을 진행하면서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홈플러스 쪽의 임시위원장을 맡고 있다.
이달 말에 새 집행부가 정식으로 선출되면 그의 역할은 모두 끝나는 셈이다.
그 뒤의 계획을 묻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잠깐의 정적뒤에 나온 대답은 이랜드 투쟁과정의 수 많은 사연을 모아 책으로 남기려고 한단다.
다시 그 뒤의 계획을 묻자 "실직상태가 처음이어서 막막한데, 먹고는 살아야죠"하면서 말을 잇지 못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솔직히 고민이 되는 표정이었다.
후회는 없냐고 묻자 "이랜드 투쟁이 시작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해고가 중단되고 수 천명의 고용이 보장됐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같은 상횡이 되풀이된다면 다시 노조를 하겠냐고 거듭 묻자 "솔직히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었다"면서도 "만일 전쟁이 터지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김경욱 위원장이 이끈 이랜드 일반노조는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을 맞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선정한 올해의 인권상을 받았다.
비정규직이 소모품처럼 인식되는 풍토에 제동을 걸고 비정규직 근로자의 권익을 옹호한 공로가 인정된다는 것이 수상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