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또 시리즈물이 될 거 같은데...
아직 두개골깨진 여인 이야기는 끝나지도 않았지만, 삘받아서 시작해봅니다.
제 식견이 좁고 성품이 게으르기에 저서나 논문까진 차마 참고하지 못할 거 같고,
해당 자료 출처는 100% 실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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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인 통념이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상업을 천시해서 화폐를 쓰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닙니다. 조선시대엔 저화 (지폐돈), 포폐(면직류화폐), 혹은 흔히 아는 동전까지
다양한 화폐를 사용하려 엄청난 노력했어요.
조선 실록만 봐도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화폐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가 넘쳐납니다.
가장 먼저 노력한 인물은 태종. 태종은 저화를 민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지요.
태종은 저화 혹은 저폐라고도 불리는 종이돈을 일상화 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결론은? 실패입니다.
태종 1년,
태종은 하윤의 건의에 따라 사섬서를 설치하고 저화를 발행합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딴지가 들어오죠. 원래 동방에선 포필을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종이는 쉽게 해진다.. 그러니 저폐 대신 면직 화폐를 써야한다는 거였죠.
하지만 태종은 저화의 사용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신하들 녹봉을 주는 것도 저화를 병용하여 지급하고,
국고의 쌀을 사는 것에도 저화를 이용해 사게합니다.
첫 시행시 태종의 저화 사용 의지는 확고했지요.
(이 때 저화 한 장의 가격은 쌀 두 말의 값어치를 했습니다.)
이렇게 저화가 통용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일반 백성들은 기존에 써왔던 추포(베:면직류)의 사용을 여전히 더 좋아합니다.
태종은 이 상황을 알고 있었고, 저화의 사용 방침을 더더욱 강화하지요.
추포와 저화를 둘 다 사용할 수 있게는 하지만, 만약 저잣거리에서 파는 사람이 저화를 받지 않거나
사는 사람이 저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매매한 물건을 모두 몰수하겠다는 조치까지 강행합니다.
그러다 그것도 안 될 것 같으니 추포의 하나였던 오승포의 사용을 완전 금지하면서,
동시에 조정에서 저화로 오승포를 다량 구매해버립니다. 시중에 오승포의 유통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노력이었죠.
하지만 태종 2년 9월, 저화의 통용이 채 2년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저화 통용의 폐단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저화 사용은 너무나 좋은 제도이나, 백성들의 심리가 중국과 같지 않아 수군대면서 저화를 무용지물로 여긴다는 거지요.
그렇기에 이젠 한 장의 저화로 한 말의 쌀을 사려고해도 살 수가 없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1년전만 해도 한 장에 두 말)
지금 백성들이 저화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니 사용을 중지 해야 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사헌부에서는 포화의 단점을 말하고 저화의 장점을 말하며 저화의 사용을 계속 주장합니다.
사헌부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포화의 단점 :
1. 마가 귀해지면 재료 수급이 어려운 점.
2. 방직하기가 어려운 점.
3. 수량이 많아지면 가지고 다니기가 어려운 점.
4. 길이가 한 필이 되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점.
5. 찢어지고 흠이 있으면 쓰지 못하기에 꿰메거나 이어서 가지고 다닐 수가 없음.
저화의 장점:
1. 종이는 섞어서 쓸 수 있으니 재료의 수급이 용의.
2. 인쇄하기가 편함.
3. 가볍기 때문에 가지고 다니기가 편함.
4. 조금 찢어지거나 해졌어도 사용 가능하기에 꿰메어 가지고 다닐 수 있음.
하지만 사실 사헌부에서 저화 사용 폐지에 대해 반대한 건 이런 이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정에서 저화의 유통을 위해 백성들로부터 저화를 이용해 쌀과 면직 등을 구입했는데,
저화의 사용을 중지하면 백성들이 지폐를 다시 환납하려고 할테고,
관부에선 이미 그 물건들을 상당량 사용한 상태라 모두 돌려주기 힘든 실정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저화 제도를 폐지해버리면 관아에선 화폐 가치에 따른 물건을 돌려주지 못할테고,
그럼 결론적으로 백성들에게 물건을 수탈한 꼴이 되어버린다는 거죠.
그러니 일단 저화의 사용을 계속 추진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태종 3년 9월, 저화가 사용된지 채 3년되 되기 전에 사섬서는 없어지고 저화 사용은 중지됩니다.
이렇게 끝났으면 참 다행인데... 태종 10년, 7년만에 없어졌던 저화를 태종은 다시 복구시킵니다.
그리고 세금을 저화로 대신 내게 하고, 온갖 의견을 다 수렴하려 하지요.
나중엔 아예 정 2품 이상에겐 저화를 효과적으로 통행시킬 의견을 전부 다 제출하라 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수요와 공급.
특히 화폐를 잘 회수함으로써 화폐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빈궁할 때 저화를 매입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쌀을 풀어 저화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세금 역시 저화로 적극적으로 걷어들이지요.
하지만 조정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몰래 사람을 저잣거리에 나가 알아보게 하기도 하고, 관원들에게 물어볼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저잣거리에서 저화를 쓰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거였습니다.
태종은 저화의 가치를 백성이 알게하는 게 중요하다 생각하고 그 방법에 대해 고심했음에도
이미 한 번 시행했다 폐지되었던 법이니 백성들은 이 저화법이 언제 다시 폐지될지 모른다 생각하여
저화 사용을 극도로 꺼리는 게 현실이었죠.
결국 저화의 재사용이 시행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저화 가치가 너무 많이 떨어져버려
저화로 쌀을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그 후에도 저화가 아주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세종 4년에는 저화 3장이 쌀 한 되까지 이를 정도로 화폐가치가 떨어진 상황에 이릅니다.
이를 계산하면 처음 발행했을 시 저화 1장이 쌀 두 말이었음으로,
20년만에 약 60배정도 가치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미 화폐로서의 가치를 거의 상실했다봐도 무방하지만,
태종이 만든 법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폐지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문종 때 이으러 문종조차 저화의 사용에 회의적이었고,
성종 때는 법만 있지 이미 죽어버린 법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사용이 중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