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이 문제인가, 종편이 문제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또 종편이었다. 대학 중간고사 기간, 내 방까지 들렸던 '악쓰는' 목소리. 내용은 이랬다.
아들 : (방문 열고 나오며) 아~ 또 종편이야? 쟤네들은 왜 이렇게 악을 써대? 도저히 공부를 못하겠어! 엄마, 차라리 <JTBC>를 봐. 믿을 건 손석희뿐이야.엄마 : (딴소리) 교과서가 문제래. 북한 때문에 문제가 많대.아들 : 북한을 비판하려고 해도 북한이 뭔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지... 그걸 북한 미화 서술이라고 기성세대 혹하게 하는 거잖아. 박근혜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국정교과서 안 된다고 하더니, 대통령 되니까 말 바꾸는 거 봐봐. 박정희도 말 바꿨지. 독재야, 독재.엄마 : 흥, 나쁜 건 문~재인도 똑같애~ 문~제가 많아~.아들 : (당황하며) 그럼 투표소에서 습관적으로 1번 찍지만 마~. 그럼 아들 미래가 힘들어져! 1, 2번 말고 다른 쪽 뽑든지 아니면 투표율만 잡히게 도장 찍지 말고 투표함에 넣어.엄마 : 치~ 그게 뭐야. 아무도 안 뽑을 거면 투표소에 힘들게 왜 가. 안 가, 안 가.문재인 지지자에는 유감이지만, 우리 모친이 그리 정치 성향이 뚜렷한 분은 아니라는 점이 위안이 되길 바란다. 2002년에는 노무현을 찍었다가, 2012년 박근혜를 찍는 등 뚜렷한 일관성은 없으니 섭섭해 하진 말자. 한편 나는 대학생인데, 배운 게 인문학이다 보니 '진보-중도-보수' 같은 이념적 틀에 나를 끼워 넣는 걸 선호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적 판단과 선택은 꼬박꼬박 하는 편이고, 인물을 좇기보다는 '삶'의 지평에 따른다.
그 결과는 대부분 스스로 '진보'라며 자의식을 드러내는 사람들과 결론이 겹친다. 하지만 '진보'가 민초들을 너무 계몽적으로 대하거나 지지를 해줘도 싸움을 못할 때는 시큰둥하기도 하다. 한편 보수 성향으로 알려진 <TV조선>이나 <채널A>에서 온갖 소리가 들려와 짜증은 날망정, '채널 삭제'까지 하는 무리수는 안 둔다.
다만 꾸준히 설득해서 채널을 <JTBC>로 돌려놓는다(물론 어느 순간 자꾸 <TV조선>에 되돌려져 있다). 이게 정치지 별 게 정치인가(한 지붕 아래서도 이렇게 TV 채널로도 역동성이 있는 건데, 나라 전체에 대고 대뜸 "역사학계 90%가 좌편향", "전체적으로 다 그런 기운이 온다"며 교과서를 국정화 하겠다는 건 보기 싫은 TV 채널 삭제하겠다는 것과 뭐가 다를까).
'시작 채널'이 기호 1번으로 설정된 5070세대 |
▲ 경북 구미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앞에 세워진 높이 5미터짜리 박정희 동상. |
ⓒ 권우성 | 관련사진보기 |
극성스러운 보수단체 회원이 아니라면, 5070세대에 설득의 여지가 아예 없진 않을 것 같다. 아들로서 엄마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특히 그렇게 느낀다. 엄마는 젊었을 적에 대한주택공사에서 일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엄마에게 은근히 물어본다.
아들 : (박정희 동상에 절하는 사람들 사진을 보여주며) 세상에 이거 봐, 어른들은 왜 이렇게 박정희를 신처럼 모셔? 너무 종교적이야. 무슨 노예가 주인에게 절하는 거 같아.엄마 : (매번 하는 얘기)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줬잖아. 경제도 살리고.아들 : 먹고사는 문제를 결국 해결한 건, 엄마같이 청춘을 바쳐 일했던 구체적인 노동자들 한 명 한 명이지, 박정희 혼자 공을 다 독차지할 건 아니지. 나는 저런 거 보면 좀 가슴 아파. 어른들은 저런 상징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자부심을 부여할 자격이 있어.순간 엄마의 눈동자가 흔들렸던 걸 보면 거의 넘어올 뻔했을까? 그러나 또 얼마 뒤, 엄마는 다시 <TV조선>에 채널 고정이다. 이 불가사의함을 어떻게 설명할까 싶다가 강준만(전북대·신문방송학) 교수의 <감정독재>에서, 행동경제학의 '현상 유지 편향'이라는 걸 알게 됐다. 즉 '귀차니즘'이다. 사람들은 현재의 조건에서 벗어나는 걸 아주, 아주 귀찮아한다.
'하던 대로 해'라는 말은 일상과 직장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있다. 미용실도 자주 가던 곳이 편하고, 스마트폰은 늘 쓰던 대로 삼성이 좋을 것 같으며, TV 채널은 늘 보던 대로 <TV조선>이고, 투표도 늘 찍던 대로 기호 1번이다. 왜 이럴까? 변화를 시도했다가 손해를 봤을 때 느낄 후회가, 현상을 유지했다가 볼 손해보다 클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예측은 합리적이기보다 지인 등 주변 환경이나 본인의 감정 등 비합리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박정희-박근혜'라는 굳어 버린 '기본 선택'(default option)도, 다른 '압도적인 희망'을 제시하지 않으면 바뀌기 어렵다. 미국의 진보 정치학자 클라우스 뮬러는 이 현상 유지 편향을 진보의 아킬레스건으로 본다.
진보는 강한 이념성과 합리주의로 무장하고 계몽적 태도를 보이지만, 거기에 역량을 탕진하다 보면 '비전'이나 '희망'을 주지 못한다. 사정이 이러니, 유권자들 사이에서 '구관이 명관' 내지 '그놈이 그놈' 같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문재인도 똑같아, 문제가 많아"와 같은 말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엄마와 아들의 에피소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렇다. 첫째, 5070세대의 '시작 채널'이 기호 1번으로 설정돼 있다는 것. 둘째, 이걸 도덕적·합리적 잣대로만 접근하려 들면 '기본 선택'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진보 세력이 화법을 바꾼다면 어떨까 |
▲ 박정희 대통령의 경축사 동안 스탠드에 그려지는 대통령 초상화 카드섹션. 1973.10.1 |
ⓒ 연합뉴스 | 관련사진보기 |
결국 5070세대의 어떤 감정이 '박정희-박근혜'에 대한 집착을 만드는지가 중요하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 악셀 호네트 소장은 <인정투쟁>에서, 인간에게는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란 게 있다고 설명한다. 사람이 인정을 받으면 자신감, 자존심, 자긍심이 생긴다.
그러나 5070세대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크게 일조했음에도 이러한 감정들을 얻을 기회를 박탈 당했다. 역설적이게도 박정희 지지자들이 박정희 혼자 잘났던 것처럼 미화했기 때문이다. 특유의 '순응주의' 정서와 '모난 돌이 정 맞는다'식 감정 억압과 만나면, 죽은 박정희에 의해서 공을 다 뺏겼음에도 박정희를 찬양하게 된다.
평소에 사회적 인정을 경험할 기회를(복지·민초중심 역사관 등) 주지 않다가, 박정희를 산업화의 상징처럼 미화하고 대리만족 기회를 주면 부지불식 간에 강한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식이다(영화 <국제시장> 등장인물 덕수·영자도 비슷한 경우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생산성'은 야박할 정도로 평가됐지만, 박정희나 기업가의 정확한 노동생산성은 '기업가 정신' 같은 과학적 증거가 불명확하고 신비주의적인 환상 뒤에 은폐된다. 결국 국정교과서 논쟁은, 이념 전쟁보다는 '금수저 대 흙수저'라는 삶의 투쟁으로 봐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국정교과서에 대해서 "혼자 애국했다는 생각이 바로 독재"라고 언급한 바 있다.
바로 그거다. 그걸로 더 재미를 봐야 한다. 보수의 역사를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멘트를 도리어 진보가 뺏어와 보수 쪽에 날려야 한다. 5070세대가 '기호 1번'이라는 기본 선택에서 이탈하게 하려면, '친일·독재 미화 반대' 같은 정치적 올바름에만 호소하는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5070세대를 만날 때 만큼은 '희망'을 제시하는 탄력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독재자가 아닌 산업화 세대들의 공을 '인정'하는 대안교과서나, 실질적 노인 복지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나의 모친의 눈동자가 이런 류의 말들에 잠시 흔들렸듯, 진보가 화법을 바꾼다면 '박정희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퇴치하는 작은 파동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