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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두개골 깨진 여인 살해사건 <2>
게시물ID : history_61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ngsik
추천 : 37
조회수 : 153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11/01 03:31:33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제목만 이렇지 이 이야기는 스릴러가 아닙니다.

발이 잘린 여자 아이 이야기의 긴장감을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겁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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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야기는 100%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야기로 각색없이 구성하였습니다.>



다음 날 경연에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어제 있었던 노비의 고소 금지에 대한 이야기가 역시 언급됩니다.

당연히 사간(임금의 잘못을 언급하고 반박하는 직책) 경준도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면 강상이 무너진다 반대하고,


장령 김제신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함은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아주 쉬워서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다고 반대하고,


그 유명한 한명회 역시 사건의 잔혹함을 봤을 때 죄인을 잡아 징계함은 마땅하지만,

대간이 저렇게 간절히 여기는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반대합니다.


신하들의 완고한 반대에 성종은 숨이 막힐 것만 같습니다.

지금 궁안의 큰 어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한갓 노주(노비와 주인)의 의리만 알고

왕의 위엄은 무시하며 임의로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왜 생각치 않는가!

하며 화를 내지만...


신하의 계속되는 설득에 결국 말을 멈추고 경연을 마칩니다.



다음 날 경연... 수업을 마치자 아니나 다를까 

노비가 상전을 고소하는 것에 대한 반대 의견이 또 빗발칩니다.


신하들은 사건의 잔혹함은 인정하나 큰 근본이 무너질 것이라 반대하고,

성종은 이 일은 분명 권세가가 일으킨 짓이어서 이웃 사람도 알지 못하고,

유일한 단서는 그 집의 노비뿐이다고 법령의 필요성을 주장합니다.


오직 성종의 편을 드는 건 영사 정상손 뿐이었는데,


'법령에 모반 대역(국가를 전복시키려는 내란 죄와 임금이나 아버지를 죽이고 종묘와 임금의 능을 파헤치는 일)을

제외하고는 노비가 상전을 고발하지 못하게 되어있으나,

세종조에서도 이같은 큰 일은 또한 노비가 그 상전을 고소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특히 세종께서는 일찍이 부민이 고소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부민고소금지법: 하급관리나 일반민이 수령을 고발할 수 없는 세종 때 만들어진 법)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말하게 하였는데 고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셨습니다.

지금 일은 노비가 고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데 하는 게 마땅합니다' 하며 성종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그러나 다시 주위 신료들은,

지금 상전을 고발하여 범인을 잡으면 순간의 통쾌함은 있겠으나, 한 번의 통쾌함으로

강상을 무너뜨릴 수 없다며 입장을 고수하지요. (참 답답합니다 ㅠㅠ)


대신들의 입장은 이리 답답하지만, 다행이도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만한 단서가 하나 잡힙니다.


우부승지 김승경이 와서 보고하기를,


시체를 성 위로부터 던져 버려졌을 거라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시체를 놓아 둔 곳에서 

가까운 성안의 집을 수색해보니 그 마지막에 창원군의 집이 있었고,

그 집 뜰을 죄다 살폈으나 피자국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서 곧장 창원군 집 옆 동산에 다다라서 성 위를 돌다가 끊어진 머리털 약간과

끊어진 노끈을 찾았는데, 그 곳에 핏자국이 있었으며 찾은 머리털을 시체의 머리털과 비교해보니

길이와 가늘기가 차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이어 노비 동량을 잡아보니 옷 속에 빗자국이 두어 점 보였고,

그 이유를 물으니 '주인에게 월형(빨꿈치를 베는 형벌) 당할 때 묻은 것이다.' 하여

그럼 월형을 언제 당한 때를 물으니, 이미 4~5년이 지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래라면 빨지 않았을리가 없으니, 최근에 더럽혀진 것이 분명하고

상당히 의심스러우니 형추(매질하여 신문하는 것)하는 것이 어떤가 성종에게 묻습니다.



대신들의 깝깝한 소리에 속이 꽉 막힐 거 같았던 성종의 숨을 틔워주는 보고였습니다.


성종은 기뻐하며, 버려진 시체 가까운 곳 성안을 수색하라는 것을 이미 수 일전에 명했는데,

이와 같은 증거를 왜 이제서야 찾았냐면서, 동량을 장문(곤장을 치며 신문하는 것)하면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으나 다른 사람이 버린 것일 수도 있으니

창원군만 치우쳐 지목하지 말라고 혹시 모를 수사 대상의 오류를 경계합니다.



그러나 사건의 실마리는 아주 쌩뚱맞고 아주 결정적으로 풀립니다.

그렇게 사건의 단서를 발견한 후 3일 뒤 1월 27일 아침,

성종이 신하들에게 업무보고를 받으려고 하는데, 도승지 신준이 헐레벌떡 들어옵니다.


손에는 익명의 고발장이 있었는데 원래 이런 익명서는 받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금은 밀봉(익명으로 고발하는 것)하는 법이 있어 가져왔다 합니다.


그 내용은 '여자의 시체는 거평군(居平君) 부인이 질투하여 한 짓이니 가외(加外)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다.’

는 것이었고 사건의 진위를 알고 있다고 하는 가외라는 노비를 잡아다가 신문합니다.

가외는 금방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털어 놨는데, 그 내용이 대충


고읍지라는 여자가 창원군의 구사(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길을 안내하는 노비)로

그 집에서 일했는데, 자신이 알기로는 창원군이 고읍지와 간통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그 고읍지가 머리가 깨져 죽은 여자일 거 같다고 말합니다.


고읍지의 신상에 대해 물으니 그 모습이 시체와 비슷하고,

아예 가외에게 죽은 시체를 가져와 보이니, 고읍지가 맞다고 합니다. 

죽은 시체가 고읍지가 맞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처음부터 조금 의심스러웠던 창원군이고

성종은 죽은 여인의 얼굴과 목에 사이에 칼자국이 낭자하였으니, 

창원군 이성의 집으로 환관 조진을 보내 흉기로 사용되었을 칼을 찾게합니다.


그러나 창원군이 자신이 죽인 게 아닌데 어찌 범행도구가 여기 있겠는가 하며 발뺌하자,

성종은 의금부 사람을 보내 범행 도구가 아니라도 집에 있는 칼을 다 가지고 오라 명합니다.


그러자 창원군은 자신에겐 칼이 없다며, 칼을 내어주는 걸 완강히 저항하지요.

점점 더 의심스러운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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