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 등에서 유배를 보냈다고 해서 보면
이건 대체 유배를 간 것인지, 휴가를 간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유배하면 어디 지방 경치 좋은 곳으로 가서 몇 년 살다오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이 아주 강하죠.
어떤 분께선 리플로 '고작 귀양살이를 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 유배에 대해 아주 커다란 오해가 있구나 해서 간단히 몇 자 적어봅니다.
유배란 형벌에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언제 풀려날 지 기약이 없다는 것.
두 번째는 유배를 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
세 번째는 유배를 가서의 생활은 끔찍하기 그지 없다는 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현대 형량을 보면 몇 년형. 이렇게 정해져있습니다.
사람이란 게 지금 끔찍한 생활이 얼마가 지나면 끝날 수 있다는 것과
기약없이 이 생활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느낀 막막함은 갇혔다는 그 자체도 있지만,
대체 언제 풀려날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것일 겁니다.
유배가 이와 비슷한 경우죠.
조선 후기 먼치킨 다산 정약용의 경우엔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에서 약 18년간 유배생활을 합니다.
조선 최장기 유배객이었던 조정철은 27년간을 유배지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27년간을 언제 풀려날 지도 모른 채 막연히 유배생활을 했다는 게...참....
대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이젠 곧 풀려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할 수 있게 될까요.
개인적으로는 잘 상상이 안 가네요.
두 번째는 유배를 가는 것의 어려움입니다.
유배가는 게 뭐가 어렵냐. 그냥 가면 되는 거 아니냐. 하겠지만...
유배는 죄인이 지방으로 귀양가는 것인데 당연히 혼자갈리가 없습니다.
반드시 죄인을 끌고가는 압송관이 붙어있는데..
지금이야 자동차 타고 몇 시간가고 배 타고 몇 시간 가면 도착. 이렇지만...
당시엔 유배가는 길만 최소 몇 주는 걸린다는 거지요.
그럼 숙식, 숙박이 필수적인데.. 문제는 이 압송관을 죄인이 먹여 살려야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주요 범죄인이면 관리가 더 철저했을테고 당연히 압송관도 여러명이 붙게 됩니다.
상당한 재력가가 아닌 한 이 압송관을 먹여살리는 데, 엄청난 양의 재산을 탕진합니다.
당시 가족 중 하나가 유배가 확정되면, 유배를 간다는 걱정보다 이 압송관을 먹여살리는 데
더 큰 걱정을 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사극에서 나오는 휴가같은 유배생활.
가족을 못 보는 게 슬프긴 하지만 경치도 좋고 산도 좋고 물도 좋고 바다도 좋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유배를 가면 이와 정 반대의 생활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유배를 시작하게 되면, 죄인은 집도 농사지을 땅도 가족도 친척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의문점이 생길 수 밖에 없죠. 대체 유배자는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일단 유배인이 호송해온 압송관이 유배지에 도착하여 지방관에 넘기면,
지방관은 유배인의 생활을 관리할 흔히 보수주인이라 불리는 민간 숙소를 정합니다.
대게 이 집에서 유배인의 숙식을 제공하는 거지요.
죄인을 일반인이 먹여살린다는 겁니다.
갑자기 우리집에 국가에서 죄인이라고 하나 불러다가 네가 재우고 입히고 먹여라.
한다면? 대체 어떤 사람이 그걸 좋아하겠습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처우가 심각하게 안 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수주인이 되는 걸 피하려 했고 이를 책임질 사람은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이 담당하는 게 일반적이었겠죠.
즉, 현대로 따지면 영세민이 국가에서 지정한 죄인을 먹여살려야한다는 겁니다.
자기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디서 굴러온 이상한 놈을 먹여 살려야한다?
그 사람에 대한 대우는 안 봐도 뻔했죠.
정조 시절 대전 별감이었던 안조환은 추자도로 유배를 가는데,
그가 거기에서 쓴 만언사에 유배가서 보수주인에게 받은 설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유배지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그를 맡으려 하지 않았고 관원이 강제로 아무 집에다가 집어 넣으니
집 주인이 빡쳐서 그릇을 내던지며 안조환에게 쌍욕을 퍼붓고
방도 없어 지붕 처마 밑에서 잠을 자고, 옷도 없어서 1년 내내 단 벌로 버티며,
이불도 없이 지낸데다 주인집 마당쓸고 쇠똥 치우고, 집 지키며 밥을 빌어 먹었습니다.
나중엔 그것조차 쉽지않아 마을을 떠돌며 구걸하고 살았다 기록하고 있죠.
최장기간 유배 생활을 한 조정철의 기록을 보면,
섬안에 먹을 게 너무 없어 언제나 굶주리고 있어 밖에 음식을 좀 보내달라 요청하는데,
음식을 외부에서 들여오는 것을 관리가 막고 있는데다 그것도 부족하여,
그가 무엇을 먹나 감시까지 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감시는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아, 그가 무엇을 입는지
무엇을 먹는지, 거주지의 난방은 어떤지 어떤 책을 보는지까지 이루어집니다.
게다가 더 심한 건 농사라도 도와 먹고 살고 싶어도 농사짓는 것까지 막는다는 거지요.
한 마디로 전적으로 보수주인과 마을 주민에게 의탁해 살라는 것이고,
돌려 말하면 말 그대로 거지생활을 하라는 겁니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제주도로 유배생활을 했을 때 포졸 들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한 국가의 왕이었던 사람이 이정도 대우를 받았던 걸 감안한다면,
다른 유배자의 생활이란.. 안 봐도 뻔한 것이었죠.
마지막으로 유배의 꽃. 위리안치.
이건 정말 왕에게 찍혀도 제대로 찍힌 사람들이 되야 가능한 유배형벌인데,
아주 작은 집을 탱자나무 가시 등을 올려 울타리를 세워 밖으로 나가긴 커녕,
안에서 밖을 볼 수도 없게 꽁꽁 감쌉니다.
높이도 상당히 높아 가시 울타리로 인해 집안엔 햇빛이 들어오지 않고,
그 답답함은 마치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은 착각을 유발시킬 정도입니다.
현대 감옥에서도 죄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독방인데..
독방에서 며칠 지내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면회 금지. 외출 금지로 그 울타리 안에서 기약없이 있는다고 생각하면....
사람이 미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죠.
이런 집에 문은 밖에서 잠그고 음식은 10일에 한 번 씩주며,
담 안에 우물을 파 자급하게 하는데다 밖으로의 물건 교환 등은 엄중히 단속합니다.
올드보이 저리가라 수준이죠. (거긴 티비라도 있지....)
어느정도 원한이 쌓여야 이런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걸까요-_-;
물론, 유배를 갔다고 해도 간혹 아직 실세이고 조정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데다
집안도 부유한 경우야...정말 티비에서 나오는 것처럼 유랑 비스무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국에 400개가 넘는 유배지에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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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http://blog.daum.net/johagnes/1892572
http://idealist.egloos.com/5201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