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X월 X일 수요일.
날씨는 맑고 시원함.
어찌 잘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네요. 우린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마음만은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도 편지를 보냅니다.
이제 와서 밝히는 것이지만, 작년인가, 당신이 저에게 주소만 하나 덜렁 던져주고 떠났던 날 이후로 한 두어 달은 정신을 거의 놓고 살았어요. 내 반쪽을 이렇게 떠나보내야 하나 싶어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지새우기도 했고요. 그런데 결국 일 년 간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요. 어이가 없지요?
아이러닉하지 않습니까? 못 죽어 살던 년이 당신을 만나서 인생이 바뀐다는 것이. 곧 찾아뵐게요. 딴 여자에게 눈길 주지 말고 기다려주세요.
진심을 담아, D.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D의 소식은 끊겼다. 기다려달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삼 년이 지날 동안 그녀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지만 S는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S가 사는 곳은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구석이었다. 근방에 도시가 하나 있긴 하지만 원래 그가 살던 곳에 비하면 그저 촌 동네일뿐이었다. 그래도 불편한 점은 없었다. 단 한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교통이었는데 버스가 거의 한 두 시간에 한 대씩 오는지라 어디 나가서 무얼 사려고 하면 근 세 시간 전부터 준비를 해야 했다. 곳곳에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은 노을 질 때가 되면 분위기를 한 층 돋구어주었고, 가끔씩 들리는 소쩍새나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그 분위기를 한 층 더 고조시켰다.
대도시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S가 갑자기 시골로 온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무언가 말하기 껄끄러운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 날은 동네 사람들이 그와 술을 마시다가 이러이러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S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만큼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것들은 듣고 보면 별 시시껄렁한 이야기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D를 오래도록 기다리던 S는 이른 새벽부터 옷을 차려입고 채비를 했다. 원래 그가 살던 곳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D에게 무슨 일이 난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기타도 챙겼다. D에게 연주해 줄 요량이었다. 그는 새벽 공기를 마시며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웬일로 버스가 마침 도착했다. 기차역에 도착한 S는 대도시로 향하는 첫 차의 표를 뽑았다. 5호차 12번 자리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였다. D와 함께 기차여행을 갈 때면 항상 그 자리에 앉았다. 첫 차, 그 자리에 앉아서 쪽잠을 청하는 그의 옆에는 D의 환상이 비치는 듯 했다. 5시간 반 동안의 기차운행에 지칠 S를 위해 D는 그에게 어깨를 빌려주곤 했었다.
“잠시만 실례하겠소.”
노신사의 말에 S는 잠을 깼다. 노신사는 S의 옆에 가서 앉았다. S는 잠이 달아났다. 억지로 눈을 붙이고 잠을 청했지만 한 번 달아난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게 눈만 꿈뻑거리며 있으려니 노신사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젊은 양반?”
“대도시로 가고 있습니다.”
노신사는 희게 센 눈썹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저도 그 쪽으로 가고 있소만.”
“아....... 그렇군요.”
이렇게 대화는 끝났다.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노신사는 연신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고 S도 그저 휴대전화의 액정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그으며 새를 몇 마리 튕겨낼 따름이었다. 그들의 옆으로 이동 판매 수레가 지나갔다. 마침 출출하던 차에 S는 호두과자를 사서 포장지를 뜯었다. 구수한 향내가 차량의 전체에 울려 퍼졌다. S는 노신사에게 말했다.
“좀 드시겠습니까?”
“이 늙은이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오.”
노신사는 사양하지 않고 S가 건네준 호두과자를 맛나게 먹었다. 호두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대도시에 가는 이유까지 묻게 되었다. 알고 보니 노신사는 대도시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주방 도구를 만드는 곳이라고 했다.
“그럼, 젊은 양반은 얼마 만에 대도시로 가는 것이오?”
“한 오 년쯤 되었을 겁니다.”
“그 아가씨의 생김새가 꽤 많이 변했을 것인데 알아볼 수나 있겠소?”
“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 년이 그리 긴 시간도 아니고.......”
“젊은 친구가 세상을 모르는구려.”
노신사는 돋보기를 빼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짐짓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오 년이라면 강산도 반이나 변하지 않소? 강산도 변해가는 시간인데 사람은 어떻겠소?”
S는 할 말이 없었다. 노신사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호두과자를 집어먹자 노신사도 허허 웃으며 남은 호두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S도 웃어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거나, 기업을 운영함에 있어 채무관계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둥의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기차는 어느 새 대도시에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내려서 헤어지려고 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덕분에 지루하진 않았네요.”
“허허허 젊은 양반이 감사할 줄도 아는구먼. 이름이 어찌되시오?”
“네, S입니다.”
S의 이름을 듣자 노신사의 표정이 살짝 놀랐다가 이내 노신사는 그에게 다가와서 속삭였다.
“그럼 당신이 맞는 모양이구려. 사실 일전에 어떤 아가씨가 와서는 S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올 것이라고 말해주었소.”
S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노신사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우리가 자주 가던 서양 음식점’으로 오라고 전해달라고 했소.”
노신사는 이 말을 끝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S도 인사를 하고 생각에 빠졌다. D가 어떻게 내가 올 것이란 걸 알았을까? 약간 수상쩍긴 했지만 노신사의 말을 믿고(기차 안에서 이야기 해본 결과 그는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그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과연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인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