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시대를 앞서나간 파격적이고 무모한 시도로 인해 제식체택에서 좌절되어 역사속에 잊혀진 셔먼전차의 한 바리에이션을 리뷰해볼까 합니다.
스파르타의 최후의 전사 300인, 계백의 5천 결사대, 프랑스의 총사대, 헝가리의 후사르처럼 각 시대에는 신화적인 위용을 떨치는 정예부대들이 존재했습니다.
때론 특정 부대의 이름이 하나의 병과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굳어지기도 했고, 반대로 병과 이름이 특정 정예부대의 별칭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헝가리의 후사르는 유럽 각국의 정예기병대를 일컫는 병과 이름이 되었고, 머스킷총병의 이름은 프랑스 정예근위부대 총사대의 이름으로 굳어졌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 수톤의 강철기계들이 내연기관의 힘으로 움직이는 병기의 싸움이 되어버린 현대전에서 특수부대같은 것들은 이름을 떨칠 수 있어도 과거처럼 하나의 병과 종류가 위용을 떨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더이상 사람의 싸움이 아닌 기계의 싸움이 되어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위용은 압도적인 위력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위험하고 무모한 상황에 처음 들으면 미친것이 아닌가 하는 방식으로 투입되어 포위된채로 일대 다수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병과라면 소총을 든 보병의 모습으로도 중전차와 전함의 사이에서 정예병과의 이름을 영유할 수 있죠.
현대전에 그런 병과를 찾으라 한다면, 그건 바로 공수부대일것입니다.
공수부대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애초에 항공기의 역사부터가 별로 길지 않지만, 사람을 낙하산에 매어서 하늘에서 떨어뜨린다는 발상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항공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도 공수부대의 출현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죠.
공수부대는 특수한 수송기로, 때로는 간단하게 개조된 폭격기로 적지 후방의 영공으로 야간에 날아가 낙하산을 매고 투하되는것이 일반적입니다. 훈련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며 다수 투입하기에도 어려움이 있는 특수병과였지만 전략적으로 볼때 적지의 엉뚱한 후방에 아군 전투력을 출현시킬 수도 있고, 항공폭격등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특수목표에 대한 정밀공격 또는 일시적인 점령등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한 특성이 분명 존재했죠. 굉장히 섬세하고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프리미엄+ 병과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 개념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많은 국가들이 공수부대에 주목하게되었고, 2차대전동안 공수부대를 위한 특수장비들이 수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어린이 장난감따위에서 유래했지만 피아구분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간단하고도 기발한 똑딱이부터 시작해서 공수부대용 접이식 스쿠터나, 저격소총-기관단총-경기관총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고도 무게도 가벼운 하이브리드 만능소총이고싶었던 FG 42까지 다양한 특수장비들이 고안되었죠.
하지만 과거 공수부대가 항공기의 개념이 생기고나서도 오랜시간 등장하지 못했던 주요 원인이 공수부대가 출현하고 난 후에도 또 한번 발목을 잡습니다. 바로 항공수송중량의 한계입니다.
공수부대는 소수 정예부대로써, 투입된 후 한정된 물자를 가지고도, 그것도 고립된 상태에서 많은 적을 상대로 일반 보병부대보다 뛰어난 성과를 이루어내야합니다. 하지만 가져갈 수 있는 무장은 오히려 일반 보병부대보다 빈약하기도 했죠. 게다가 투하가능한 탄약의 양이 부족한건 차치하고라도 야포나 전차같은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었던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지고나서 보니 알보병부대인것입니다(...)
장교: "지고 올라들 오느라 수고했다. 근데 이 산이 아닌가벼."
야포는 기존의 산악포라는 개념에서 시작해서 어렵지 않게 경량화한 공수부대용 야포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전장식 대포 시절부터 산악지형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경량화해서 쉽게 분해해 들고 오를 수 있는 "가벼운" 산악포의 개념이 이미 존재했습니다.
산악포병: 누가 가볍댔어!!
1차대전 "경"기관총병: 내말이...
하지만 대포와 철갑을 지닌 전투 트랙터인 전차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레벨의 중량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항공수송기능의 발전으로 쓸만한 공수전차들이 등장했지만 초기에는 아니었습니다. 각 국가들의 공돌이들은 경전차인지 장갑차인지 구분도 안갈정도로 한심한 화력과 방어력이 되도록 한계까지 무게를 깎아낸 전차(?)들을 만들어 공수전차라고 우기면서 병사들을 쑤셔박았죠. 하지만 이렇게 오락실 게임 메탈슬러그에서처럼 아기자기한 꼬마전차들에 종잇장장갑을 입혀놓아도 무게는 당시 수송능력 기준에서는 여전히 무거웠고, 전용 글라이더나 일회용 조립식 날개 등의 개념들이 구상됩니다.
그렇게까지 해서야 공수부대는 마침내 쿠킹호일보다 조금 나은 철판을 두르고 소총 이상의 무언가를 쏠 수는 있는 수준의 트랙터를 함께 가지고 날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차로써의 능력은 심히 한심했지만 알보병부대였던 공수부대에게 있어서는 이정도도 감지덕지였죠.
하지만 이런 물건도 여전히 크고 무거웠습니다. 여전히 무거운 공수전차 한대를 가져갈때마다 데려갈 수 있는 공수부대원의 수와 휴대 가능한 탄약의 중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고, 게다가 무게뿐만이 아니라 부피도 수송기 입장에서는 큰 문제였죠.
그런데 미국에서 무게와 부피 양쪽 다 혁신적으로 줄여낸 공수전차가 등장합니다. 바로 M4A9E6 Falsifier 공수부대 셔먼입니다.
미군의 주력전차였던 M4셔먼은 유럽전장에서는 체급 자체가 다른 독일의 티거 중전차를 상대로 무모하게 계속 투입된 탓에 론슨라이터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지만, 수많은 바리에이션으로 무려 5만대가 넘게 생산된 명품전차였습니다. 따라서 미국은 공수부대용 경량 전차의 개발도 이 M4셔먼을 기반으로 시작하죠.
무려 5만대 넘게 대량생산된 베스트셀러 M4 셔먼. 론슨라이터는 억울한 오명. 펄시파이어 프로젝트도 이 M4 셔먼에서 시작.
M4A9E6 펄시파이어가 가진 일반적인 M4계열의 셔먼전차들과의 차이점중 하나는 승무원의 수가 5명에서 한명 줄어든 4명이라는겁니다. 수가 적은 공수부대에서 투하 후 조작인원이 많이 동원되어서는 안되므로 자동화를 최대한 이루어내어서 장전수를 생략한 4명의 승무원구조를 이룹니다.
승무원 4명의 힘으로 들고 옮길 수 있는 수준의 무게.
M4A9E6는 굉장한 경량화를 이루어내어서 사진처럼 4명의 승무원들이 들고 옮길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무게를 줄여내었죠.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경량화를 이루어내었냐를 설명하자면 부피문제의 해결과정을 먼저 설명해야만 합니다.
엔지니어들은 부피문제를 엉뚱하다 싶을 정도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해결해냈습니다. 그들이 주목한것은 수송하는 동안 전차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것이었습니다. 공수부대용 소총들이 개머리판을 접고, 총을 반으로 쪼개고, 볼트 또는 총열을 때어내듯이, 전차 또한 부피를 줄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또 한가지의 세기의 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늘고 가벼우면서도 질기고 단단한 소재, 신의소재라고까지 불리웠던 그 소재, 바로 나일론이었죠. 나일론은 어떻게 합성하냐에 따라 다양한 용도를 위한 특성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흐물흐물하게 접히면서도 공기가 통하지 않고 웬만큼 강하게 찔려서도 구멍이 나지 않게 만들 수도 있었죠.
공수전차 M4A9E6 Falsifier의 컨셉을 잡고 있던 엔지니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나일론이었습니다. 가볍고 흐물흐물하면서도 타격에 대한 내성이 존재하죠. 그들은 군용 나일론을 개량하여 공수전차의 장갑제로 사용할 발상을 했습니다. 합성 나일론 섬유를 이용해 흐물흐물한 전차를 만든 후에 필요에 따라 금속재 조립식 증가장갑을 부착하는 방식이라면 가벼운 소재로 만든 전차를 바람빠진 고무풍선처럼 꾸겨서 가져가면서도 준수한 방어력을 보유할 수 있을것이란 생각이었죠.
먼저 기총과 주포같은 무기나 포탑회전기구, 증가장갑같은 금속제 모듈들은 따로 수송합니다. 전차의 뼈대가 되는 나일론재 장갑도 포탑부와 차체부로 나누어서 꾸겨서 가져갑니다. 낙하산으로 지상에 투하된 후 공수전차병들은 등에 매고온 배낭형 공기펌프를 이용해 나일론제 전차 장갑에 바람을 채워 넣습니다. 전차 형태가 완성되면 이 배낭형 공기펌프는 엔진으로 사용됩니다. 수송 중량과 부피를 줄이기 위해 별도의 엔진을 가져가지 않고 용도를 겸하는 아이디어죠.
배낭형 공기펌프. 중량와 부피절감을 위해 조립과정이 끝나면 엔진으로 활용.
완성된 전차 형태에 알루미늄합금으로 가볍게 제작된 금속모듈들을 조립합니다.
궤도, 기동륜, 포탑링과 바스켓, 주포, 기관총, 조준경, 무전기, 그리고 금속제 증가장갑을 조립합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무전기는 보병용 소형 휴대용 무전기를 탑재하고, 변속기도 생략하여 공기펌프의 동력이 기동륜으로 직접 전달됩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겹쳐서 M4A9E6 Falsifier는 제식체택되는데에 실패합니다.
급박한 투하 후 상황에 느긋하게 전차를 조립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고, 무엇보다 스타킹이나 만드는 나일론으로 전차장갑을 대신한다는 발상이 허가를 내어줘야 할 보수적인 장성들의 시선으로는 너무 파격적이고 무모해보였죠.
또, 별칭인 Falsifier의 의미가 거짓말쟁이라는 이유도 한몫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