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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직구주의) 미필자들은 몰랐던, 그 곳의 이면 (12)
게시물ID : military_287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류세아
추천 : 11
조회수 : 129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8/15 15:44:05
안녕하세요? 2부 격인 제 군생활 후반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네요. 
제가 군생활하는동안 일기를 전혀 쓰지 않았던지라, 기억나는 건 많은데 흐름을 생각하면서 말하려고 하니 임팩트있는 사건이 그렇게 많지는 않네요. 
이등병, 일병 1년을 11개의 스토리로 마무리하고 보니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는 내무생활 면의 이야기도 나오겠지만 그것보다는 간부랑 얽히고, 작전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올 거에요. 
어찌보면 장르가 달라진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래도 열심히,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해볼 테니 많이 사랑해주십시오. 

시작에 앞서, 아직 1~11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께, 이전 편들을 먼저 보고 이 글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스토리가 많이 진행된지라 그전의 이야기를 모른다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전편은 댓글에 링크 달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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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자연에서 이는 윗물이 흘러 내려간 것이 아랫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어떤가. 윗물은 아랫물이 아니고, 그렇다고 윗물이 깨끗한 아랫물을 치우고 그 자리에 윗물같은 물을 흘려넣지도 않는다. 이를 설명하려면 명제의 두 주어가 뒤바뀌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흘러 아래로 내려온 물이 더럽기에 윗물도 점차 더러워지는 것이다. 언젠가 아랫것이었던 사람도 어느새 윗것이 되면 더러워진다. 우리네 사회에서 그토록 싫어하던 윗것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아랫것은 이전부터 전혀 특이한 현상이 아니었다. 어쩌면 문제는 윗물도 아랫물도 아닌 물길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병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일병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상병 ㅇㅇㅇ, ㅇㅇㅇ, ㅇㅇㅇ 이상 n명은 모년 모월 모일부로 이병에서 일병으로, 일병에서 상병으로, 상병에서 병장으로, 각각 1계급의 진급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어느 겨울날, 나는 상병이 되었어. 군생활은 반 이상 지나갔고 높은 계급 때문에라도, 나를 때리거나 괴롭힐 사람은 이제 간부밖에 남지 않았지. 진정으로 가르치던 2명의 6개월, 7개월차 후임들은 어느 새 일병이 되었고, 이제 나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어 교육이 아닌 보호와 관심의 대상이 되는 후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난 나의 일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어. 지금까지 괴롭힘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지만, 항상 필요 이상의 최선을 다해 일처리를 해왔기 때문에, 괴롭힐 사람이 사라진 그 때 나는 더이상 군생활의 업무에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게 되었어. 그 때쯤, 장거리달리기에 있어서는 아직 부족했지만, 그 외의 모든 부문에 있어 매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일병 말기까지 꾸준히 외워왔던 작전예규와 기타 잡 사항들 때문에 지식 면에서도 누구에게도 떨어지지 않았지. 

하지만 B의 이야기를 기억해봐. 문제는 자신의 능력도 아니고, 열정도 아니며, 타고난 카리스마 혹은 처세술이야. 모든 방면에서 특출나게 뛰어나지 않은 이상 이 면에서만큼은 사회도 군대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학교 생활에 만족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 학교에서는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노력을 할 필요도 없고, 개인적으로 맞지 않는 학생과는 관계하지 않으면 되는데다 나를 평가하는 잣대 역시 시험이라는 어찌 보면 비효율적이지만 완벽하게 절대적인 평가 하나뿐이니까. 난 내가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하는 만큼의 보상을 얻을 수 있잖아. 물론 시험문제가 정말 실력을 대변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두고 말이야. 

뭐 어쨋든, 그 당시의 소대장은 나에게 전출상담을 했던 소대장이었고, 간혹 '이젠 적응할 만 한가보다'라는 뼈 있는 말을 던지고는 했었지. 내가 선임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무엇을 원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종종 후임들이 모르겠다고 질문하는 것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달리기 이외의 성과가 부족한 것도 아니며, 분대 내의 교육 담당은 일병 중 왕고참이지 내가 아니었는데. 아마 A의 말을 듣고 박힌 소대장의 나에 대한 인상 때문에, 내가 별 일을 하지 않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이 못마땅하게 여겨졌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소대장과 나는 사이가 벌어졌어. 그는 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자꾸 나에게 일병 이하의 인원들이나 거쳐갈 일들을 하게 만들려고 했었지. 가끔 나에게 작전예규에 대해서 직접 물어 테스트하기도 했었는데 나보다 부대에 적게 있었던 놈이 테스트 따위를 하려 든다니 우스워 마지않았지. 

이즈음 되면 이제 바꾼 소, 부소대장에 대한 소개를 해야 할 것 같네. 그들은 특전출신 간부보다 훨씬 자신의 일에 무책임했었어. 소, 부소대장은 소대본부 분대라는 자신을 직할의 분대를 가지고 있었고, 소대본부는 n분대로 명명되는 다른 분대들보다 간부와 밀착되어 있어, 그들의 각종 잡일을 담당해야 했지. 이전의 특전 출신 간부들은 자신의 빨래, 방 청소, 기상시간 등은 자신이 알아서 했지만, 바뀐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어. 아침마다 가서 깨워줘야 했고, 조식을 먹지 않았으며, 방 청소, 빨래는 물론 심지어 총기 및 장구류까지 하나하나 챙겨줘야 했지. 어느 날은 식사 후 자신의 식판을 그대로 놓고 일어서는 바람에 내가 그걸 거둬서 닦아놔야 되는 상황도 발생했었어. 

소대본부에서 생활했던 친구의 말로는 내가 상상하기도 힘든 무수한 잡심부름을 했다고 하지만, 우선 내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를 않네. 여튼 내가 이들을 소개함으로서 하고싶은 말은 이들은 내 군생활에 집적거릴 만큼 그들의 임무에 충실하지조차 못했었다는 거야. 

그렇게 하루하루 간부에게 짜증나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나는 상병이 되어서도 별반 상황이 나아지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점점 더 히스테리컬해지기 시작했어. 물론 맞지도 않고 더 이상 얼차려도 없었지만, 어떤 강한 보상심리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 그 히스테리의 희생양은, 스스로도 정말 부끄럽지만, 그래 내 후임이었어. 

내가 상병이 되고 처음으로 들어온 후임 H는 처음부터 특이했어. 무용 출신이라 유연성과 폐활량은 탁월했지만 근력이나 그 외 사격술 및 작전예규 숙지 면에서 평균을 훨씬 밑돌았지. 보통 한두개는 잘하고, 한두개는 못하는 비율을 유지하기 마련인데, H는 그렇지 못했던 거야. 결국 그는 분대 내 집중적인 갈굼의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한 탓인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이 어두워지고 말았어. 평소에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고, 하는 말에만 예와 아닙니다로 대답했지. 그의 맞선임들조차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특유의 유리를 박박 긁는 듯한 목소리와 약간 살이 올라 통통한 무표정으로 있어도 실실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이 그를 더욱 비호감으로 만들었어. 

B는, 그렇게 나를 버렸었지. 
나는, 그렇게 H에게 내 히스테리를 쏟아부었었어. 

어느 날 초소에 H와 둘이 들어가게 되었지. 이 친구는 말주변이 과히 없어서, 썰을 푼다기보다는 횡설수설하는 것에 가까운 대사를 쏟아냈는데, 예를 들면 '맨 온 더 문'이라는 영화를 봤다고 이야기를 하다가 '거기서 짐 캐리가 코미디언이었는데, 혹시 코미디 빅리그라고 보십니까, 제가 언젠가 코빅을 보다가 플라이투더스카이 노래를 들었는데 그것보다는 이승철 노래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하는 식이었어. 안 그래도 짜증이 나 있던 나는 그 이야기에 별 흥미를 가져주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초소의 6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있게 되었지. 

초소 근무는 2시간씩 2~3개의 초소를 옮겨다니다 '밀조'라 불리우는 휴식시간을 2시간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1초소-2초소-밀조 식으로 6명이서 3팀 근무를 하는 식이었어. 결국 2시간을 쉬고 나면 다시 초소에서 4~6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며칠쯤 생활하던 도중 H는 결국 내 성질을 건드렸어. 3일차 되는 날임에도 초소 내부의 명확한 구조와 기기 사용방법조차 몰랐던 거야. 

화가 난 나는 사실 내가 그의 숙지상태를 점검하고, 알려주지 않은 것에 잘못이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지. 물론 군대의 모든 갈굼이 그렇듯이 어떤 목적의식이나 습득에 관해 도움도 되지 않는, 오로지 갈구기 위하여 하는 갈굼이었어. 그렇게 많이 들어왔던 대사, 내가 치를 떨도록 싫어했던 대사, 바로 그것들을 H에게 한 거야. 

계속되는 폭설을 듣던 H의 표정에 짜증이 만연한 것이 보였어. 이 놈은 뭔데 내 앞에서 이렇게 개 같은 소리를 떠들고 있나 하는 눈및이 보였어. 그의 웃는 듯한 인상은 날 마치 비웃는 것 같았어. 말을 할수록 스스로 열에 받친 나는 초소에서 당장 꺼지라고 말했지. H도 엔간히 짜증이 났던 모양인지, '예'라고 말하고는 초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어. 그 순간 난 처음으로 내 후임에게 구타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어. 그리고 찰나에 머릿속에서 내 과거와 현재 내 모습이 대비되며 자괴감과 열등감이 섞인 괴상한 분노가 치솟았지. 

H가 초소를 나서는 모습이 간부에게 들켰다면, 나와 그는 아마 영창에서 최소한 10박 이상을 산 다음, 각기 다른 부대로 전출되었을 거야. 하지만 그날은 운이 따랐는지, 그 소동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난 H에게 들어오라고 명령했어. 

그가 들어온 후, 더 이상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언젠가 신병이 웃으면서 들어올 수 있는 분대를 만들고 싶다는, 언젠가의 내 소망을 잠시 떠올렸던 것 같아. 우린 그 이후 작전지역을 옮기기 전까지의 며칠 동안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휴가를 다녀오면서 나도, H도 한층 안정된 기분으로 그 때의 일들을 정산할 수 있었지만, 아마 정산했다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겠지.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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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피해자였던 이등병, 일병 생활보다도 돌아보기 싫은 것이 어느 새 가해자가 되어버린 군생활 후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뒤돌아보고, 글로 쓸 수록 가슴이 답답하네요. 

긴 글 항상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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