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해킹 사건'같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야당은 늘 딜레마에 빠져왔다. 괴담이나 음모론에 빠지게 되거나 민생과 무관한 정쟁으로 흐를 위험성 때문이다. 더군다나 안보와 연결된 사안에서 공격당하기 쉽다. 여기에 복잡한 기술 분야나 민간사찰이란 식상한 소재는 여론의 지지를 얻어내기도 힘들다.
그런데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표가 앞장서자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국가 공인 보안전문가가 조목조목 문제점을 파고드니 삼류 스파이 영화가 'CSI수사대'로 업그레이드 되는 느낌이다.
정쟁과는 멀어보이는 '순둥이' 이미지 덕에 정치 공세라며 그를 공격하는 새누리당의 '말빨'이 안 산다. "안보 장사 하지말라"는 비난도 "안보는 보수"인 안철수 전 대표에겐 치명타가 되지 못하는 분위기다. 사건이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서도 야당의 의혹 제기가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안 전 대표가 갖고 있는 안정감과 신뢰 이미지 덕이 크다.
한 정치 평론가는 "기존의 새정치민주연합 정치인들이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로 콘텐츠보다 애티튜드로 비난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안철수는 이런 선입견에서 자유롭다"며 "대통령에 대해 센 워딩을 해도 거부감이 상당 부분 완화된다는 점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안철수를 잘 활용하면 여당에 대한 공세의 신뢰도와 공감을 높일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안철수 현상'은 안철수가 정치권의 창조적 파괴자를 바라는 민심의 발현이었지만 안 전 대표는 민주당과 함께 야권을 혁신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택한 야권 혁신의 길은 "믿고 맡길 수 있는 정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정성장론'으로 '유능한 경제정당'을, 국민정보지키기 위원장으로 안보에서도 '이기는 정당'을 만드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안철수 효과'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길이다.
'안철수 현상'에 비해 '안철수 효과'는 느리고 더디다. 그러나 차기 대선까지는 2년 반이나 남았고 안 전 대표는 "꾸준히 하나씩 하나씩 결과를 보여줄 수밖에 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 전문가와 정치인 사이]
'공정성장'도, 메르스(중동호흡기질환)도 안철수는 전문가다. 국민들도 여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정치인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중시되는 자리는 아니다. 더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정치인은 '싸우는 사람'이다.
안 전 대표 역시 자신이 정치권에 들어온 이유를 "싸우기 위해"서라고 잘라 말한다. 단지 "무조건 대통령과 싸워야 한다는 것보다는 신념과 맞지 않으면 싸울 것"이라며 자신만의 싸우는 법을 강조한다.
그가 무기로 택한 것은 '콘텐츠'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소득주도성장론'에 이의를 제기하며 공정성장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 대신 사각지대 해소를 주장하는 방식이다. 전문가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면서 기존 정치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싸우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당 대표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보다 과감해졌다. 지난달 23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여의도 입성 2년 2개월 만에 처음으로 대정부질문에 나서 메르스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 실패를 강하게 질타해 그동안 보여왔던 부드럽고 차분한 이미지와는 180도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정책 부문 뿐 아니라 당내 계파 갈등과 관련한 의견이나 해법 제시에도 거침이 없어졌다. 정치적 문제해결 방식에 어느 정도 자신이 붙으면서 정치권 입문 초반 갈등회피형으로 비춰진 모습을 탈피하고 있다.
스킨십 부족이란 비판에서도 많이 벗어났다. 당 대표 시절 함께 당직을 맡았던 4~5명 의원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조찬 회동을 갖고 당내 현안이나 국회 상황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가 하면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윤영관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등 정치권 입문 당시 정책자문 역할을 했던 멘토들과도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한마디 →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
안 전 대표가 정치권에 뛰어들면서 기존의 보수와 진보 진영과 차별화된 '제3 지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핵심은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란 정체성이었다. 결과적으로 안 전 대표가 제3정당 창당이 아닌 민주당과 통합을 선택하면서 이를 독자적인 정치세력화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여야 정치권 각각 내부적으로 중도 경쟁이 가속화되는 계기가 됐다.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로 대표되는 진보적 경제 정책을 대거 채택해 정권을 잡은 것이 단적인 예다. 이후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새로운 보수'를 주창하면서 제시한 방향도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로 요약된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변화의 흐름은 나타나고 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안보정당 의지를 천명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안보관을 보다 '우클릭'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외연을 넓혀가는 노력의 일환이나 이러한 움직임이 안철수 당대표 체제가 아닌 문재인 당대표 체제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부분은 아쉬운 점이다.
안 전 대표는 지난해 연말부터 연속 토론회를 통해 전통적인 성장·복지 담론을 뛰어넘어 성장과 복지가 선순환하는 '공정성장론'을 제시해 새정치민주연합 내 성장담론 논의에 불을 붙였다. 그가 말하는 공정성장은 공정한 제도를 바탕으로 혁신 성장과 공정분배, 생산적 복지가 어우러져 일자리 창출과 소득불평등 해소, 경제성장이 선순환하는 방안이다.
여기에 문재인 대표가 '소득주도성장론'을 내세우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희정 충남지사 등 광역단체장들이 '복지성장론'으로 가세하는 등 새정치민주연합이 '포용적 성장'이란 물줄기를 잡아가도록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새누리당에서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지난 4월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구조개혁을 바탕으로 한 성장론을 언급한 바 있지만 원내대표직에서 낙마하면서 그 구상을 제대로 선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진 채 내년 4월 총선을 맞을 경우 복지와 조화를 이루는 성장론이 다시 불붙을 가능성이 있다. 또다시 안 전 대표가 성장과 복지에 대한 제3지대 형성을 이끌 수 있을 지 주목된다.
[그의 사람들 → 중도·통합·홀로서기]
◇토론회 초청 연사 : 안 전 대표가 지난해 말부터 진행해 온 연속 경제 토론회에는 안 전 대표가 정치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호의와 관심을 두고 있는 정치인들이 초청 패널로 참석한다. 지금까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전 원내대표를 비롯해 안희정 지사, 박원순 시장 등이 안 전 대표와 함께 토론회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안 전 대표와 정치적 연대 가능성이란 시각으로 이를 바라보기도 한다. 실제 이들은 새정치민주연합 내 친노(친 노무현) 주류와 거리를 두고 있는 인사들이며 안 전 대표와 친분도 두텁다.
최근 안 전 대표는 중도적이고 합리적인 정책 노선을 걷고 있는 새누리당 인사들과의 토론회도 모색 중이다. 가장 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 이는 역시 유승민 전 원내대표. 안 전 대표가 무소속 시절 개별적인 만남을 가진 이후 유 전 원내대표의 정책 방향이나 정치 행보에 관심을 뒀다. 공정성장이나 '중부담 중복지' 등 정책 공감대가 큰 편이다. 국회법 개정안 파동으로 유 전 원내대표가 코너에 몰렸을 때 안 전 대표가 유독 '센' 발언으로 유 전 원내대표를 두둔한 이유도 그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또다른 새누리당 인사는 진영 의원이다. 진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안 전 대표가 국회 보건복지위원으로 인연을 맺게 됐으며 기초연금 등 복지정책에 대한 진 의원의 소신을 인상깊게 바라봤다. 국민연금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있는 만큼 진 의원과 연금 관련 논의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희정 : '쌍안연대'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파트너. 야권 잠룡으로 안 전 대표와 전략적 협력 가능성이 점쳐진다. 지난 3월 안 전 대표의 연속 토론회에 전격적으로 참여해 '쌍안연대' 물꼬를 텄다. 살아온 환경도 정치 행로도 180도 판이한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당내 주류에서 비껴있는 것은 물론 새정치민주연합의 통합에 책임의식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새정치민주연합 내 친노와 비노 '프레임'을 깨트리는 데 이들이 손을 잡고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김한길 : 안 전 대표를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불러들이고 공동대표를 역임하면서 안 전 대표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여겨진 적이 있다. 한편 안 전 대표가 정치적으로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고 김한길 전 대표에 휘둘리면서 정치적 자산을 깎아먹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상존한다. 최근 신당 창당 가능성이 불거지면서 또다시 김 전 대표와 같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새누리당 개혁 성향의 한 중진 국회의원은 "정치는 누구에게 얹혀있다, 이런 느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갈 길을 세워서 그 길을 가야 한다"며 "안 전 대표가 진짜 초심으로 돌아가서 신당설이나 분당설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그런 걸 해나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
[대표법안 → '송파 세모녀'법]
지난해 3월 새정치민주연합은 창당 첫날 1호법안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 △긴급복지지원법 개정안 △사회보장 및 수급권자 발굴과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안 등 복지3법을 들고 나왔다. 송파 세모녀 자살사건으로 복지 사각지대 문제가 불거지면서 안철수 당시 대표가 주도해 발의한 법이다.
보건복지위 소속이기도 한 안 전 대표는 "정치가 서민들 옆에 서있는지 나부터 돌아보게 된다"며 이들 법안 발의를 위한 당내 논의를 이끌었다.
이 중 국민기초생활보장법 개정안은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해 지난 20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약 5만명이 추가로 기초생활보장 혜택을 받게 됐다.
안 전 대표는 "아직도 부양의무자 기준 때문에 110만명 이상이 극빈 중이나 국가와 사회의 따뜻한 손길에서 외면받고 있다"며 "부양 기준 완화를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요!주의 → 사그러든 '안철수 현상', 그럼에도…]
"정치를 하지 않았으면 누구보다 존경받으면서 살았을텐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망의 대상인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벤처사업에 도전해 안철수연구소를 성공시키고 교수로 변신해 자신의 성공 경험을 다른 이들에과 나누고자 했던 그의 인생은 국민들의 존경과 찬사의 대상이었다.
단지 커리어 뿐이 아니다. 기업들의 도전과 혁신을 강조해 온 '기업가 정신' 전도사로, 꿈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을 '힐링'해주는 '청년 멘토'로, 그는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한국 사회의 사상가이기도 했다.
'안철수 현상'은 그렇게 싹을 틔웠다. '안철수 현상' 때문에 정치를 시작한 안철수는 그러나 "'안철수 현상'은 더 이상 안철수의 것이 아니다"란 냉혹한 평가만을 마주하게 됐다. 정치를 그만두면 다시 예전에 존경받는 국민 멘토로 돌아갈 수도 있으련만 안철수는 왜 정치를 할까.
안 전 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열망을 실현시킬 도구"라고 정치인 안철수를 규정한다. 안철수에 향했던 국민의 열망이 아직도 유효한가란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지만 "싸우다 져서 쓰러진 사람을 국민이 손을 들어주면 그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것처럼" 그 역시 쓰러질지언정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싸움을 각오한 모습이다.
지난 2010년 3월 포스코 이사회 의장이 된 안철수는 당시 머니투데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더 의미가 크고 더 재미있고 보람 있게 일할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면서 "장기적으로 다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변치 않을 것은,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 있든 간에 매 순간 의미 있고 보람 있고 잘하는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정치인으로 국민들에게 다시 존경과 찬사를 되찾을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정치가 "의미있고 보람있고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희망은 유효하다. [프로필]
△1962년 부산 출생 △부산고, 서울대 의학과 학사, 서울대 의학과 석사, 서울대 의학과 박사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 공학 석사,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 경영학 석사 △1995년 안철수연구소 창립 △2005년 안랩 이사회의장, 포스코 사외이사 △2008년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석좌교수 △2011년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 △2013년 제19대 국회의원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