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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또다시 혼란 속으로
1954년은 3대 국회의원을 뽑는 해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은 경찰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로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자유당은 헌법을 뜯어 고쳤다. 초대 대통령은 죽을 때까지 대통령에 나설 수 있게 한 것이다.
1955년 9월 16일, 민주당이 태어났다. 신익희가 당수였고 조병옥, 박순천, 장면, 김도연 등이 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들은 부정 선거만 막으면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다.
국민들은 그만큼 독재 정치를 하던 이승만의 자유당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자유당은 이승만을 3대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별의 별 짓을 다해서 경찰과 군대, 주요 기관을 손에 넣었다.
1956년 자유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민주당은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자유당이 온갖 방해 공작을 다 펼쳤으나 민주당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될 것이라고 믿었던 신익희가 심장마비로 선거 전에 죽고 말았다. 이승만은 무난히 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민들은 민주당의 장면을 부통령으로 뽑았다.
이승만은 이미 여든 살의 노인이었다. 그는 자식이 없어서 이기붕의 맏아들 이강석을 양아들로 맞아들였고, 이기붕을 그의 후계자로 만들 속셈이었다. 이강석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배경을 믿고 장관이나 국회의원도 쩔쩔 맬 정도로 횡포를 부렸다.
자유당은 1960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신문과 국민의 모임을 단속하는 국가 보안법이라는 것을 만들 작정이었다. 조병옥이 이끄는 민주당은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경찰을 동원해서 민주당 국회의원들을 국회에서 끌어내고 자기들끼리 새해 예산안과 국가보안법 등을 일사 천리로 통과시켰다.
독재 정권을 세운 자유당은 1959년 4월 30일, 늘 정부를 공격하던 경향 신문을 폐간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에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민주당에서는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뽑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일까? 조병옥마저 선거 전에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이번에도 대통령은 이승만 혼자 나서게 되었고, 부통령만 두 사람이 맞붙었다. 자유당은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면서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3월 15일, 선거가 끝나고 보니 어마어마한 표차이로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이것이 ‘3.15 부정 선거’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국민들이 발끈했다.
“이것은 삼척 동자도 알 수 있는 부정 선거다!”
“삼일오 선거는 무효다!”
가장 먼저 마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날이 갈수록 데모 군중은 불어났고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이 소방 호스로 시민들에게 물을 뿌렸다. 데모 군중은 돌을 던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면서 데모 군중이 쓰러졌다.
군중들이 와아 흩어졌다. 경찰은 뒤를 쫓으면서 총질을 했다.
이튿날부터는 성난 군중이 더욱 드세게 데모를 벌였다. 파출소를 불태우고 자유당을 찬양하던 서울신문 마산 지국과 자유당 마산 지부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경찰은 데모 주동자를 잡아들여 공산주의자로 몰아 민주당과 함께 일으킨 폭동이라고 발표했다. 혼란에 혼란의 거듭이었다.
98: 학생들의 함성
자유당의 횡포를 보다못한 대구의 학생들이 2월 28일 데모를 벌였다. 그러나 자유당은 3월 15일, 전국적으로 부정 투표 공작을 벌였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면서 마산에서 부정 선거 무효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발포했고, 닥치는 대로 잡아들여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사태는 잠시 주춤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데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였다. 그런데 마산 시위 때 행방불명 되었던 김주열이란 열일곱 살 먹은 학생이 마산 앞바다에 시체로 떠올랐다.
시체는 온통 매맞은 자국이 뚜렷했고, 끔찍하게도 최루탄이 눈에 박힌 모습이었다. 잔인하게 고문을 하다가 죽자 바다에 던져 버린 듯했다.
시민들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마침내 부정 선거 규탄 데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4월 18일, 서울에서는 고려 대학교 학생들이 가장 먼저 데모를 벌였다. 그들은 교문을 나와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수천 명의 시민이 그 뒤를 따랐다. 경찰이 출동하자 학생들은 길거리에 앉아서 독재 정권 물러가라고 외쳤다.
당시 총장이던 유진오 박사가 나와서 설득하자 저녁 6시 50분에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종로 4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몽둥이와 갈고리, 벽돌 등을 든 정치깡패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학생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다쳤다. 경찰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경찰과 깡패가 한통속이다!”
“자유당도 한패다!”
다음 날 흥분한 서울 시내 모든 학생들이 학교를 뛰쳐나왔다. 시민들은 박수로 학생들을 격려했다. 경찰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서울 시내는 데모대의 물결로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독재 정권의 횡포에 시달린 분노였다. 심지어 국민학생들까지 나섰다.
“부정 선거 다시 하라!”
“부패 정권 물러가라!”
“독재자 이승만은 하야하라!”
데모대는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로 몰려갔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공포와 최루탄을 데모대를 향해 쏘다가 그 기세를 당해낼 수 없자 총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1960년 4월 19일 오후 1시였다. 학생들은 정의를 부르짖다 붉은 피를 뿌리면서 쓰러져 갔다. 이것이 ‘4.19 의거’다.
피를 본 학생들은 총맞은 친구의 어깨를 부축하고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전국적으로 번져 갔다. 사태는 자못 심각하게 발전했다.
정부에서는 서둘러 계엄령을 발표했다. 그러자 4월 25일에는 제자들을 잃은 대학 교수들이 대대적으로 데모를 벌였다.
계엄령으로 주춤했던 데모는 다시 불이 붙었다. 26일, 대규모의 데모가 일어나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승만은 사태를 수습하려고 허정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이기붕이 부통령을 사퇴하게 하고, 3.15 선거를 무효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급박한 불이나 끄고 보자는 얄팍한 속셈에 속을 국민은 없었다.
뒤가 구린 이기붕과 몇몇 벼슬아치들은 벌써 숨어 버리고 없었다.
데모 군중은 연일 독재 정권 물러나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그만두라고 외쳤다.
결국 이승만은 허정을 경무대로 불렀다.
“삼일오 선거가 부정이라고 저러니 선거를 다시 치릅시다.”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날더러 어쩌란 말이오?”
“…….”
“국민들은 내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 길만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은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한참 뒤에야 한숨 섞인 말을 토해 냈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이승만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을 했고, 자유당 정부는 무너졌다. 그리고 허정을 임시 총리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3.15 부정 선거 이후로 일어난 데모로 185명이 목숨을 잃었고, 1196명이 다쳤다.
출처: 오래 된 책 <역사 상식 100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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