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펌] 북한 고위층 탈북이야기-2
게시물ID : lovestory_583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심해로의여행
추천 : 1
조회수 : 28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8/12 19:46:06
북한 고위층 탈북이야기-2
집에 들어가니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김광선의 처가 특별히 불고기상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우리는 더 할 말을 잃었다.
더욱이 친구가 자꾸 눈물을 흘리자 남자가 우는 것을 처음 봐서인지
광용의 처는 세운 두 무릎 안에 이마를 쑤셔 박고 있었다.
고기가 까맣게 타자 광용이가 술병을 들었다.


"자, 자 남자들이 뭐 고만한 일을 가지고,그 배짱으로 탈북은 어떻게 했소?"
난 친구의 손에 술잔을 쥐어줬고 광용은 술을 채웠다.
우리는 연거푸 세 잔을 마셨다.
네 번째 잔을 비운 광용이가
"근데, 난 정말 이것만은 궁금한데 우리 처 같은 경우는 배고파서 왔어요,
쌀 가지고 다시 들어가겠다고 처음엔 난리쳤다니깐, 근데 당신들은 평양사람들이잖소,
내 보기엔 직업도 괜찮았던 것 같고, 살인할 사람들도 절대 아닌 것 같고, 탈북 한 이유,
그 이유가 도대체 뭐요?"

"쾅!"

친구가 식탁을 내려친 주먹에 머리를 버쩍 쳐든 광용의 처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친구의 그런 눈빛과 목청이 처음이여서 특히 나의 놀램은 더 했다.


"이유? 무슨 이유를 알고 싶은데? 북한에 무슨 이유가 있는데? 이유가 있어서 사람들이 굶어죽었냐고?
이유가 있어서 당에 충성했던 사람들이 숙청됐냐고?
그럼 김일성이 제 아들놈에게 권력을 준 이유가 뭔데? 김정일이가 계속 독재를 하는 이유가 뭔데?"

그 말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
친구와 나만이 아니라 과연 모든 탈북자들에게 자신들의 탈북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이유가 어디 있으랴.
배고파서 살자고 왔든, 핍박으로부터 도망쳐왔든, 그 정권이 싫어서 버리고 왔든,
그것이 어떻게 자기 친부모형제들과 처자, 고향을 버리고 온 인간의 이유로 될 수 있는가.
그 모든 이유를 생각할 자유마저 철저히 박탈당한 몹쓸 나라가 아닌가!

나는 그날 심화조에 의해 간첩혐의로 숙청된 친구의 장인에 대해서,
남한 서적들을 친구들에게 몰래 돌린 혐의로 국가보위부의 엄격한 조사를 받았던 자신에 대해서
김광선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온 밤 탈북동기를 말 하고나니 한국행 결심과 용기가
두만강 기슭에서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다음날 우리는 김광선과 작별했다.
우리가 친구의 친척집으로 접근할 것을 예상하고 공안과 북한 국가보위부 해외반탐과
시선이 연길에 집중됐으리라 판단해서였다.
속히 연길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탈북여성과 사는 김광선의 처지도 불안한데 우리까지 얹혀있을 순 없었다.
김광선은 한국 사람이 연락 올 수도 있으니 자주 통화를 하자며 자기 연락처를 주었다.
그리고 떠나는 내 손에 중국 돈 100원을 주었다.
그는 작은 돈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천만금과도 같았다.


훗날 처와 함께 한국입국에 성공한 김광선을 만나 그 백 원에 대한 보답을 했더니
그는 그날의 우리보다 더 고마워했다.
그러한 인품을 만나지 못했다면 장담컨대 나는 한국으로 절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어제도 노원구에 사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끔찍했던 탈북과정의 회고에
스스로 혀를 찼다...


연길시를 벗어나 친구와 내가 밖을 나와 정처 없이 찾아다닌 곳은 십자가였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성당이나 교회들에서 탈북자들에게 돈과 먹을 것을 주고 간혹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한국에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것은 배고파서 탈북한 사람들로 말해야지 살인자로 수배된 상황에서
자기 신분을 노출시킬 경우 신고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목사나 선교사들 중 공안과 연결 된 사람들도 많으니 그 점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우리는 돈과 먹을 것을 공짜로 주는 종교도 있다는 사실에 사람은 다 살게 돼 있다며 기뻐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붕이 뾰족한 건물들과 십자가를 찾아 온 종일 헤맸지만 매 번마다 허사였다.
대부분 문이 잠겨있거나 건물을 지키는 노인들이 나와 개처럼 쫓았다.
북한에서 말하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김정일 민족이란 것이 이 정도로 형편없는 줄 몰랐다.
그때마다 친구와 나는 우리를,
아니 북한 주민들을 세상이 이렇듯 멸시하고 천시하게 만든 김정일 정권에 대해 치를 떨었다.


그렇게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배는 고팠지만 워낙 밝은 낮을 무서워했기 때문인지 밤의 어둠 속으로 기분이 풍선처럼 둥 둥 떴다.
항상 숨어 살고 갇혀 살다 넓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이야기도 하며 나란히 걸으니 즐겁기까지 했다.
칼날 같은 눈바람이 무슨 대수이랴. 이대로 가다 벌판에서 쭈그리고 잔들 어떠랴,
우리는 이미 산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진 생명들이 아닌가.
끝도 없이 무연한 중국의 농촌 길에서 우리는 밤하늘에 대고 와! 와! 고함치기도 했다.


그날 밤 연길에서 멀리 떨어진 용정리 어느 집 소외양간에 나란히 누운 우리는
백 원을 들여다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솔직히 300만 아사의 나라에서 왔지만 친구나 나는 배고픔이란 것을 남의 나라 일로만 여겼었다.
때로 지방 출장길에서 거리의 시체를 보면 왜 저 사람들에겐 먹을 것이 없었을까?
왜 사람이면서도 굶어죽을까? 왜 훔쳐서도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생사에 대한 우리의 단순한 의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그 백 원 앞에서는 우리 눈에도 사람이 가진 목숨의 한계란 것이 보였다.
당장 이 돈마저 없다면, 그래서 하루 이틀 먹지 못하고 방황하다나면 이렇게 굶어죽겠구나!
이렇게 초라해지겠구나! 하는 절망으로 초조해졌다.
그러자 배고픔과 그 결말의 두려움이 육신을 파고들며 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전 같았으면 온 밤 못 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겠지만 그 날만은 공안의 추격 따위는! 하고
체념한 채 잠들고 말았다.
아마도 공안의 존재를 하얗게 잊어 본 것은 그 밤이 처음인 것 같다.


다음날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우리는 돈 백 원이 품에 있음을 먼저 확인하고서야 자리 털고 일어났다.
그러나 서로 마주보던 친구와 나는 소 외양간 밖으로 절대 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언젠가 창용 아저씨가 말하던 방황자의 증표가 얼굴과 옷차림에 역역했던 것이다.
이 꼴로 그냥 밖으로 나가면 누구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배고픔도 잊고 도망치듯 가장 가까운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노인 한분이 나오셨는데 척 보기에도 우리 꼴이 탈북자 같았는지 바로 문을 닫을 기세였다.
나는 최대한 허리 깊이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세수 좀 하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문을 반쯤 닫던 노인은 무슨 영문인지 온 몸을 밖으로 내밀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중국인인줄 알았는데 갑자기 노인이 "들어오소."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노인은 큰 놋대야에 김이 물물 오르는 더운 물을 들고 나오셨다.
우리는 황급히 달려가 대야를 받아 마당 한 구석으로 가져갔다.
혹시 누가 볼세라 말이다.
먼저 씻으라고 서로 양보하던 우리를 지켜보시던 노인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강 넘어 왔소?"
우리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
"네"

노인은 머리를 끄덕이시더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때껏 밥 달라고 문 두드리던 애들은 많이 봤어도
씻겠다는 사람은 자네들이 처음인 것 같소, 그래 끼니는 해결했소?"

우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물쭈물 하는 우리를 보던 노인은 "다 씻고 좀 들어오소." 하는 말을 남기시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조심스레 문을 열었을 땐 노인이 부엌에서 밥을 푸는 중이었다.
그때의 밥 냄새를 나는 자부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쌀밥냄새를 맡고 있는 생존의 자부심이었고,
앞으로도 목숨이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의 자부심이었고,
세상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자부심이었다.


노인은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오랜 중국 공산당원의 눈으로 본 김정일을 격앙된 어조로 저주하시였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인민 전체를 굶길 수 있냐며 배를 보니 양심도 없는 놈이라고 했다.
중학교 교사였다는 노인은 단둥과 신의주가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하셨다.
우리는 북한이 절대 개방할 수 없는 체제의 속성을 장시간 설명 해드렸다.
한동안 듣고 계시던 노인이 가까이 다가앉으시며 물었다.


"말하는 걸 보니 자네들 배운 사람들 같은데 왜 떠돌아다니오?"

남한으로 갈려고 한다는 친구의 대답에 노인은 자기가 잘 아는 한국 교회가 있으니
거기 목사를 만나면 성사될 것이라며 편지와 약도를 만들어 주셨다.

우리는 노인이 주신 편지를 한국으로 가는 여권마냥 소중히 품고 다시 연길로 들어갔다.
정성껏 그려주신 약도 때문인지 시외버스 정류장들이 밀집된 연길시장 근처 "연길교회" 간판도
의외로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 중 안경 낀 사람이 우리를 먼저 보고 반색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사를 만나고 싶어서요."

우리는 님 자를 말할 줄 모른다.
북한에서 님은 오직 김정일의 존칭어로만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에겐 목사가 목사님이 아니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목사에게만 말 할 수 있는데요."

"목사님은 지금 한국 들어가시고 없는데요.
내가 목사님을 대리하고 있으니 나에게 말해도 됩니다."

우린 편지를 꺼냈다.
그가 편지를 읽는 동안 우리는 책상 위의 십자가와 성경책을 이상한 물건처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큰 목청이 울렸다.


"탈북자야? 나가!"

"?"

"야, 이것들 내보내 탈북자야!"

나는 뜻밖의 상황에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앉아있던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우리를 방안에서 밀어내려고까지 했다.
그 기세에 문까지 힘없이 뒷걸음쳤을 때 갑자기 친구가 무릎을 끊었다.


"우린 한국교회라고해서 찾아왔습니다.
우린 한국에 갈려고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나가면 우린 죽습니다."

안경 낀 사람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너희들 같은 놈들이 한 둘이야? 우리 목사님이 너희들 때문에 공안에도 잡혀갔었어,
교회가 문 닫게 생겼어! 일어나서 안 나가? 안 나가!"

나는 억이 막혔다.
이것이 우리가 갈려고 했던 대한민국이었단 말인가?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찾던 한 민족이었단 말인가?
친구의 머리까지 툭 툭 치는 그들의 행패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안경 낀 사람의 면상을 후려치고 두 사람을 향해 옆에 있던 십자가를 흉기처럼 쳐들었다.


"공안 불러! 전화해!"

욕이라도 후련히 하고 싶었지만 그 소리에 나와 친구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안이 따라 올 것만 같은 착각에 미친 듯이 교회 멀리 뛰고 또 뛰었다.
한국입국 후 내가 한국기독교총연맹 세미나에서 그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랬더니 모두가 믿지를 않았다.
아마도 연길 현지 사람들일 것이라며 한국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날의 우리에겐 그 교회가 난생 처음 가 본 한국교회였고
그래서 그들도 한국인일 것이란 생각뿐이었다.

인적이 없는 곳에서 숨을 고르며 도망쳐 온 교회 쪽을 바라보던 그때 우리의 가슴은 먹먹하기만 했다.
방랑자의 희망이란 밟힐 때마다 소멸되는 것이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교회약도를 천천히 찢던 친구가 돈 십 원만 달라고 하였다.
이유를 묻자 오늘만은 술 한 병 사먹자고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무시한 채 숨어서 잘 곳이나 찾자고 했더니 친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대한민국? 우린 거기 절대 못가! 금방 보고도 모르겠냐?
저 사람들이 공안에 신고한다잖아! 너나 나나 이젠 어느 민족도 아니야,
그냥 사람 같은 사람일 뿐이라고!"

난 아무 대꾸도 못했다.
우린 태어난 조국을 버렸는데 찾아가고 싶은 조국은 우리를 버린 것만 같아
육신만 있고 삶은 없는 자신들을 보는 듯해서였다.





우린 백 원을 들고 시장 한 끝 매장으로 갔다.
술병을 들고 매만지기도 했지만 무겁게 내려놓고 말았다.
대신 백 원을 50원으로 바꿨다.
교회에서 도망칠 때 공안보다 친구 등을 놓치면 어쩌나 했던 불안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50원은 내가, 다른 50원은 친구 손에 쥐어주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지면 어디서 만나고,
만나도 사전에 자기의 안전신호는 무엇으로 보여줄지 구체적으로 약속했다.

가장 최선은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교회에서 도망칠 때 상황을 되새기며
뛸 때는 골목마다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가야 한다는 것까지 약속했다.
유사시 연락처라며 그때 외웠던 신광용의 핸드폰 번호를 나는 아직까지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는 그때부터 교회를 포기하고 한국기업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기업인을 직접 만나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그래도 통하지 않을 경우 그 회사가 한국에 보내는
컨테이너에 숨어가자고 계획했다.
그러자면 항구로 가야 했다.
가는 길을 물어보기 위해 신광용에게 전화를 했더니 차라리 연길에서 기업들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연길은 정말 싫었다.
싫어도 백 원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른 방법 또한 없었다.
우리는 먼저 백 원으로 비누 한 장을 샀다.
배고픈 것은 우리 속사정일 뿐 살자면 남들에게 보여 지는 겉모양부터 다듬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잠은 반드시 우물이나 공동수도, 혹은 시냇물이 있는 외진 농촌에서 잤고.
아침이면 시내로 걸어 들어와 한글 간판 기업들을 찾아다녔다.
물론 신광용이가 사 준 선글라스를 똑같이 끼고 말이다.

누구든 연길로 가보면 알겠지만 거의나 한글이다.
정작 회사를 찾아들어가 보면 한국 상품만 있지 사람은 없었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인 SAMSUNG이나 現代, LG를 찾아 이틀 동안 헤맨 적도 있었다.
그렇게 4일이 지나는 동안 내 돈은 물론 친구 돈도 거의 바닥이 났다.
그날도 온 하루 굶주림을 참다나니 빈혈이 났다.
만두가게 앞에서 나는 친구에게 사정했다.


"죽을 땐 죽더라도 오늘 네 그 마지막 십 원 쓰자"

"무슨 십 원?"

"너 십 원 남았잖아. 없는 척 하지 말고 좀 먹자"

"정말 없는데?"

처음엔 장난치는 줄만 알았는데 친구가 화까지 내며 모든 주머니를 털어 보이기에
나는 한 구석으로 이끌고 가 그동안 먹고 썼던 돈을 일전도 빠짐없이 계산했다.
두 번 세 번 계산해 봐도 틀림없이 십 원이 남았다.


"너 이래도 발뺌할거야? 너 지금 나한데 십 원을 숨기려고 하는 거야?
왜 그러는데? 너 혹시 나 몰래 먹은 게 있어? 그랬어?"

내 듣기에도 나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다.
그러자 내 시선을 피해 불안하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친구가 버럭 고함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나 돈 썼다. 너 몰래 칼을 샀다!"

그러면서 허리춤에서 정말 손칼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동이 쳤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 끼도 달래기 힘든 우리 형편에 굳이 칼이 무슨 소용 있는가?
아니 친구에게 왜 나 몰래 칼이 필요했단 말인가?

고개를 쳐드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차라리 잡힐 바엔. 죽으려고 샀다! 왜?"

바닥에 있는 그의 칼을 보니 내가 죽고 싶었다.
그동안 나의 유일한 위안이고 의지였던 친구가 이런 결심까지 품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
온 몸이 물먹은 솜처럼 잦아들었다.
돈 한 푼 없는 것보다 희망마저 잃는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상실감이었다.
나의 침묵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친구가 사정하기 시작했다.


"이러지 말고 우리 큰 아버지 집으로 가보자. 다른 방법 없잖아.
어차피 매한가지야, 이러다 죽든, 거기 갔다가 죽든"

나는 그때야 친구의 머릿속에 아직도 친척집 미련이 남아있고,
그것이 그를 그토록 나약하게 만드는 원인임을 알았다.
나는 그가 새겨들으라고 마디마다 또박또박 말했다.


"너도 들었잖아. 너 같은 친척이 없다잖아"

"사촌형도 공안 때문에 당황했을 거야, 살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설명하면 다 이해해,
광용이도 말했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이 짓하는 것보다 그 사람이 나서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가보자,"

나는 당장 그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이틀 시간을 두고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아니 친구로서 이해해주리라 믿으며 농촌에 나가 일단 집을 잡고 생각해보자고 했다.

백 원이 있을 땐 어디든 괜찮았지만 무일푼 처지에선 우선 안정적인 숙식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다음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선결조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날이 점 점 어두워져서인지, 아니면 사내가 둘이라 위압감을 느껴서인지
어느 집이나 냉정하게 거절했다. 친구가 한숨 끝에 제안했다.


"우린 둘이잖아. 그러니 부담되기도 하고 한편 무섭기도 할 거야,
그러니 각자 집을 구하고 아침마다 이 나무 밑에서 만나자"

"만약 못 구하면?"

"그래도 내일 만나자, 혹시나 둘 중 한 명이 집을 못 구할 수도 있으니
낼 아침 나올 때 먹을 것을 가지고 오기!"

우린 이렇게 헤어졌다.
친구는 약속한 나무의 마을에서, 나는 고개 넘어 이웃 마을로 갔다.
손 흔드는 친구가 안심되지 않았지만 웃는 얼굴이 나를 끝내 가게 만들었다.
두만강을 넘은 후 처음으로 혼자 걷는 길이어선지 그동안의 일들을 정리해 볼 여유가 있었다.


한국 갈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을까?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잘 못한 것은 무엇이고 앞으로 활용할 경험 가치는 무엇인가?
아니, 우선 무슨 말로 친구를 설득할 수 있을까?
광용이와 짜고 확 겁을 줘볼까?
어느새 날은 어두워졌고 역시나 찾아간 마을에서도 나는 냉대를 받았다.
그 마을은 이상하게도 개들까지도 어찌나 사나웠던지 도저히 편치 않았다.

친구에게 칼이 마침 있으니 만약 함께 동행 했다면 한 마리 잡아먹었겠는데,
이 생각에 친구가 갑자기 그리워졌고 그래서 나무마을로 발걸음이 돌아섰다.
그런데 친구는 다행히도 고마운 인정들을 만났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나는 나무를 벗 삼아
홀로 보냈다.
아침이 되자 친구가 가져 올 고기만두 생각에 신바람 났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떠오르도록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밤에도,
또 다음날 아침도,
나는 꼬박 이틀을 굶은 채 그냥 나무를 지켰다.

3일째 되는 날, 필히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광용에게 당장 전화를 해봐야겠다는 판단에 마을을 돌며 집 문들을 두드렸지만
그 소원마저도 쉽지 않았다. 정녕 방법이 없을까?

사람이란 애간장 탈 때에는 저절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뿌옇게 김이 서리는 선글라스를 벗고 흰 눈 위에 주저앉았는데 그 때 옆을 지나던 한 할머니가
멍해있는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조선에서 왔으면 여기 있지 마.
3일전에도 공안이 이 마을을 다 뒤졌어"

이틀을 굶어서인지 아니면 친구의 행처를 전혀 알길 없는 허탈함 때문인지 할머니가 하신
그 말의 의미를 모두 깨닫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이곳을 떠야 한다! 그런데 어디로? 나는 일어서며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혀를 깨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아픔과 함께 순간 뇌리를 치는 곳이 있었다.
우리에게 세숫물과 함께 밥까지 주셨던 그 노인의 집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용정리까지 걸어갔고 근심했던 것과 달리 쉽게 중학교 교사를 했다는
그 노인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친구는 어디 갔소?"
"연길교회에서 전화로 공안을 부르기에 도망치다가 헤어졌습니다."

나는 거짓말 했다.
노인이 소개해준 곳에서 봉변을 당했으니 책임지라는 식이었다.
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그 집 전화로 광용을 찾았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광용의 첫 음성은 과연 어떨까? 혹시 친구가 받았으면...하고 기원했다.


"지금 어디요?"
광용의 거친 질문에 나는 흠칫했다.
"나 지금 용정리인데 혹시 친구가 전화 안 왔었어요?"

"안 오긴 왜 안와, 이틀 전에 전화 왔었어요."

나는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밖에 펴놓은 옥수수를 돌보고 있는 노인의 동정을 살피며 헤어지게 된 경위를 소곤소곤 말했다.
광용의 말에 의하면 급히 만나자고 해서 나갔는데 친구 주제가 말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손전등들이 무리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뛰다나니 산을 넘게 되었고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이리저리 온 곳이 연길이었다는 곳이다.
그런데 문제는 친구가 친척집을 찾아가겠다고 고집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화 오면 자기가 친척을 데리고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잘 설득하라며
만약 잡히면 그때 도망치라했다는 것이다.


"안 된다고 했지요?"

"어떻게 그렇게 해요? 그 사람 혼자라도 갈 기세던데, 그러다 잡히면 나도 끝나겠는데,"

일단 친구를 집에 숨겨두고 광용이는 다른 사람을 내세워 친구의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핏줄이 가까워서인지 작은 삼촌은 자기 조카가 절대 살인할 사람이 아니라며
무척 만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리려 집에 전화하니 친구가 목욕하고 밖에 나갔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몇 시간 연락이 두절 돼 자기도 지금 바늘방석에 앉은 것만 같다는 게
광용의 마지막 설명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방랑생활에서 자신감이 생겨 잠시 경솔해진 것이니 곧 들어올 것이라며 안심시켰다.

그러나 노인의 집에서 잡일을 해주며 3일을 기다렸지만 친구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3일 동안 나는 한 번도 심장이 조용히 뛴 적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용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금방 창용 삼촌 아주머니한데서 전화가 왔는데 친구가 잡힌 것 같아요!
공안이 와서 탈북자들 한데 돈을 얼마 받았냐며 창용 아저씨를 싣고 갔대요.
나도 집을 옮길 테니 당신도 빨리 그 곳을 떠요."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당혹감에 두 무릎이 떨렸다.
붙잡히면 죽을 것이라는 충만했던 각오도 그 순간에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더불어 나도 이제 곧 공안에서 덮칠 것만 같은 착각이 내 몸 안으로부터 세차게 요동쳤다.



광용의 전화를 받고나서 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돈 한 푼도 없이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땐 정말 노인네 집 머슴이라도 될 수 있다면!
눈 감고 이런 짧은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지! 눈이 번쩍 떠졌다.
창용 아저씨밖에 없다. 그는 내 돈 700달러씩이나 받지 않았는가.
주었던 걸 돌려달라면 비열한 짓인 줄 알았지만 내 처지에 무슨 인격을 돌보겠는가?
나는 전화를 들었다.


"광용이한데 전화번호를 알았는데요, 창용 아저씨 아직 안 들어왔어요?"
"그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헤어진 거야?"

창용 아저씨 처는 겁에 질려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그것을 안 그때의 나는 정말 몹쓸 인간이었다.


"내 말 똑바로 들으세요, 내 친구는 돈 준 사실을 전혀 몰라요, 내가 준 돈이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러나 만약(나는 여기서 힘을 주었다.)내가 잡히는 경우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러니 내가 지금 당장 어디든 멀리 떠날 수 있게 광용이에게 전화해서 돈 100달러를 준다고 약속해요."

창용 아저씨 처는 하늘에까지 맹세했다.
하여 나는 연길에서 신광용을 만나 300원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고
나머지는 만약 친구가 오면 주라고 남겨두었다.) 심양으로 가는 버스에도 오를 수 있었다.
노인의 말에 의하면 심양주재 한국 영사부가 있는데 거기를 걸쳐 한국 가는 탈북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 털썩 주저앉고 나니 너무도 엄청난 일들이 단 몇 초 사이에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에야 친구의 불행에 대해 돌이켜보게 되었다.
정말 잡혔을까? 잡혔다면 지금 그는?
그러나 나는 자신에게 놀랐다.
왜 친구 잃은 슬픔보다 자신을 잃을 공포부터 앞세웠던가?
생사를 약속하고도 나는 왜 자결까지 결심했던 친구를 뒤에 두고
허겁지겁 달아날 궁리부터 했단 말인가? 비겁하고 치사하고 가증스러운 나! 나! 나!
이렇게 되뇌이며 손톱으로 계속 내 살을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되고 스스로에 대한 미움을 도저히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광용의 말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의미해보고 싶어졌다.
창용 아저씨가 공안에 불려갔다. 친구가 잡힌 것 같다.
이것이 전부일 뿐 확실한 근거는 없지 않은가?
아니 창용 아저씨가 미워하던 그 중국여자가 신고하여 단순한 조사 차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친구는 살아있으리라. 이 미련으로 마음을 다잡으니 박동소리가 약해지며 조금 편해진 듯싶었다.

그것도 잠깐. 나는 이번엔 버스에 불안해졌다.
도 경계선은 물론 군을 하나하나 통과할 때마다 군인들이 올라와 통행증을 일일이 검열하는 북한처럼
이 버스가 검문소 앞에 멎으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6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그렇게 나는 떨어야 했고 기도해야만 했다.
마침내 야경이 넘치는 도시가 보였다.
그 화려한 중심으로 버스가 당당하게 질주할 때는 친구를 좀 더 기다렸을걸!
저 불빛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하는 후회와 희망이 썰물과 밀물처럼 혈관 속으로 오고갔다.
버스가 멈추기 바쁘게 승객들 중 가장 먼저 내린 나의 눈에 거대한 시계가 보였다.
1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의 시간은 그 때뿐, 공안들이 또 서있는 광경에 나는 그만
기겁하여 몸을 숨겨 찾아 들어간 곳이 PC방이었다.
물론 알아서 거기 눌러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연 중 다행으로 한 구석 의자에 앉아
밤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누군가 심하게 흔들어 깨웠다.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여자가 비명 지르며 뒷걸음 치고 있었다.
내가 몸을 솟구칠 때 떨어뜨린 만두 세 개 때문이었다.
나에겐 목숨 같은 식량인 그 만두들을 똥처럼 혐오스럽게 보던 핑크머리가 줍고 있는 내 등에 대고
욕을 했다. 그때 만두를 집으며 나는 속으로 욕했다.
"북한 같았으면 네 머리 꼴만으로도 개년 돼!"

나는 그 PC방을 나올 때 간판을 익혀두었다.
훗날에도 또 가리라, 물론 핑크머리년이 없는 곳으로!
밝은 거리를 걷는 나는 연길에서와 달리 발걸음이 가벼웠다.
중국이 이렇게 생겼구나, 이런 곳이 외국이구나. 여권도 없는 공짜 관광이 흡족했다.
북한에서 볼 수 없는 광고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걷다나니 불안이 점 점 일어섰다.
한글들이 슬 슬 지워지더니 간판들이 모두가 중국어에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도시가 심양이 아닌 장춘이라는 곳을 알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심양은 또 어디란 말인가? 나는 일단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곳부터 찾아가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간 곳이 "고향밥" 이란 한글간판 음식점이었다.

"심양 가려고 하는데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식당 아줌마는 골똘히 쳐다보더니 대답 대신 무언가 내밀었다.
한글로 된 관광 안내책자였다. 책이 그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물건인줄 그때 새삼 알았다.
그 책이 가리키는 곳으로 버스터미널을 찾아갔고 그 책 덕에 "썬양" 하고 입을 열어
티켓도 구매할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김광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소식 없어요? 창용 아저씨는?"

광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자기 사정을 더 길게 털어놓았다.
급하게 친구 집으로 짐을 옮기다나니 여간만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그가 잠시 미웠다.


"내 친구가 꼭 전화 올 겁니다. 절대로 핸드폰을 꺼 놓지 말아요.
내가 지금 심양으로 가고 있으니 만약 친구가 오면 바로 출발하라고 해요"

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하마터면 환성을 지를 번했다.
관광안내 책자에 심양 주재 한국 영사관 전화번호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됐다. 장춘 버스와 달리 심양버스는 느려 터진 것만 같아 발을 굴렀다.
빨리 가면 빨리 한국 갈 수 있는데, 심양에서 내리기 바쁘게 전화박스를 찾아 뛰었다.
두만강을 넘을 때부터 이렇게 줄곧 뛰었지만 언제 단 한 번 내 발이라고 느껴본 적 있었던가.

전화박스 안에서 번호를 돌릴 때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호음이 울리던 끝에 "여보세요"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숨이 컥 막혔다.

"여보세요, 한국 영사관이지요?"

"네, 누구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한국 영사관이 내 전화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도 격정이 끓어 올라
정신없이 이 말부터 마구 해댔다.

"근데 누구세요?"

나는 크게 호흡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저 북한에서 왔습니다. 친구도 함께 왔습니다. 한국 가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고 정말 북한 사람 맞습니다."

응답이 없었다.
기다렸지만 조용했다.
아니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망할 놈의 중국 전화! 나는 전화기를 주먹으로 쾅 쾅 쳤다.
고장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뛰었다. 달리는 동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전화를 애타게 기다릴 한국 영사관 직원을 생각하니 그동안의 고생들이 한꺼번에 두 눈으로
주르르 흘러 내렸다.


"여보세요"

다른 전화박스 안에서 이번엔 내가 먼저 불렀다.

"네 누구세요?"

"금방 전화했던 사람입니다. 한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합니다. 신분증도 가져왔습니다.
공안이 우리를 살인자로 지목하고 수배하고 있습니다. 우린 절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여보세요, 다 알겠는데 내 말 잘 들으세요, 이 전화가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 말에 나는 사방을 황황히 둘러보았다.


"여기 심양에서는 한국 가기 힘듭니다.
한국 갈려면 북경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찾아가십시오, 우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북경 대사관에는 어떻게 가는데요? 어떻게 들어갈 수 있어요?"

"그건 탈북자들이 다 알아서 들어가요. 그것까지 우리가 어떻게 알려줘요?
전화 오래 못해서 그러는데 이만 끊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그냥 들고 서있었다.
해외공관들의 전화가 주재국 정보기관들의 도청에 노출돼 있고,
그래서 혹시나 공안이 이쪽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떤 시련을 넘으며 왔는데?
설명을 잘 하지 못한 내 탓인 것만 같아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엔 받지 조차 않았다.

마치도 그 침묵은 교회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를 쫒던 욕질 같았고 하루 밤만 재워달라고 애원하는
우리를 보고 쾅 닫아버리던 대문 같았다.
대한민국이 이다지도 먼 단 말인가?
대한민국이 우리 탈북자들을 구출할 권한이 이렇게까지 없었단 말인가?
전화박스 밖으로 나올 때 세상 끝으로 누가 날 밀어버리는 것만 같아 서러움이 확 북받쳤다.
스스로 알아서 가야 한다는 영사관 직원의 그 말에는 북한 주민인 내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내 보기에도 나란 존재는 이국의 하늘 밑을 떠도는 작은 먼지 같았다.

나는 그날 주머니에 남아있는 마지막 돈으로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먹다나니 연길에서 친구가 술을 사자고 말했던 그 상황이 그때가 아니라 지금 같았다.
친구가 그리워졌다.
제발 살아서 나에게로 와주었으면, 제발 내일은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했으면,
아파트 옥상 위에서 그렇게 자고 일어난 나는 아침이어도 갈 데가 딱히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친구의 칼이 생각났다.
아직도 친구는 칼을 가지고 있을까?
만약 정말로 공안에 잡혔다면 그 칼을 원했던 것처럼 사용했을까?
이 생각까지 이르고 나니 나는 어디든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게 됐다.
그렇다. 북경으로 가자. 남들도 알아서 간다는 길을 내가 왜 못 가겠는가.
가자고 온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는 지붕 바닥 한쪽에 고여 있는 눈 녹은 물로 세수를 했고 옷도 툭툭 털었다.
그리고 시를 쓸 때와 같은 영감으로 사색했다.
사람도 땅도 모두 낯 설은 저 밑으로 내려가면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계단을 내려 현관까지 가는 동안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사람이었다. 그것도 말부터 통하는 조선족을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중국말로 꽉 찬 이 심양에서! 그때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나는 우선 조용한 골목길에 섰다. 그리고 행인들을 행해 조용히 불렀다.
남자가 지나가면 "아저씨!" 여자가 지나가면 "아가씨!" 했다.
중국인이라면 그냥 지나갈 것이고 조선족이라면 틀림없이 반사적으로 돌아볼 것이리라.
그렇게 한 시간 또 한 시간,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흘러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세끼를 굶은 이 채로 또 하루가 지나면 어쩌나.
그 조바심에 애가 타는데 그때 저만치서 26살 돼 보이는 여자가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는 앞에서 부르면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목소리에 반응하기 때문에
그 여자가 등을 보일 때쯤 불러보았다.

"아가씨!"

그러자 그 여가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섰다. 그러더니 말했다.


"저를 불렀습니까?"



"뭘 물어보시게요?"

틀림없는 한국말에 나는 그 여자가 구면처럼 느껴졌다.


"네"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내가 절박해보였던지 그 녀는 선뜻 나에게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나는 그때 가까이 오는 그가 고마웠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관심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아직 멀쩡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였다.


"어디를 물어보고 싶은데요?"

나는 마주 선 그가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내 몸 냄새에 불쾌해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다.


"우선 내 말을 마지막까지 들어주겠다는 것을 약속해주십시오"

"?"

여자는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때야 내 아래 위를 얼핏 흩어보았다.


"전 이상한 사람은 절대 아니고 아가씨에게(동무라고 말할 번했다.) 해를 끼칠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5분만 시간을 내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여자는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고나서 머리를 끄덕거렸다.
나는 내가 북한에서 왔고 친구랑 헤어진 딱한 사정이며,
한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까지 절절히 호소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배고픔과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왠지 그때에는 같은 사람 대 사람 사이에 할 말이 아닌 듯싶어서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그 여자는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그 물음에 목구멍까지 나오는 "밥입니다." 말 대신 나는
"한국 가는 방법을 좀 알려주십시오." 했다.

내가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그 여자는 낯선 남자라는 경계심을 풀고 부지런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심양보다 북경 영사관으로 다들 간다는 것과,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는 대련으로 가면 고생이 덜하다는 것,
그리고 돈이 있으면 중국 여권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까지 참으로 아는 것도 많았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이 질문이면 대화를 좀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나 그 여자는 내가 찾던 말동무임이 분명했다.
또 다시 이어가는 그 여자의 말 들 속에서 가장 반가웠던 것은 화룡시에 사는 자기 아버지가
탈북자들을 농사시키며 많이 숨겨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놀라며 그의 아버지를 대단한 분이라고 칭찬해주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연길에서 심양까지 오는 길에 신세졌던 고마운 조선족들과
그들에 대한 나의 감사함을 열렬히 토로했다. 그 여자가 불쑥 물었다.


"이 심양에 친척이 있습니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어디서 잡니까? 밥이나 먹었습니까?"

나는 먹었다는 말은 차마 입에서 안 나왔다.
잠시 고민하던 그 여자는 핸드폰으로 어딘가 전화를 했다.
혹시 공안에 신고라도 하는 것은 아닐까? 그의 핸드폰과 중국말이 조금 긴장되었다.
이윽고 나를 향해 돌아선 그 여자가 활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친구가 나에게 찜질방 같이 가자고 했었는데 물어보니 표를 주겠답니다.
거기서 자겠습니까?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와 함께 걸으며 이름을 물었다.


"왕초린!"

몇 번을 못 알아듣는 내 귀가 신기했던지 자기 이름을 소리치며 깔깔 웃었다.
나이는 내가 알아맞히겠다고 했더니 고기 굽는 리어카를 가리키며
맞히면 저 양꼬치를 사주겠다고 했다.

먹을 것 때문에 여자 나이를 가슴 조이며 점쳐 본 적은 아마 그때가 난생 처음인 것 같다.
얼마나 그게 빨리 먹고 싶었으면 "26살!" 하고 외친다는 것이 "양꼬치!"해버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행히도 초린은 내 실수를 모른 채 양꼬치를 진짜 사줄 것이라며 거듭 다짐했다.

"26살" 조심스런 내 음성에 "몇 살?" 다시 물었다.
"26살" 내가 좀 더 크게 말하자 초린은 손뼉을 짝짝 쳤다.

"틀렸어요, 에궁 양꼬치 못 사주겠다.."

그 말에 양꼬치가 더 간절해졌다.


"도대체 몇 살이에요?"

"27살"

단호한 그 대답에 나는 속으로 '일 년 늦게 태어 날 것이지...' 하고 푸념했다.
그러나 초린은 마음이 예뻤다.
일 년 젊게 봐준 턱이라며 쪼르르 달려가 양꼬치를 네 개씩이나 사들고 왔다.
나는 사람은 역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니깐! 이렇게 감탄하며 두 개를 먹었고
초린이 준 한 개를 또 먹었다.
초린이가 꼭 소원 성취하라며 친구로부터 받은 찜질방 표를 내밀 때 나는 부탁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난 그동안 공안에 쫒기며 사람이 무서웠었어요, 그래서 사람이 그리워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초린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힘내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대상이 기다리고 있어요."
"대상? 그게 뭐죠."

"음,,,뭐랄까. 한국에선 애인을 자기라고 부르잖아요. 우리 조선족은 대상이라고 해요"

이후 목욕을 하면서 나는 초린의 말에서 새롭게 안 대상의 의미에 피씩 웃었다.
뜻은 같은데 말이 다른 이국적인 여자를 직접 만난 그 시간이 믿기지 않을 만큼 새로워서였다.

나는 그날 씻고 또 씻었다.
몸이 깨끗해 질 기회가 다시 없을 것 같아 양꼬치 먹은 힘을 다해 때를 밀었다.
비누를 문댈 때 마다 친구생각이 났다.
나는 이렇게 더운 물에 목욕을 하는데 친구의 지금 상황은 어떨까.
광용에게 전화 할 돈도 남기지 않고 술을 사 먹은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니 몸은 깨끗해졌지만 대신 아프지 않나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온 몸이 나른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자게 됐는지. 그것도 한참을 생각해봐야 했다.
이어 초린이 생각이 났다. 참 고마운 애였지.
그런데 그 얼굴을 아무리 되새겨 보려 해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양꼬치만 보였다. 그때 내 옆에 누군가 서있는 것만 같았다.
누굴까? 나는 망설였다. 두만강을 넘은 후부터 내가 먼저 남을 쳐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지요? 어제 그 사람 맞지요?"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아니 글쎄 초린이가 아닌가.


"어떻게? 여기 어떻게 왔어요?"

나는 중국 땅에서 처음으로 지인을 우연히 만난 행운에 내가 한국말을,
그것도 북한 억양으로 소리치는 줄도 몰랐다.


"짜잔!"

초린은 폴싹 주저앉으며 플라스틱 통에 담겨진 흰 빵을 보여줬다.
나는 그때만큼은 진심으로 음식보다 사람이 더 반가웠다.


"어떻게 왔어요? 친구랑 같이 왔어요?"

"아니, 음식 줄려 왔어요. 어제 헤어질 때 사람이 그립다면서 더 있어달라고 말하던 게
자꾸 맘에 걸려서 분명 아침을 굶었겠구나, 이러면서 왔어요. 먹어요."

빵을 집어주는 그 손에 나는 무엇이든 주고 싶었다.
갑자기 공안이 가져간 내 외투안의 달러 생각이 났다.


"내가 어제 대상을 만나 자랑했어요. 이러이런 사람을 만났는데 이러이런 도움을 주었다고"

공상에 잠긴 듯한 초린의 표정이 무척 귀여웠다.


"대상이 뭐라고 해요? 중국 사람인가요?"

"네, 여기 한족이예요, 금방 뭘 물어봤죠? 아 참 내 대상이 뭐라고 했는지 그걸 물어봤죠?"

나는 그냥 웃었다.


"잘했다고 하던데요. 날 보고 착하다고 하면서 일요일 옷 사 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 착하죠?"

나는 둘 다 착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우리 대상도 김정일이 엄청 싫어해요.
아마 중국 사람들은 다 미워할걸요. 배 나온 게 싫어서. 조선은 다이어트 안 하죠?"

나는 마음씨도 말도 예쁜 초린에게 물이라도 떠주고 싶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벌써 그가 냉큼 일어나 물 컵을 두 개 들고 왔다.
그리고 허리를 굽히며 앉는데 옷 사이로 가슴굴곡이 살짝 보였다.
예쁜 그 속살은 도덕이요,
위선이요 하는 그 모든 겉 치례들을 부정하며 순수한 초린이 자체를 보여주는 듯싶었다.

"한국 언제 갈려고요?"

나는 아무에게라도 말하고 싶었던 고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설사 초린이가 그냥 사라진다고 해도 그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엇인가 얻는 것 같았다.
초린은 영리하기까지 했다.
광용에게 친구안부를 묻는 문제는 자기가 맡겠으니 한국 갈 큰돈을 해결할 논의나 하자고 하였다.

"돈 좀 벌만한 재간이 뭐가 있어요?"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할 줄 아는 것이 아무도 없었다.
중국에서 지금껏 잘한 짓이란 공안을 피해 달아난 것밖에 없었다.
한숨 끝에 피아노를 좀 친다고 말을 흘렸더니 초린이가 버릇인지 손뼉을 쳤다.


"피아노를 칠 줄 알아요?"

서울에서 내가 가끔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피아노를 치면
그들은 북한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를 치냐는 식으로 놀라군 한다.
마치도 북한은 음악도 없는 나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때도 초린은 피아노란 말에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어느 정도 치세요?"

"체르니 50번 정도"

초린이가 피아노를 전혀 몰랐다.
체르니 50번이라고해도 그 의미를 이해 못하기에 나는 연습과정을 한참이나 설명해주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초린은 자기 대상 조카가 한국인이 많이 오는 서탑에 사는데
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 용돈도 벌고 기회도 생길 것이라고 했다.
내가 감격에 두 주먹을 불끈 들어보이자,
초린은 손뼉 치며 응원해주었다.
출처= 작성자삥신새끼 님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