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에 따라서 1907년에서 1909년 전반기에 이르기까지 약 2년간은 전국적으로 의병투쟁 과정에서 가장 격렬한 투쟁이 전개된시기였다.
1907년에서 1909년까지 의병의 대(對) 일본군 전투횟수는 무려 약 2천 7백회나 되었고, 참가 의병들 숫자만해도 약 14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항일의병 투쟁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발했었는데, 특히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지방이 다른 여러 지방보다 전투 횟수나 항일 의병들 수가 압도적인 만큼 격렬하게 저항했었다.
1909년에는 전라남도 지방은 전체 교전회수의 31.5퍼센트일 정도로 의병전쟁이 격렬하였다.[1] 이에 일본 제국은 1909년 9월 1일부터 약 2개월동안 소위 '남한 폭도 대토벌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항일 의병이 가장 격렬한지역인 전라남도 지역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전라남도 지역에 항일 의병들을 진압했는데, 제1단계 작전은 전북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 광주, 영광 등으로 이어지는 외곽 지대, 제2단계는 고흥, 광주,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전라남도 서쪽 지방으로 탈출하는 항일 의병들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본 제국 군대는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로 잔학한 방법을 동원하여, 양민과 민가에 무참히 살육하고 방화하고 심지어 약탈 등을 일삼으면서 수많은 민간인,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이과정에서 항일 의병장들만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항일 의병장 전해산 등 23명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형장에서 순국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항일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경유하는 광양에서 하동까지의 도로작업에 강제노역 동원된 것이었다. 뒷날, 일본군들은 이 도로를 '폭도 도로'(暴徒 道路)라고 명명했다.[1]
모사이트에서 베충이들이 전라도지역 독립유공자 숫자갖고
개소릴 찌껄이고 있더군요...
적어도 전라도 지역은 항일 운동에 있어서는 선봉장이었습니다
선봉장이다 보니 가장 탄압도 많이 받았고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씨가 마르게 된 이유를 이 사료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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