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마지막 이야기
섬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를테면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을 나에게 종종 요구하곤 했다.
그것은 연희의 눈을 멀게한 독버섯이거나,
온몸에 원인불명의 발진을 일으키는 달콤한 나무열매,
혹은 먹는 순간 통제불능의 환각을 불러오는 괴상한 벌레를 앞에두고 벌어지는
일종의 작은 고민이었다.
그러나 내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에겐 아주 훌륭한 시음가가 있다.
"연희야 배 많이 고프지?"
"아냐... 난 괜찮아."
"이거 먹어봐. 맛있을거야. 얼른 먹어. 어서."
주저하는 기색을 내비치던 그녀는 내 끈질긴 권유, 혹은강압에 못이겨
커다랗고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난 시커먼 거미를 집어들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거미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묘한 표정으로 거미를 와작와작 씹어먹는 그녀를 보면서 난 알수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 변태적 가학행위 속에서 내 은밀한 사정은 몇번이나 반복되었고,
금기를 깰 때마다 밑구멍에서부터 밀려오는 오르가즘에 나는 환호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소리마. 연희 네가 없다면 나도 버티지 못할거야."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내가 먹이는 동,식물(혹은곤충)의 영향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희는 조금씩 변해갔다.
성격도 그렇지만 외형적으로도 이제 본래 그녀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처음엔 그녀의 뽀얀 피부가 흑갈색으로 바뀌더니 점점 피부에 각질이 생겼고,
그 다음엔 얼굴을 비롯한 온몸이 주름투성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변화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석아, 전에 네가 나한테 고백했을 때 기억나? 후훗, 사실 그 때 나 기뻤어."
내가 고백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 주제파악 그렇게 못하니?"
살아남기 위한 그녀의 노력은 처절할 정도였다.
정말 눈뜨고는 봐주기 힘들 정도로 안쓰러웠다.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내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긍정했고,
날 칭찬했으며, 그리고 날 사랑한다고 말했다.
하루는 옷을 모두 벗은채 나에게 안겨왔지만 추물스런 원주민들과 하등 다를바 없이 변해버린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오오, 처음보는 벌레군."
귀뚜라미를 닮았지만 그것보다 열배는 더 커보이는 벌레였다.
잽싸게 도망다니는 녀석을 잡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난 기어코 주먹만한 돌맹이로
녀석을 찍어죽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벌레의 뒷다리를 잡아들고 연희가 게걸스럽게 먹는 상상을 하자
벌써부터 아랫 도리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난 유쾌하게 웃었다.
그르르르르...
그와 동시에 한동안 듣지 못했던 낮익은 소리가 귓전을 후벼팠다.
평온하던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고,
감히 뒤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내 뒤로 다시한번 '그르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수십명의 원주민들이 예의 그몽둥이를 손에 쥔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끝장이라고 생각하며 난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곧 원주민들의 단단하고 끔찍스러운 몽둥이가 내 머리로 날아들고,
그럼 내 머리통은 산산히 부숴지겠지.
상상을 하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난 이 정적이 너무 오래 지속된다고 생각했다.
분명 눈을 뜨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눈을 뜨면 주저없이 내 머리통을 후려갈길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다가 하마터면 잠이 들뻔한 난
어쩌면 이 원주민들이 날 죽이는 것을 깜빡한 것은 아닐까란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죽이려고 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날 살려두진 않았을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최대한 티 안나게 실눈을 뜨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텅빈 숲속에서 난 혼자 서 있었다.
"늦었네."
얼굴이 온통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연희가 말했다.
내가 자신을 버리고 가버렸다는 상상으로 하루종일 고통에 시달렸을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난 들고온 귀뚜라미의 열배는 큰 벌레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벌레를 집어들고 와구와구 뜯어먹기 시작했다.
인간성과 동물적 본능이 공존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있자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연희야."
"쩝쩝... 응?"
"아냐, 아무것도."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낮이 익은 익숙한 소리, 한참을 생각한 끝에 난 그것이 뱃고동 소리와 닮아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연희에게 양해를 구할 새도 없이 난 미친듯이 동굴을 빠져나와 해안으로 달려갔다.
원주민들에 대한 공포도 그 순간 만큼은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살 수 있다.
이 빌어먹을 섬에서 빠져나갈 희망이 생긴 것이다.
멀리서 연희의 울부짖는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요. 여기."
노을이 지는 해안에서 배 한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미친듯이 손을 흔들어댔고, 환호성을 질렀다.
갑판위에 누군가가 날 발견한 듯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고 있었다.
이젠 살았다.
그리고 '타앙' 어깨에 타는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다시 '타앙' 허벅지를 불쏘시게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난 무릅을 꿇었다.
멀리서 보이는 갑판위의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
그리고 다시 '타앙'
난 흑갈색의 쭈글쭈글해진 내 손을 바라보며 천천히 의식을 잃었다...
[에필로그]
"네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그냥 단지 내 마음을 너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니까.
부담이 된다면 그냥 멀리서 지켜볼게. 내 마음이 정리될때 까지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해줘.
오랫동안 망설였어.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너에게 상처로 남게될까봐 두려웠거든.
사랑해. 연희야 난 널 사랑해."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싶지 않았다.
거절하면 어쩌지? 난 마치 사형선고를 받는 죄수의 심정으로 그녀의 입술을 주시했다.
만약 그녀가 날 받아들여 주기만 한다면 내 목숨도 내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난 아마 세상 최고로 행복한 남자가 될 것이다.
정말이지...
"너 주제파악 그렇게 못하니?"
시간이 멈췄다.
정적이 몰려왔고, 연희는 싸늘하게 나가버렸다.
난 금지된 마법으로 되살아난 시체처럼 흐느적 거리며 선상으로 나갔다.
그냥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밀려들었다.
연희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냐 아무것도."
식수가 떨어졌다.
가도가도 끝이보이지 않는 망망대해가 끈적끈적한 절망감이 되어 혓바닥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우린 어쩌면 며칠내로 폭풍우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러다가 섬을 발견하고, 그곳의 원주민들과 몇번의 원치않는 조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죽고 장님이 된 연희와 날 생각한다.
난 어쩌면 그녀에게 벌레를 먹이면서 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모든것은 가정이다.
한번쯤 그런 상상을 해본다.
바다는 넓다.
그리고 어디선가 날, 우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섬을 찾아 한번쯤 두리번 거려본다.
출처= hirurika 님
출처2 네이트판 바코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