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다음카페(하드론)님 -
간신히 눈물을 멈추고 나는 박형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죽었어요?"
"새벽에 살고 있던 아파트 15층에서 투신했어.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두의 얼굴을 본 거야.
초면치고는 너무 처참하게 만난거지.
현장에 가니까 머리가 깨져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고, 팔다리는 모두 부러져 제멋대로 꺾인 기이한 자세를 만들고 있는 시체가 있더라구.
처음엔 그 얼굴의 주인공이 마두인지조차 몰랐지.
전에 본 적이 없으니 말야.
사건을 조사하면서 우리 서와 내 번호가 찍힌 그 놈의 휴대폰 통화 내역을 보고 알게 된거지.
휴대폰 통화내역은 정말 중요한 정보였어.
수없이 많은 번호들을 우리는 일일이 다 조회를 했지.
그런데 몇 개의 떨거지 놈들의 번호를 빼 놓고는 모두 엉뚱한 주인을 가진 대포폰이었어.
마두의 것도 마찬가지였고...
아무리 불법을 일삼는 조폭이래도 거의 모두가 대포폰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야.
뭔가 철저히 지켜야 할 비밀이 있는거지.
어찌 되었든 우리에게 정보를 넘기겠다는 사람이 죽었으니 우리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철저히 수사를 했지.
족적, 지문, 머리카락, 아파트 출입구와 엘리베이터의 CCTV...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분석하고 조사했지.
마두의 죽음으로 우리는 뭔가를 캐낼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사건을 계기로 수사팀은 그 조직의 근거지를 얼마 동안 출입할 수 있었거든.
모두들 입을 열기를 꺼려하고, 많은 부분에서 제한되긴 했지만 어느 정도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지.
그런데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조직과의 연관성은 커녕 타살의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어.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CCTV는 그 어떤 침입의 흔적도 보여주지 못했어.
족적이나 지문은 모두 마두의 것이었고....
타살 흔적 하나 잡지 못한 채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자살로 종결되었지."
박형사는 긴 한숨을 한 번 내 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나 형사의 직감이라는게 있어.
물증은 없었지만 타살이라는 심증을 버릴 수가 없었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에 마두가 한 말이 있었어.
그 자식이 나를 죽일거라는 거야.
무엇을 감추는지 '그 자식'의 정체를 말하지 않는거야.
게다가 처음 새벽에 그를 발견한 경비원 목격담도 우리의 심증을 뒷받침 해줬지."
나는 박형사를 등지고 옆으로 누운 채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쳤다.
"새벽 순찰 중에 싸우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 그 쪽으로 달려갔는데, 한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면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는거야.
자살을 결심한 사람은 비명을 안 질러.
마두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떠밀린거야.
싸우는 듯한 고함소리는 또 뭐야?
분명히 뭔 가가 있다고 확신이 섰어.
그런데 이상한 건 목소리의 종류는 한 가지 뿐이었다고 경비원이 말한 부분이야.
뭐 귀신 놀이도 아니고, 미친 것도 아니.."
"누가 죽였는지 알아요."
갑작스런 나의 나즈막한 목소리에 박형사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뭐라 그랬냐?"
"마두라는 사람 누가 죽였는지 알고 있다구요."
박형사는 나의 팔뚝을 잡아당겨 돌아 누운 나를 바로잡았다.
"너 지금 그 말 사실이야?"
흥분한 듯한 박형사의 눈빛이 느껴졌다.
"누구야?"
"어제 그 놈들을 죽인 놈이예요."
"그럼 어제 그 놈들이 지들끼리 치고 받은 게 아니었어? 외부 침입 흔적이 전혀 없던데...
족적이나 지문도 그 놈들 것 밖에 없었고..."
"누군지 모르는데, 사람이 아니었어요."
"뭐?"
나는 길게 심호흡을 한 뒤 긴 얘기를 꺼냈다.
"어제 형사님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던 중 그 쪽지의 번호로 전화를 했어요...."
나는 어제 오후부터 지금 이 병원에서 눈을 뜰 때까지 기억하고 있던 일을 박형사에게 낱낱이 얘기했다.
내가 말을 하고 있는 동안 박형사는 한 번도 나의 말을 끊지 않았다.
아니 끊을 수가 없었다.
말하는 나도 황당무계한 소리로 들리는데 박형사는 오죽하겠는가?
멍하니 넋을 놓고 들을 뿐이었다.
"...그 쪽지에 적인 글씨체가 제 것이잖아요.
저는 글씨를 쓴 기억도 없고, 그 내용이 뭔지도 몰라요.
어떻게 보면 저도 그 놈한테 당한거죠.
귀신에 홀린 거예요."
내 얘기가 끝났음에도 박형사는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나 또한 박형사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너...진짜로 귀신 볼 줄 아나보다....."
한 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박형사가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는 말을 내뱉았다.
"제 예감이 틀리길 바라지만, 왠지 이 걸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아요."
박형사는 무거운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얘기하자.
조금 전에 의사가 너 다친 게 아니라 잠이 든거라고 하더라.
퇴원해도 된다는 얘기지. 원하면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그냥 버스타고 갈게요. 사람 많은 게 좋아요.
요즘은 사람하고 같이 있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새삼 깨닫고 있어요."
"그래. 알았다. 나중에 보자."
박형사가 나간 뒤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들이 있기를 바랬지만 버스 안에는 빈자리가 여러 군데 보였다.
창가 자리에 앉은 나는 오후의 나른한 햇살을 즐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데, 그 생각의 종류가 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텅빈 느낌이었다.
왜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지, 어쩌다가 이런 이유 모를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지금 단 한가지 나의 바램은 이 악몽같은 사건의 고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낮은 고도로 떠 있는 태양 빛이 내 두 눈을 비추고 있었다.
노란빛 광원 속에 붉은빛이 간간히 섞여 아른거렸다.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는 것처럼 몸이 나른해졌다.
졸음 때문인지, 너무나 밝은 눈부심 때문인지 주변 사물이 흐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긴 것처럼...
주변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손자를 데리고 탄 허름한 차림의 할아버지였다.
5살 정도로 보이는 하얀 빵모자를 쓴 그 꼬마는 너무나도 귀엽고 천진난만해 보였다.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노인의 앞에 서서, 꼬마는 연신 그의 손등을 두드리며 장난질을 해댔다.
손자의 귀여운 장난에도 할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꼬마가 나를 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 또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귀여운 손주였네요."
나의 과거형이 섞인 말에 노인이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놀았던게 가장 재미있었대요."
계속 나를 응시하던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리고는 이내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항상 할아버지와 같이 다닐거래요.
놀이터도 가고, 공원도 가고,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나는 아이의 말을 그 노인에게 계속 전달해 주었다.
아이는 입을 열지 않고 눈 빛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만득? 만득이? 응..그래 만득이 아저씨네 가게 가서 물고기 구경하는 게 젤 재밌대요. 거기 가자는데요?"
나의 말에 갑자기 노인은 두 손을 꾹 움켜쥐고 닭똥같은 눈물을 떨구었다.
할아버지의 울먹임에 손주 또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할아버지...손주가 울지 말래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쥐어짜 듯 연신 눈물을 쏟아냈다.
이젠 그냥 봐도 사람과 혼령을 알아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얀 빵모자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민머리는 꼬마가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고맙네...젊은이...."
연신 눈물을 훔치던 노인은 조용히 웃옷 주머니에서 상표가 떨어져 나간 갈색 드링크제 병을 꺼내 들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느즈막하게 결혼 한 아들 놈 부부가 그 핏덩이를 남기고 사고로 죽었다오....
혈육이라고는 그 핏덩이 하나 남았었는데...몇 년 뒤 그 놈마저 몹쓸 병에 걸려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었다오.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큭큭큭..자식 새끼 다 보내고 이 늙은이가 살아서 뭐하겠소?..큭큭"
"할아버지...그래서 죽으려고 하신 거예요?"
나의 물음에 노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귀여운 손주가 할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지켜주고 있는데....할아버지 그러시면 안되요."
할아버지...이 손 잡으세요. 이게 할아버지 손주의 손이예요."
나는 꼬마의 손을 집어들어 할아버지의 손바닥에 다소곳이 올려 놓았다.
노인은 내 손을 몇 번 어루만지더고 무엇인가 느껴지는지 한 손에 빈 공간을 만들어 손가락을 오무렸다.
그리고는 입에 힘을 주어 굳게 다문 채, 또 다시 진한 눈물을 몇 번 쏟아냈다.
몇 번에 걸친 나의 위로에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고맙네. 젊은이..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고맙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네..."
다른 이가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노인은 손주가 서 있을 자리를 내려다보며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노인의 손을 잡고 있던 꼬마가 나를 뒤돌아 보고는, 또 한 번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는 버스에서 내려 멀어져가는 그들을 계속 지켜보았다.
"잘 지내렴.."
귀신도 종류가 있구나.
저런 귀신만 만나면 좋으련만...
이젠 나의 이런 능력을 내 스스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 때 내 휴대폰의 요란한 진동음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나 박형사야."
"예...왜요?"
"너 나하고 이번 사건조사 한 번 할래?"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나도 이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고 싶었다.
그리고 경찰하고 같이 있는 것이 좀 더 안전한 것이 아닌가?
"제가 꼭 필요한가요?"
"사실은 니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니 능력이 필요해"
"좋아요!! 하겠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