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하드론)님 -
"거짓말...?"
그의 손떨림으로 인해 소총의 끝에 단단히 고정된 시퍼런 대검이 내 목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어느 새 내 주위로 수많은 어둠의 그림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새끼...우리에게 거짓말을 해? 죽여버리겠어."
그 순간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병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잠깐..."
나는 잠시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이봐, 친구..자네..뭔가 알고 있지?"
"......"
숟가락 병사는 쪼그려 앉아 나에게 묻고 있었지만, 얼굴이 으깨진 병사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하지 못한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그렇지?"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도 그는 요란스런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양 입가에서는 여전히 진득한 국물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물음에 유언처럼 처절하고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네..."
잠시 그 둘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그게 뭐지?"
"다...당신들은...."
나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죽었어요."
요란스럽던 그의 숟가락질이 멈추었다. 갑자기 지옥같은 적막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죽었어요. 죽은 귀신들이예요."
숟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잠시 적막을 깨뜨렸다.
"뭐...뭐...이.신발 뭔 소리 하는거야?"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 붙였다.
"당신들은 죽은 줄도 모르고 이 곳을 떠돌고 있는겁니다. 전쟁은 끝났어요.....아주 오래 전에"
"우...우리가 주..죽었다구?
숟가락을 떨어뜨린 병사가 잠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피...피!!!"
내게 대검을 겨누던 병사도 자신의 허전한 한 쪽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여기 저기서 자신의 형체, 그리고 다른 이의 형체를 확인한 병사들의 절규가 지옥의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비규환의 세상처럼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떤 병사는 분수처럼 피를 쏟는 팔이 사라진 자리를 틀어잡으며, 어떤 병사는 쏟아져 내린 자신의 내장을 쓸어담으며,
어떤 병사는 밑동이가 사라진 상체만 바닥에 대고는 두 손으로 연신 바닥을 긁어대고 있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들의 몸부림은 불타오르는 지옥의 세상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낼 기세였다.
참혹한 비명소리와 절규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차마 그들의 처절하고 고통스런 몸부림을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의 절규를 멈추게 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소리였다. 그리고 총소리, 대포소리......그리고 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칠흑같은 어둠이 주변을 덮고 있음에도 그들은 그 어느 조명보다 뚜렸한 영상으로 보였다.
전투 중이었다. 여기저기 포탄이 터지고, 수류탄 폭음이 귀청을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장검의 소리처럼 공간을 뚫고 지나가는 총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함성소리, 울부짖음....비명소리. 이것만이 포화가 쏟아지는 그 전장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후 그 지옥같던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그러나 그 영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들 잠든 듯한 새벽 같았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 여기 저기 작은 천막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간간히 초병만이 주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 초병은 잠시 배가 고픈지 자리에 앉아 반합통 속의 원가를 열심히 퍼올려 입에 우겨넣었다.
그 때였다.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 듯 싶더니....
"콰콰쾅!!!"
천둥같은 폭음이 그 천막 위로 쏟아졌다. 여기저기에서 수 십여개의 불기둥들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 불기둥 속에 정체를 알 수없는 덩어리들이 파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라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소름끼치는 적막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자신의 존재를 깨달은 듯한 병사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어디선가 작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연못에 던져진 돌맹이가 일으킨 파문처럼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심지어 목이 메이도록 울음을 터뜨리는 병사도 있었다.
"우리를 가지고 놀았어...."
얼굴이 으깨진 병사가 잠시 울먹이는 듯 싶더니 고개를 돌려 내게 입을 열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으깨진 얼굴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른 많은 병사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우리하고 약속을 한거지..."
나는 그에게 아무런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죽어버려"
그는 천천히 소총을 들어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나를 향해 그 대검을 날렸다.
"잠깐!!"
누군가가 그의 날아오는 소총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미 심장마비로 죽을 것 만 같았다.
"망자가 살아있는 이를 건드리면 안됩니다."
정한수였다.
"당신들이 아무 죄없는 이 사람을 죽인다면 영원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누가 더 많은 힘을 주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소총 끝의 대검이 힘에 겨운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이대로 우리를 내버려두지 그랬어..."
대검을 겨눈 그 병사의 반쪽 남은 눈빛은 여전히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신들이 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잖아요. 그렇다면 죽어서도 지켜주는 것이 도리 아닌가요?
집에 돌아갈 수는 없지만,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모두 알았잖아요."
정한수의 말에 그의 남은 반쪽 얼굴에서 작은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소총의 대검은 여전히 내 목을 겨누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어느 병사의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뜬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의 말처럼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니...그들이 빛을 느끼고 있었다.
"해가 뜨고 있어.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환호성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눈부심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빛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보였다. 너무나도 밝고 너무나고 맑은 빛이 너무나도 빠르게 떠올라 주변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러자 지옥 속의 악마같던 그들의 형상이 서서히 온전했던 이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자신과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엄청난 눈부심이 있음에도 그들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빛을 즐기며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그 빛을 바라보던 정한수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저 빛을 오래 전에 봤답니다. 단지 자신이 죽을 줄 몰랐거나 떠나고자 하지 않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죠."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답했다.
"고..고맙습니다."
그는 잠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한수씨. 전할 말이 있어요."
"네?"
"어머니가....당신 어머니가 이승에서나마 부모 자식으로 만나줘서 고마웠다고 말씀 전해달래요...."
나의 말에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살아달랍니다...."
정한수는 이내 눈물을 떨구더니 얼굴로 시체처럼 힘없이 길게 늘어진 내 손을 꼭 쥐었다.
쏟아져 나올 피가 다 나온건지 이젠 오른쪽 목부위의 통증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나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정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이봐요. 정한수씨. 물어볼 게 있어요."
"뭔가요?"
"조금 전 당신이 쫓아냈던 그 사람...김병장한테서 쫓아냈던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구예요?"
"몰라요. 모르는 사람이예요. 명찰에 김선호라고 적혀 있었어요. 수시로 그 사람이 김병장의 몸에 들락거린 것 같아요."
"그...그랬었군요..."
"처음엔 이 부대를 저기 있는 군인들로부터 지키려고 했어요.
변변한 비석하나 없이 쓰레기 매몰하듯이 묻힌 자리에서 그들이 쏟아져 나왔을 때, 처음엔 가까이 가서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저는 피해만 다녔어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단지 길을 잃은 것 뿐이었어요. 자신들이 죽은 줄 몰랐던거죠.
정작 김병장의 몸에 붙었던 사람은 다른 이었는데 저는 몰랐던거죠.
저 병사들이 나를 찾아서 말을 걸게끔 해주고, 그들의 정체를 일깨워준 사람은 당신이예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나처럼 쓰러져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누워있는 김병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김병장님은 괜찮은 건가요?"
"몰라요. 그런데 일단 그 혼령은 사라졌어요. 우리들과 함게 하려는 것 같지가 않아요."
그의 말을 듣자 끝나지 않을 듯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김병장님....."
나는 시체처럼 누워있는 김병장을 힘겹게 불렀다. 그리고 정말로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고..고양이를 왜 죽이는 겁니까?"
그가 듣고 있는 지의 여부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냥 지금이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절대로 입을 열 것 같지 않던 무표정한 얼굴의 김병장이 눈을 감은 채 죽어가는 작은 숨소리로 내게 입을 열었다.
"고양이가...."
"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김병장은 알 수없는 말을 뱉은 후 힘이 빠지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신발..이젠 허기가 가시네."
숟가락질에 목숨걸던 그 병사가 뭐라고 투덜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핏줄기가 얼굴에서 사라지자 그제서야 그의 본얼굴이 드러났다.
"아..아저씨..좀 웃기게 생기셨네요. 큭큭"
"뭐야? 하하하"
그리고 내게 대검을 겨누던 그 병사도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굵고 낮은 음성을 다시 한번 내게 들려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가 죽은 줄 알게 해주었으니..."
그의 온전한 외모는 그 목소리만큼이나 출중하고 번듯했다.
숟가락질 병사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부탁의 말을 건넸다.
"이봐 친구..자네가 지키지 못한 약속....다른 걸로 대체하면 안될까?"
"깨어났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광경이 이 곳이 의무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잠시 얘기를 나누던 군의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또 만나는구만. 이창훈 일병."
전상병과의 사건 때 나를 담당했던 군의관이었다.
"내가 이런데 다신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어지간히 부대에서 말썽장이인가 보군."
나는 연신 주변을 살피며 지난 밤 그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만 하루가 지나서 깨어난거야. 자넨 정말로 운도 좋구만.
전에는 총을 맞고 살아나고, 지금은 칼을 맞고 살아나고..이건 뭐 터미네이터도 아니고..하여튼 자넨 불사신이야."
그제서야 나는 오른쪽 목부위의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출혈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바로 저승으로 가는거였어... 통합병원으로 이송할까 했는데, 워낙 급해서 내가 바로 조치한거야."
"고...고맙습니다. 군의관님."
"조금 있다가 헌병대에서 수사관이 올거야. 니가 움직이기에는 불편한 것 같아서 내가 이리로 오라고 말해뒀어."
나는 그의 말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에 나타난 수사관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작은 서류를 꺼내들었다.
"이번 사건 정리되면 전출 명령 떨어질 것 같다. 전대웅하고 김창식이는 형기 채워도 니네 부대로 다신 못돌아가."
난 그제서야 김병장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김..김창식 병장...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가해자 신분으로 헌병대에 수감되어 있어."
"몸은 괜찮습니까?"
"쨔식...니 걱정이나 해. 김창식은 괜찮아. 너희 두 놈 다 취사장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됐어.
그런데 너도 참 대단하다. 고참들을 두 명이나 헌병대에 처넣어버렸으니.."
수사관은 잠시 사진이 박힌 서류를 몇 장 넘기더니 놀라는 듯 말을 이었다.
"어휴...김창식 이 미친 놈은 무슨 고양이를 그렇게 아작내 버린거냐? 이거 정신병 있는 것 맞지?"
"......"
"말해봐. 사건 당일 밤 취사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마냥 수사관의 진지한 눈빛만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자들의 이야기만 빼 놓은 채 나는 모든 것을 수사관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니가 김병장한테 고양이를 왜 죽이냐고 하니까 김병장이 너한테 칼을 던지며 덤볐단 말이지?
그리고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의식을 잃어버렸고....."
"네..그렇습니다."
수사관은 볼펜을 이마에 몇 번 튕기더니 입을 열었다.
"니네 부대는 무슨 귀신 씌었냐? 아님 니가 귀신이냐? 애들이 왜 갑자기 니 앞에서만 미친 짓을 하는거냐?"
머릿속에서는 '네'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전대웅, 김창식....그리고 최병희...얘들 공수여단에서 사병생활하다가 전입한 병사들인데, 둘은 헌병대에 가 있고...."
곰곰히 생각에 빠져 있던 수사관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좀 더 조사해 볼건데, 너도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줘. 어차피 넌 헌병대에서 조사 끝날때까지 아무데도 못나가.
이번에 포상휴가 계획돼 있던데, 그것도 미뤄지는거다. 알겠냐?"
나는 묵언의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을 말없이 병실의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마치 긴 잠에 들어 꾸는 꿈처럼 느껴졌다.
"아오!!!!!!!! 이 쉽새!!"
병실에 울려퍼지는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다시 한번 깨웠다. 선임하사였다.
선임하사는 무슨 일을 내러 온 사람처럼 모자를 손에 움켜쥐고는 연신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것같다. 지금 부대 난리났다. 시방새야."
선임하사의 속사포같은 투덜거림에 나는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웃어? 시방새..니 때문에 지금 헌병대, 기무대 총 출동해서 총기검열, 보안검열, 근무지검열, 구타검열..아주 생쑈를 하고 있다니까. 니 단초 세운거 걸리는 날에는 나도 불려가서 조카 욕처먹는거야. 징계받을지도 몰라 쨔샤!!
저번엔 총맞고, 지금은 칼맞고, 다음엔 수류탄이라도 까서 똥구녕에 처넣을래? 하여튼 그 때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큭큭..웃기지 마세요 선임하사님....목아파요..."
"아...이런럴. 니 뒤졌으면 나 영창가는거야."
"그래서 살아있잖아요."
"저 놈의 주둥아리는 살아가지고는....쯧쯧
그런데 김창식이 이 새끼는 고양이고 사람이고 왜 칼질을 해가지고는...그나저나 몸은 괜찮냐?"
"예. 근데 병문안 오신 겁니까?"
"내가 뭘 볼게 있다고 병문안을 오냐? 총들고 오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어!!"
"그런데 무슨 일로?"
"웬 아줌마가 니한테 말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
"예? 무슨 말... 말입니까?"
"아들을 봤으면 이제 부적을 태워버리란다. 그리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거란다.
그러고보니까 니...그 아줌마 얘기 듣고 나한테 단초 세워달라고 한거였지?"
"반은 맞는 얘기입니다."
"뭐? 도대체 그 아줌마가 누군데?"
"주..죽은 정한수라는 사람의 어머니입니다. 무당입니다."
선임하사는 놀라는 듯 마지막 말을 간신히 내뱉았다.
"아....신발...그래서 니가 그 부적들고 귀신놀이 하러 간다고 한거구나. 소름끼친다. 더 이상 안 물어볼게."
하루가 더 지나서야 나는 의무대를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복장을 갖추고 있는 와중에 의무병이 몇가지 나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챙겨 준 작은 주머니 안에서 부적을 찾았다.
그리고 의무대가 조금 멀어졌음을 확인한 나는 준비한 라이터를 이용해서 그 부적에 불을 붙였다.
회색빛의 벗꽃잎이 날리 듯 작은 흔적들이 바람을 타고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로부터 멀어져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등뒤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창훈 일병!! 빼놓은게 있네요."
소지품을 챙겨주던 의무병이었다. 그는 손에 든 무언가를 나에게 내밀었다.
"너무 낡고 헤진거라서 버리려고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그가 건네 준 작은 수첩을 쥐어들었다.
그 안에는 알 수없는 이름과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어린 아이가 쓴 어지럽고 불규칙한 글씨 같았지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힘겹게 써 넣은 나의 필체였다.
그 필체와 함께 잠시 잊혀졌던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은 김우식, 경상북도 의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소. 우리 부모님하고 공부 잘하던 동생 우철이한테 안부 전해주소."
"내 이름은 최국봉이오. 전라남도 장성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고요. 살아 계실랑가 모른디 우리 엄니한테 죄송하다고 전해주시오.
거시기..그 때 우리 집 소 도망간 게 아니라 제가 팔아 먹었다고 말이오."
"이름은 우기철, 충청북도 괴산군 xx면 xx리 xx번지에 살았수. 우리 아들 진석이 잘 키워줬으리라 믿는다고 아내에게 전해주소."
"내 이름은 박정국입네다. 평안북도 연변군 xx면 xx리 xx번지. 통일되면 꼭 찾아서 안부 전해주드라요. 우리 가족들 안내려왔으면 다들 북에 있음매.."
..............
십수명의 부탁이 빼곡히 적인 글을 천천히 읽어보며, 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는데 상당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느꼈다.
"끼이익!!"
발걸음을 옮기려하자 자동차의 거친 제동소리가 내 앞에 멈춰섰다.
"부대 복귀하는가 보군"
헌병대 수사관이 지프차 조수석에 앉아 내게 말을 걸었다.
"네. 그렇습니다."
"차에 타. 안 그래도 니네 부대 가는 길인데."
내가 차에 올라타자 수사관은 내게 어떤 사실을 더 캐내고자 하는지 그간 조사한 몇 가지 사실들을 내게 털어놓았다.
"김창식, 이 자식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당최 수사의 진전이 없다. 너 내일이라도 헌병대에 들러야겠다.
전대웅, 김창식, 최병희 모두 같은 부대에 있었더구만. 게다가 살인사건에 연루돼 있었구.
피살자가 김선호 아마 범인이 한동철이라고 했지?"
수 분동안 그의 말이 이어졌지만 대부분은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얘기가 깊어지자 수사관은 점점 내가 알 지 못했던 사실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동철이가 감옥에서 자살을 했더라는군."
"네? 자..자살 말입니까?"
"김선호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교도소 안에서도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더라는거야.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간수들 판초우의를 뺏아 그 속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자기 어깨를 칼로 찌르는 시늉도 하더란 말이다.
게다가 벽이고 바닥이고 김선호라는 이름으로 도배를하고, 심지어 자기 옷과 명찰에도 김선호로 도배를 했다더군.
자해를 할까봐 교도소에서도 틀별관리를 했었는데 결국 교도소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외부활동 시간에 간수들 몰래 자살을 한거야.
그런데 그냥 목매달아 죽을 것이지 김선호처럼 똑같이 어깨에 칼을 꽂아 죽었다는군. 벌 받은건지도 몰라. 죄짓고는 못살지."
수사관의 말이 이어지는 와중에 저 멀리 나의 부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알 수 없는 공포감이 함께 몰려왔다.
"수..수사관님..자..잠깐 차 좀 세워주십시오."
"왜?"
"가..가슴이 답답해서 말입니다. 멀미가 몰려옵니다."
"이런...저 번에 생긴 총상 때문인가? 알았어. 야. 운전병 차 세워"
나는 잠시 차에서 내려 숨을 고르며 수사관에게 물었다.
"호..혹시...한동철이란 사람...고양이 알러지 있지 않았습니까?"
나의 물음에 수사관은 놀라는 듯이 답했다.
"헐..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냐? 그 알러지 때문에 교도소를 지나다니던 고양이를 죽인 적도 있다더군."
힘없이 바닥에 누워서 내게 털어놓던 김병장의 말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고...고양이가 나..나타나면 기..기침소리가 들려...그..그리고 죽여...]
그리고 초소에서 처음으로 전상병과 몸싸움을 할 때........어깨에 피를 흘리며 김선호라는 명찰을 달고 있던 그 병사....
"이럴 수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본 것은 김선호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김선호는 우리 부대에 없었다. 갑자기 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우에엑!!"
"이봐..이창훈 너 괜찮아?"
토를 하는 와중에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읊조리던 김병장의 말이 떠올랐다.
[애초부터 우린....같이 이 곳에 오질 말아야 했어....아니면...이 곳을 우리만의 부대로 만드는거야. 우린 영원히 함께 하는거지...
아무리 니가 나를 멀리하려 해도 절대로 넌 벗어날 수가 없어....]
토악질 때문인지 공포심 때문이지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부대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나와서 나를 반겼다.
최병희 병장이었다.
나는 그에게 예를 갖출 틈도 없이 그저 멍하니 그를 쳐다 봤다.
평소 미친개라 불리던 최병장이 알 수없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