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웃대(하드론)님 -
"나와 김창식 병장, 그리고 최병희 병장은 OO공수여단에서 사병으로 근무했어."
"..선임하사에게 얘기 들었습니다."
"그래...알고 있었군. 원래 공수여단은 부사관으로 꾸려지지만, 전산이나 행정같은 업무는 주로 사병들이 맡아.
그런데 TO가 다 차면 전입한 사병들도 어쩔 수 없이 부사관들과 훈련을 같이 받지.
*** TO(티오) : TO는 table of organization의 약자로서 정원(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을 뜻한다.***
우리 세 명은 TO가 차는 바람에 모두 부사관들과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하며 훈련을 받았던 거야.
그 와중에 김창식 병장이 낙하산 강하훈련 중에 허리와 골반을 다쳤어.
얼마 뒤 김창식 병장은 취사반에 배정 받아서 그 때부터 취사일을 배우게 된거야.
그 부대엔 최병희 병장보다 고참인 한동철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칼을 엄청나게 잘 다루는 사람이었어.
김창식 병장도 그 사람한테 칼질을 배운거야.
굉장히 우직하고, 말이 없는 성격이었어. 훈련이고 뭐고 맡겨진 일은 철두철미하게 수행했지.
그래서 간부들이 항상 부사관들 못지 않다며 항상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었어.
게다가 우리들에게도 훈련비법 같은 것을 항상 전수해 주며 부사관들보다 뒤쳐지지 않도록 도와줬어.
사병들이 훈련에서 부사관들보다 뒤쳐지는 것을 한동철은 죽기보다 싫어했지.
그런데 문제는.........한동철이란 그 사람은 조울증인지 뭔지 알 수없는 정신병 같은게 있었어.
한 번 머리가 돌아버리면 습관적으로 칼을 던져. 지금의 김병장이 하는 것처럼 말야.
그런데 김병장도 따라할 수 없는 더 섬찟한 것은 사람을 세워놓고 칼을 던지기도 한다는거야.
서커스에서 사람 세워놓고 빈 자리에 칼을 던져서 맞추는 것처럼 말야.
그럴 때는 미친 놈이 따로 없었어. 나는 졸병이어서 당한 적이 없었는데 김창식 병장과 최병희 병장은 많이 당한 것 같았어.
너도 알다시피 김창식과 최병희도 보통 성격이 아니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동철 앞에서는 꼬리내린 강아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한동철한테
길들여졌었는지 알 수 있었지.
나도 언제 당할 지 몰랐어.
너무나 무서웠던 나는 부사관이나 부대 간부들에게 이 사실을 말할까도 했지만, 솔직히 한동철을 처벌하기도 전에
한동철의 대검을 먼저 맞을 것 같았어.
조금만 버티면 됐었어. 6개월만 버티면 그 놈은 제대하거든...
그런게 그렇게 좋으면 부사관으로 지원해서 빡세게 군대생활 하든지 그랬어야 하는데, 자기는 재수가 없어서 이런데
배치 받았다며 늘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지.
게다가 한동철은 부사관들을 너무 싫어했어.
자기보다 나이 어린 하사가 계급이 높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걸 굉장히 혐오스러워 했지.
늘 어떤 아무개..아무개 놈들을 내 손으로 죽여버릴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곤 했어.
그래서 한동철은 부사관들에게 지지않기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훈련을 받았는지도 몰라.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한동철은 학력 컴플렉스까지 있었어.
대학물을 먹은 나같은 애들을 쓸데없이 갈구기도 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나는 처음 듣는 괴담같은 얘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니가 말한 김선호...김선호라는 신입병이 들어왔는데, 이 자식도 TO가 차는 바람에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하게 된거지.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 김선호는 내무반 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녀석이었어.
덩치도 크고, 우람했지만 친구도 없어서 하루종일 pc방에서 게임을 하든가, 아니면 프라모델 장난감이나 혼자 조립하고 있을
그런 어리숙하고 착하게 생긴 계집애 같은 성격의 녀석이었지. 목소리도 여자 같아서 부사관들이 항상 '우리 선숙이..선숙이..'
이러면서 엉덩이를 툭툭 치며 여자처럼 대하기도 했어.
낙하산 강하, 천리 행군, 생존 훈련....김선호는 도저히 이런 것들과 어울리지 않을만큼 체력적으로도 약했어.
간단한 구보만 해도 뒤쳐지기 일쑤였어. 늘 부사관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지.
부사관들의 놀림거리가 된 그런 김선호를 한동철은 너무나도 싫어했어.
게다가 김선호는 한동철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인 유명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거든.
어쩌다 그런 녀석이 공수부대에 오게 되었는지 당최 알 수 없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여단본부 전산 특기병으로 오게 된거야.
그런데 TO가 다 차서 당분간만 내무반 생활을 같이 하게 되었던거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지상공수훈련이 있었던 날이였어.
부사관들과 내무반 소속 사병들은 단 한명의 열외도 없이 막타워에서 줄을 메고 강하훈련을 하고 있었지.
그런데 김선호 차례가 된거야.
어땠겠냐? 응?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난리가 난거야. 막타워 점프대 입구에서 울고불고...
김선호 입장에서는 줄 하나에 목숨을 맡기고 막타워에서 뛰어내린다는게 얼마나 공포스러웠겠냐?
말도 마라. 조교들은 정신봉이란 죽도를 들고 다니거든?
훈련에서 뒤쳐지거나 지시에 잘 따르지 않으면 그 죽도로 사정없이 내려쳐.
물론 외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지. 그냥 정신차리라는 신호 중의 하나야.
김선호는 조교가 죽도를 미친듯이 내리쳐도 뛰어내리지 않는거야.
점프대 아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부사관들은 배꼽을 잡으며 다들 뒤집어졌지.
어떤 부사관들은 '선숙이'를 외치며 환호를 보내기도 했어.
그런데 거기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동철도 있었어.
결국 조교가 발로 차버리면서 김선호는 계집애 같은 비명소리와 함께 그 날 막타워 훈련을 마치게 될 수 있었지.
저녁이 되자 한동철이 사병들을 집합시켰어.
그 날도 대검을 들고 말이야. 우리는 10분이 넘도록 얼차려를 받았어.
나와 김창식 병장, 최병희 병장은 우습게 끝낼 수 있는 정도였는데 김선호가 문제였어.
푸시업 10개도 제대로 못하는 거야. 한동철이 그랬지. 죽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라고...
그런데 김선호가 그런거야.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한동철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어.
신병이 하늘같은 고참한테, 그것도 제대를 몇 개월 남기지도 않은 병장한테, 그것도 정신병자 같은 한동철한테....
그런 말을 했으니 그걸 듣고 있던 우리 심정이 어땠겠냐?
한동철은 한 동안 할 말을 잃고는 김선호를 내려다 봤어.
한동철은 김선호의 머리를 대검으로 톡톡 치며 김선호를 일어나라고 명령했지. 그리고 벽에 기대고 세워져 있는 합판 앞에
서라는거야.
그 때 말렸어야 했어...흑흑.."
전상병은 입술을 깨물며 갑자기 눈물을 쏟아냈다.
"........"
나는 말없이 측은한 표정으로 어린 아이처럼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는 전상병을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김선호는 병신같이 멀뚱멀뚱 서 있다가 몇 대 처맞고 그 앞에 선거야.
한동철은 김선호에게 눈감고 가만히 서 있으라고 했지. 그런데 사람이 어디 그러냐?
무슨 일인지 궁금하니까 김선호는 눈을 감은 척 하더니 실눈으로 한동철의 행동을 본 거야.
칼을 던지는 모습.....본능적으로 김선호는 몸을 돌리며 옆으로 수그렸어.
그런데 한동철의 손을 떠난 대검이 목표를 잃어버린 채 김선호의 왼쪽 어깨에 꽂혔버린거야.
난 처음으로 사람의 몸에서 심장박동에 맞춰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것을 보았어. 동맥이 끊어진거야.
늦었지만....너무나도 늦었지만...그제서야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한동철에게 달려 들었지."
전상병은 그 때 상황이 아직도 생생한지 깍지 낀 두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전상병에게 물었다.
"김선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어."
그랬다. 내가 근무지에서 전상병과 뒤엉킨 날 나는 김선호를 보았던 것이다. 갑자기 등골을 따라 한기가 내려앉았다.
"한동철은 군교도소에 수감됐어. 징역을 사는 기간이 몇 개월인지 몇 년인지 우리는 관심이 없었어.
우리가 제대하는 동안만 다시 돌아오지 않길 바랬지.
남은 우리는 김선호가 죽던 그 현장에서의 기억 때문에 미칠 것 같았어.
한동철의 살인 행각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았지.
불면증은 물론이고, 우울증까지 걸릴 것 같았어.
어느 날 나는 휴가를 나와 부모님께 이러한 사실을 말했어.
그랬더니 아버지 말씀이 먼 친척 중에 보병부대 사단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거야.
나는 아버지께 사정했지. 그 분한테 말을 해서 제발 부대를 옮기게 해달라고.....
그리고 난 부대에 돌아왔어. 그런데 또 다른 이상한 상황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거야."
"무슨 상황 말입니까?"
"김창식 병장이 이상해진거야. 고양이만 보면 죽여."
나는 갑자기 김병장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알 수없는 공포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미친 것 같았어. 이유도 없이 그냥 고양이만 보면 죽이는거야.
그런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최병희 병장이 얘기를 해준거야.
만일 부사관들이나 간부들이 봤다면 당장 어느 정신병원에 수감시켰을거야. 이유를 물으면 그냥 고양이가 싫다는거야.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렇지가 않았어.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 그러나 김병장은 절대로 이유를 말하지 않았어.
얼마 뒤 여단본부에서 전출 명령이 떨어졌어.
아버지가 힘을 썼는지 나는 이 곳으로 전입오게 되었지.
천국 같았어. '같았어'가 아니라 그냥 천국이었어. 모든 것을 잊고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었어.
누구도 내 과거를 알 지 못한다는게 나는 너무나도 좋았어.
죽은 김선호에 대한 죄책감도 많이 수그러들었지.
며칠간은 잠도 잘 잘 수 있었고....
그런데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어.
원래 부대 입장에서는 김병장과 최병장이 남아 있는 것을 껄끄러워 했나봐.
그 둘을 함께 묶어 이 곳으로 보내버린거야. 두려웠지만 우린 서로를 무시했지.
그 어떤 합의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할거라는 걸 우린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
그리고 실제로 편했어. 김병장이나 최병장이나 얼굴색이 변할 만큼 행복해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이 곳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신병이 한 명 들어왔어.
후반기 교육을 받고 자대배치를 받은 나보다 고참인 신병.....정한수를 만나게 된거야.
죽었다는 무당의 아들.....
그를 만나면서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았던 우리의 군대 생활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