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길고 좀 어려울 수 있어 제가 정리/요약을 해보려했으나,
섯불리하다간 제 지식과 능력 부족으로 내용의 왜곡만 생길 거 같아 그대로 가져옵니다.
발해를 우리 역사로 치부하려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의외로 신라의 통일을 부정할 수록 발해 역사에대한 정통성을 주장하기가 힘들어진다는 지적이 인상적이고요.
단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요동사의 어려움을 풀어서 잘 설명한 글입니다.
글이 좀 길어서 읽다가 지칠 수도 있으나,
발해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다면 천천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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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 후 거의 고립된 채로 살던 일본에 뜬금 없는 사신이 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죠. "고구려는 망했어, 이젠 없어! 하지만 내 등에, 이 가슴에, 하나가 되어 계속 살아가!" "영토를 회복한다면 요동까지 가리라. 당과 거란이 막더라도 그조차 뚫어버리고 산동까지 공격할 수 있다면, 나의 승리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난 대조영이다. 고구려가 아니야. 나는 나다! 대조영의 발해다!" 에 뭐 -_-; 열혈로 노는 패러디답게 열혈로 시작했지만... 차분하게 얘기해 보죠. 아 참고로 일본에서 고려국왕을 칭한 건 대조영 이후였습니다. 발해는 우리 역사다고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발해는 말갈족을 피지배계층으로 두긴 했지만 고구려 유민이 세웠고,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했다. - 제왕운기부터 발해고까지, 발해 계승 의식이 있었다. 뭐 이 정도겠죠? -_-a 찬찬히 따져 봅시다. 이전 글에서 계승에 대해 영토, 인구, 왕실을 따졌습니다. 아, 여기서 스스로의 계승 의식도 중요한 요소죠. 우선 영토, 예 뭐 이건 인정하죠. 하지만 그건 그 뒤에 일어난 국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는 그렇다 치더라도 금은 고구려와 발해 영토 대부분을 이었습니다. 고구려가 처음 영토 확장을 시작한 함경도 쪽까지도 말이죠. 그리고 현재 중국은 한반도와 연해주 이외의 고구려와 발해 영토 대부분을 가지고 있죠. 인구, 발해 건국 때 인구는 10만호였습니다. 이 안에 말갈이 들어 있다면, 그리고 원래 지배층은 피지배계층에 비해 극소수일 뿐이니 고구려 유민의 비율은 더더욱 줄어듭니다. 왕실, 대조영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덧붙여진 자로서, 성은 대씨이다" 말.갈이라는군요. 최치원은 이렇게 말 했습니다.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으로 말갈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 소번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 및 대조영 등이 측천무후 때에 이르러, 영주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이라 일컬었나이다." 그저 말갈이었을 뿐인 자가 이후 고구려라는 명분을 쫓은 것일 뿐이라는 거죠.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발해가 발해가 아닌 다른 이름, 가장 중요한 이름 고구려를 내세운 적이 있을까요? 발해가 스스로를 고구려라 내세운 적은 단 한 나라, 일본에 대해서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때 일본은 이미 고립돼 대륙의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망했다는 말까진 들었겠지만, 사기를 치면 통할 상황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고구려를 내세우며 왔던 일련의 사신들, 과연 이들이 정말 스스로를 고구려라 생각하며 왔을까요? 아니면 고구려라는 이름을 내세워 일본과의 외교를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애초에 당과 신라에 고구려를 내세우지 않고서야 이 "고구려 계승"이라는 명분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두 나라가 고구려를 무너뜨린 나라니까요. 하지만, 그런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발해는 어디까지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세운, 전혀 다른 나라일 뿐입니다. 그마저 그 왕족이 정말 고구려 출신인지조차 의문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무시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라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지만, 사실 정 반대입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죠. 우리와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가입니다. 서로 다른 나라들이 서로 적통을 주장하는 것은 이것 때문이죠. 어느 한 나라에 압도적으로 영향을 주어야 확실히 적통이라 인정할 수 있거든요.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이렇습니다. 이전 글에 대한 보론이 되겠습니다만,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반응은 이렇습니다. "영토면에서 신라는 고구려땅을 거의 먹지도 못하고 끄트머리에 발만 살짝 걸쳐놓은 정도이고 고구려 유민이 금방 발해를 세워버렸으니 (중략) 설마 고구려 사람들이 신라로 일부 이동해서 살았다고 해서 고구려 먹은거?" 신라 때 흡수한 고구려 인구와 발해 건국시의 고구려 인구의 수, 어느 쪽이 더 많을까요? 멸망 직후 밝혀진 것만 69만호나 되던 고구려 인구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고구려 인구와 영토를 차지한 신라의 명분을 무시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고려에서 발해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크게 봐도 더 작거든요. 기껏해야 수만 명입니다. 발해가 멸망한 지 11년이 지나서야 귀부한 대광현이 정말 발해의 태자였을지는 의문이구요. 어차피 "삼국 통일"이나 발해의 "고구려 계승"이나 "우리가 단독으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발해 쪽이 더 낮죠. 발해는 바로 그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와 당나라에게는 자기들이 고구려라고 하지 않았거든요.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부정할수록 고구려를 우리 역사라 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이죠. 신라는 고구려를 거의 잇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발해를 거의 잇지 못 했죠. 그렇다면 남은 건? "신라인"이면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떠들기만 한 "고려"일 뿐이죠. 어차피 궁예도 신라 왕자일 뿐이었습니다. 왕건? 200년이나 넘은 상황에서, 그것도 신라가 한창 때에는 말도 못 꺼내다가 신라가 망할 때가 돼서야 들고 일어난 고구려 계승이라는, 신라인이 말한 명분이 고구려 계승에 얼마나 진실이 담겨 있을까요? 자,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 보죠. 겨우 수만명이라는 인구와 발해 멸망 이후에야 들어 온, 스스로를 태자라 칭하기만 할 뿐인 발해의 태자, 이 상황에서 우리가 발해에게 받은 영향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정작 고려도 조선도 발해의 계승을 자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 발해가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은 정말 미미합니다. 이 정도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 이어진 중국과 여진의 흡수와 다를 바가 없죠. 정작 발해의 정통을 이었다 주장한 것은 후발해(영토)부터 정안국(고구려가 건국한 바로 그 지역), 흥요국 등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후에 금을 세운 여진족이었죠. 이들은 발해의 구성원을 이룬 바로 그 여진족이었습니다. 고려는 이들에 대한 어떠한 형제의식도 없었고, 계승을 자처하지도 않았습니다. 요나라나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영토 수복이라는 명분으로 쓸 수 있음에도 그들이 쓴 건 단지 고구려 계승 뿐이었죠. 애초에 말갈과의 연대라는 점에서 고구려 색이 얕아진 발해, 이 발해를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고려가 이를 계승해서 내려온, 우리 역사라고 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 점에서 서강대 김한규 교수의 요동사가 흥미롭습니다. (서강대는 뭔가 특이한 주장이 많이 나오는 듯 (...)) 요동은 중국, 한국 어디도 확실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는 제 3의 역사라는 것이죠. 고구려부터 발해, 요, 금, 청까지... 요동에서 일어난 많은 북방민족의 역사를 다루죠. 기존의 민족주의 관념에서 떠나는 점 역시 흥미롭구요. 꽤나 오래 전부터 발해를 지방 정권이라 규정한 중국이지만, 중국 역시 발해를 자기 역사라 할 순 없거든요. 이런 자존심 싸움을 끝낸다는 점에서 참 혁신적인 주장이죠. 후... 그럼 결론도 솔직히 기분 좋진 않으니 이대로 글을 끝내는 게 낫겠죠? 그럴 순 없죠. -_-; 의문이 생기면 풀어야 되는 법, 위에서 따진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따져 보겠습니다. 1. 대조영의 출신 위에서 인용한 당나라 얘기는 신당서였습니다. 신이라는 말은 구도 있는 법, 구당서에는 이렇게 돼 있습니다.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별종이라는 말을 중국에서는 출신이 다른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 별종이란 말은 보통 이렇게 쓰입니다. "고구려는 부여 별종이다." "백제는 부여 별종이다." "일본은 왜의 별종이다." 이를 보면 별종이란 말은 다르다는 게 아니라, 그걸 계승했다거나 거기서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삼국유사에서도 대조영에 대해 "고구려 장수"라 명시하고 있습니다. 발해말갈이라 하는 것은 마찬가지만요. 통설로 쓰이는 "지배층 고구려 유민, 피지배 말갈" 이것 역시 의존하고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일본의 사서 유취국사입니다. "재당학간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개별천황7년 고려왕 고씨가 당에게 멸망 되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이것이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이고 말갈이 피지배층이라 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왜냐면... 이 이상 다른 게 저어언혀 없거든요. -_-; 거기다 당과 신라에서 발해를 말갈이라 표현한 것과도 연결돼 버리구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 "말갈"이라는 것에 대해서부터 물어야 됩니다. 2. 말갈은 무엇인가? 숙신 - 말갈 - 여진 - 만주. 참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말갈의 흐름입니다만... 꼭 그렇진 않습니다. 이 숙신은 (최근에 이게 주신이라느니 쥬신이라느니 우리 민족이라느니 하지만) 부여의 예맥과는 기본적으로 "언어"부터 다른, 고대부터 다른 종족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헌데... 문제는 이것이죠. 말갈의 하나, 발해의 구성원, 그리고 대조영의 출신이라는 속말 말갈은 예맥의 후예라고 하거든요. -_-; 여기에 역시 발해의 구성원인 백산 말갈 역시 예맥족 출신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 이외에 말갈로 불리는 종족은 발해에서 떨어져 나왔고, 금을 세운 흑수 말갈이 있습니다. 이들은 숙신계라고 하죠. 예맥/숙신계에 둘 다 말갈이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이 때문에 말갈이 확실히 하나의 종족을 이르는 게 아니라 단지 비문명화된 자들에 대한 비칭이 아닐까 하는 학설이 있습니다. 특히, 구당서->신당서에 대한 흐름을 보면 그렇고, 최치원의 말을 보면 더 그렇죠. 왜냐 하면... 이 최치원이 발해를 저렇게 깐 글은 "발해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거든요. 언제나 당에게 있어 1순위였던 신라, 하지만 신라가 막장이 될 무렵 발해에게 1등을 뺏기는 일이 생깁니다. 발해가 위로 가면 신라에 대한 대접이 줄어들죠. 신라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입니다. -_-; 신라가 발해에 라이벌 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례죠. 최치원은 고구려와 백제를 신나게 까는 글을 당에 올리기도 하는데... 사실 간단해요. 이 때의 신라는 이미 옛날의 신라가 아니었거든요. 당장 저 글을 올릴 때, 궁예와 견훤은 나라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 그 옛날 경주의 일개 도시국가였던 신라로 돌아간 때였던 것이죠. 현재도 말갈이라는 말로 편하게 부르고 만주족의 전신으로 보고 있지만, 말갈의 문제는 이렇게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운 게 정말 한참 후인 금이 전부고, 그나마 이 금도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기지 못 했거든요. 3. 이원화된 국가였을까? 유취국사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이게 정말 발해의 모든 모습일까 하는 점입니다. 당장 여기서 걸리죠.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자, 이제 우리가 아는 발해의 행정구역을 봅시다. 발해는 신라처럼, 일본처럼 당의 문화를 최대한 받아들인 국가였습니다. 행정구역 역시 마찬가지였죠. 5경 15부 62주, 당나라의 행정구역을 본따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헌데 유취국사에는 주현이 없다고 했죠. 발해 초기, 최소한 이런 행정구역이 완비된 선왕 이전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인구도 마찬가지죠. 상경 용천부는 인구가 20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발해 초기 10만호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저 영충이라는 승려가 정말 발해의 모든 것을 봤을지도 의문입니다. 발해 1300호가 직접 증명했듯, (묵념 한 번 하고 씁니다) 발해에서 일본으로 가는 건 동해의 해로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부터 고려, 조선까지도 함경도 지역은 옥저 같은 나라 이외에는 말갈이 할거했다고 알려져 있죠. 고구려도 동부여 함락 후 동쪽의 숙신은 간접 지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영충이 발해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지날 길은 이 곳이죠. 자기가 눈으로 본 것을 발해의 전부로 말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발해의 중심부가 요동이나 평양이 아닌 동북부 지방이라는 점, 역시 동북으로 크게 뻗어나간 점,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에 말갈이 별개로 사신단을 보낸 점 등을 보면 발해가 이들에 크게 의지하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피지배라는 극단적인 상황이 가능할까 역시 의문입니다. 이들 흑수말갈이 발해 내내 큰 문제가 되긴 했지만, 이들이 발해의 모든 것일까 하는 문제죠. 속말, 백산 말갈 등 예맥계가 통치하고 흑수말갈 등 숙신계를 간접 통치한 것이라면 정확히 고구려 ver2인 거니까요. 4. 계승 문제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형제국으로 여기지 않았다." 신라와 발해는 전혀 다른 걸 강조하기 위한 말인데... 사실 따져보면 애초에 그 둘이, 혹은 고려가 발해를 형제국으로 여기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왜냐면... 신라는 이전 글에서 썼듯 "삼한일통"을 내세워 고구려를 "한"에 포함시켰거든요. 사실 보면 재밌는 역사입니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예맥족과 진, 삼한, 백제 신라 가야로 이어지는 한(韓)족, 이렇게 보면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지만, 고대사는 쭉 예맥족이 남하해 한족을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신라조차도 (딱히 고조선 계승 의식이 없던 삼국사기에서) 고조선의 유민이 세웠다고 하죠. -_-; 위만에게 쫓겨난 준왕이 마한을 세웠다는 신화부터, 고조선이 연나라에 밀릴 때 남부지방에서 발견되는 고조선계 유물 등... 이건 장수왕대의 남하 때도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이 한족이 예맥족을 흡수해 버린 겁니다. (...) 이 점에서 삼한에 고구려를 포함시킨 신라의 일통삼한 의식은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예맥족은 없어! 애초부터 고구려도 한족이었다고!" 예맥족과 한족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한민족, 재밌게도 그 최후의 승자는 한족이었던 거죠. 각설하고, 이렇게 고구려를 흡수했다고 주장한 신라에서 정작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인정하면? -_-; 삼한일통 의식 자체가 사라지는 겁니다. 마치 현재 한국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 도서이다."고 하는 것처럼요. 이 점에서 당과 신라의 기록에 발해가 고구려를 자처한 것은 누락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고려 역시 마찬가집니다. 조선도 마찬가지죠. 결국 "신라 내의 고구려"에서 일어난 게 그들입니다. 그런데 발해를 고구려 계승이라 인정하면? -_-; 대씨에게 왕 자리를 줄 것도 아니고 자기네 정통성이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 생각처럼 사이좋게 형제국 어쩌구 할 형편이 아니었던 거죠. 성호사설의 이익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발해의 시말인데, 신라의 말기에는 폭원(땅)이 분열되어 능히 통일할 수 없었다. 대씨가 이 시기를 타서 요동 전체를 점령하자, 조선ㆍ고구려의 지역을 거의 반이 넘도록 잃었다." (...) 다시 말하자면, 고조선, 고구려의 땅은 다 신라 땅인데 대조영이 그 땅을 뺏어갔다는 것이죠. 대조영이 발해를 세울 때는 신라 말기 어지러울 때기는커녕 신라 전성기가 시작될 때였죠. 발해의 계승을 내세우는 것이 제왕운기 같이 단편적으로 나오는 것, 그리고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나오는 것 역시 이런 부분에서 "정통성이 확고해진 상황에서 굳이 그런 거에 얽매일 필요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개인 차원이라는 이점도 있었겠지만요. 이전 윤관의 9성 정벌 때 얘기했듯이 조선에서 "공험진은 두만강 이북"은 조선의 국가의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정약용, 안정복 등 실학자들은 두만강 이남으로 보았죠. 두만강이 확고히 조선의 국경이 된 상황에서 굳이 얽매일 필요 없어졌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고려사 등을 보면 발해도 계승한다는 의식, 혹은 발해가 흡수돼야 고구려 계승의 명분이 확고히 된다는 것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죠. 고려가 발해를 형제국으로 여겼다는 대표적인 사례, 왕건이 거란에 대해 취한 태도죠. 성호사설을 지은 이익은 이렇게 썼습니다. "왕씨는 그 사신을 귀양보내고 그 낙타까지 죽였다. 이는 발해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고 그 뜻이 장차 의리에 따라 강토를 조금 더 넓히려고 했던 것이니, 마치 군사는 곧은 것이 장하다는 것과 같다. 불행하게도 나라를 다 회복하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몸이 죽었으니 천의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씨의 흥망이 우리나라에 무슨 관계가 있어서 이토록 심하게 끊어 버렸겠는가]? "이러므로 그의 남긴 훈계가 간절하였으니, “거란은 금수와 같은 종족이라 그 풍속을 본받지 말도록 엄금한다.” 하고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하물며 발해의 세자와 종척 대신ㆍ예부경 대화균ㆍ사정 대원균ㆍ공부경 대복모ㆍ좌우위 장군 대심리 등이 아직도 살아 있고, 남은 무리 몇 만 명도 섶에 눕고 쓸개를 빨며 생각이 아직 원수 갚을 일념으로 차 있었으며, 요(나라) 지방(의 발해) 백성도 다만 한 강물만이 서로 막혔을 뿐 언어와 기습은 반드시 딴 종족에게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발해의 태자 대광현의 귀순 역시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세자 대광현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고려에 투항하자, 고려는 광현의 성명을 왕계로 하사하여 종적에 붙이고 그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이보다 한 해 앞서 고려 궁성에서 지렁이가 나왔는데 길이가 70척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발해가 와서 항복할 징조다.”라고 했었다." 대광현의 항복은 단지 왕족 하나와 몇 만 명 정도의 항복이 아니라, 발해 자체가 고려에 항복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죠. 에 뭐 -_-; 고려인의 생각에는요. 대광현은 발해 멸망 11년에야 왔고, 그동안은 후발해라는, 거란이 포기한 발해 땅에서 권력 싸움 중이었습니다. 고려가 이런 걸 아예 모르진 않았겠죠. 이런 것도 있습니다. "(걸걸중상의 일을 말한 후 “바닷가에서 나라 이름을 부여로 한 자는 오직 이 발해뿐이고 그 지역도 중상에 들어와 점거했던 폭원 안에 있다.” 하였으니, 그 말이 두 가지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이상하다 하겠다." 휴 -_-; 정식 역사서에서는 나오지 않는 발해의 고구려 자칭이 이렇게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는 나타나는 거죠. 그가 일본의 기록도 찾아봤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들도 발해가 스스로를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칭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유득공이 제목을 발해"사"가 아닌 발해"고"라고 지어야 했을 정도로 발해에 대한 기록이 적어졌을 때인데도요. 유득공은 이렇게 강하게 주장합니다. "고려는 발해사를 이루지 않았는데, 고려가 이를 [알면서도 떨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에 거하여 백제라 하고, 박석김씨가 동남에 거하여 신라라 하니. 이것이 삼국이다. 마땅히 삼국사가 있는 것이니, 고려가 이를 이루었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고 김씨가 그 남쪽에 있고, 대씨가 그 북쪽에 있으니 발해라 한다. 이에 남북국이라 일컬으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가 아직 이를 이루지 않았다."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인이다. 그 있던 곳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땅이다. 동쪽에도 나타나고, 서쪽에도 나타나고, 북쪽에도 나타나니, 큰 귀와 같은 형상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하여, 왕씨가 이를 통합하니, 고려라 하였다. 그 남쪽에 김씨의 땅은 온전하나, 북쪽의 대씨의 땅은 온전하지 않으니, 혹 여진족이 들어오고, 혹 거란족이 들어오니, 마땅히 이때에 고려가 꾀하여, 발해사를 급히 이루었어야 한다." 이익의 영향을 받은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발해를 부여, 가야,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와 같이 다루었습니다. 현재야 각 나라들에 대해 최대한 차별이 없어야겠지만, 정통성이라는 측면에서 발해는 아마 이 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5. 계승 문제 2 - 요동사 발해를 이은 국가는 후발해, 정안국, 짧지만 흥요국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길든 짧든 계속 발해의 부흥을 외쳤죠. 결국 발해 부흥운동이 끝나고, 고려사에서도 발해라는 이름이 사라지는 것은 금이 세워진 후입니다. 그리고 금의 건국 주체인 흑수말갈은 발해 건국 후에야 흡수됐고, 그 후에도 계속 말썽을 피우며 발해에서 떨어져 나옵니다. 발해 말에는 신라에도 귀부할 움직임을 보였죠. 그 신라도 막장이 돼버렸지만요 -_-; 발해 부흥 운동에 이들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도 발해 부흥 세력을 밟으며 일어났습니다. 때문에 이들도 그들을 달래기 위해 발해 계승을 외칠 수밖에 없었구요. 하지만 발해의 고구려 유민들에 예맥계인 속말, 백산과 이 흑수를 따로 둔다면, 이들도 발해의 정통성과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발해의 유이민은 발해 말부터 대광현 이후에도 쭉 계속됩니다. 수만에서 10만은 공식적인 숫자일 뿐 그 이상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죠. 정안국은 사료에 나온 멸망 20년 이후까지도 계속 고려에 흡수됩니다. 당이 고구려에 했듯, 요도 발해에서 많은 인구를 붙잡아 흡수했습니다. 여요전쟁 당시에 발해 출신 장수들이 있을 정도였죠. -_-; 오히려 대우는 고려 내에서보다 더 받은 듯 합니다. 하지만 거란은 발해 멸망 직후 기존의 발해 영역을 포기합니다. 과연 흡수된 숫자가 다수일지는 의문이죠. 고려의 전체적인 인구나 영향력으로 봤을 때 흡수된 발해의 비율은 꽤나 낮을 겁니다. 거기다 발해가 거란, 여진족의 성장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상, 무엇보다 사료가 워낙에 부족한 이상 (...) 이들을 우리만의 역사라 하는 데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동사가 나오는 것입니다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죠. 우선 위에서 말한 예맥족과 한족의 관계, 요동사에서는 예맥족을 똑 떼서 얘기합니다만 이들은 한족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서로를 흡수해 왔습니다. 또한 요동사에서 말하는 예맥-동호(거란)-여진의 체계에서 이들이 같은 역사를 공유한다 할 정도의 접점도 부족합니다. 지역사라는 것 이상을 넘기는 어렵죠. 이 요동사의 가장 큰 의의는 일국사관을 벗어난다는 점입니다. 중국도 한국도 여기에 완전한 귀속권을 주장할 수 없으며, 요동은 요동대로 역사가 계속 진행됐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들의 연속성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요동이라는 지역사나 예맥, 동호, 여진이라는 각기의 민족사로 확대되는 수순밖에 없죠. 문제는... 이들의 역사를 챙겨줄 주체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중국사를 하나하나 해체한다 해도 수많은 민족들이 언제는 있고 없고, 언제는 어디에 있었으며 어디에 있었다는 것... 얘기가 너무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한 상황에서 각기 지역에 따라 또 다시 한 역사의 "귀속"을 주장할 수밖에 없어지구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문제가 많아지는 거죠. 민족주의를 떠나서 "우리 역사"라는 관념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지구 반대편의 역사를 연구한다면 몰라도요. 아마 한중일 삼국의 국경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진다면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각기의 역사보단 각 지역의 지역사 위주로, 이른바 "동아시아사"가 진행된다면 가능한 얘기겠죠. 이 점에서 한 단계 앞서간 것 같긴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약점이 많습니다. 현재로서는 일국사관을 포기할 수 없죠. 서로 우리 거다를 넘어서 그냥 공통으로 가르친다면 몰라도요. 참 흥미롭고 긍정적인 부분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_-; 요동사 얘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한 번 욕심 내 봤습니다만, 역시 발해 얘기는 어렵군요. 아마 지금 하는 얘기가 바로 다음 달에 바뀔 수도 있고, 아마 평생에 걸쳐 계속 바뀌어가긴 할 거 같습니다. 아무튼, 일단 지금의 결론은 이렇네요. 자......... 어렵고도 참 긴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놨으니, 좀 위험하긴 해도 간단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발해를 온전히 우리만의 역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발해는 우리 역사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이외에 발해 문제의 가장 어려운 점은 요동을 먹었느냐 아니냐죠. -_-; 이 문제도 다룰랬는데 분량상... 언젠가 더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출처 : http://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4&sn1=&divpage=6&sn=on&ss=off&sc=off&keyword=%EB%88%88%EC%8B%9C&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4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