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인데,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는데, 이때부터 출세해야 겠다는 굳은 의지를 불태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먼 친척인 이조참판을 지냈던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 그 때부터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다.
이완용이 출세하는 지름길은 바로 고종의 신임을 얻는것이었다. 이때 당시 고종은 미국빠였느데, 그건 미국이 워싱턴에 조선공관을 세우게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조선공관을 세운다는 건, 미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청나라와 동등하게 인정한다는 뜻으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싫어했던 고종은 이를 고무적인일로 여기고 있었다. 이완용 또한 미국빠가 되고 고종의 신임을 얻고 미국공관에 공사로 임명된다.
2년후, 미국에서 돌아온직후 이완용은 더 미국빠가 되어있엇고, 고종의 신임을 전적으로 받았는데, 마침 이때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완용은 반일 정치세력을 모아, 아관파천을 주도한다. 고종은 이완용을 더 신임하게 되고, 한 때 3개 대신을 동시에 맡기기도 한다.
그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는데, 이완용은 그기회를 삼아 영안문을 철거하고, 독립문을 세우는데 주도한다. 이때 독립협회 회장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조정의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하고 급진적으로 변하면서, 자신의 정치인생의 위기를 느낀 이완용은 독립협회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또 공금횡령 한게 적발되어, 독립협회에서마저 제명이 된다.
또 더큰 위기가 오는데,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미국과 가쓰라 테프트 조약을 비밀리에 맺는다. 이는 미국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인정하고, 필리핀을 갖는 조건으로 조선에서 손을 땐다는 것이었다. 미국 커넥션까지 잃은 이완용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1905년 조선을 방문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토히로부미를 만난 이완용은 적극적으로 친일파가 되어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천황으로부터 백작에 수여된다. 그후 모든 일본과의 굴욕 조약에서는 옥새대신 이완용의 서명이 들어가고, 그때마다 더 높은 작위와 상금을 수여받느다. 이완용이 죽을 때 그는 조선에서 두번째 큰 부자였으며, 그가 소유한 땅은 지금까지 알려진건만 1500만 제곱미터, 친일파중 단연 1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