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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몽고항쟁의 글을보고.
게시물ID : history_59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바가바드
추천 : 7
조회수 : 71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10/13 03:54:06

재미있는 해석이긴합니다만 몇가지 간과하지 않았나 생각듭니다.

 

첫번째는 몽고가 최우정권을 위협하는 요구뿐아니라 과중한 공물과 사신의 무례한태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최우개인의 생각이외에도 고려 군신자체에서 분노가 고조되었습니다.

 

두번째는 고려가 이미 북방민족과 전쟁경험이 많다는점

 

세번째는 이미 최충헌때 자기맘대로 왕을 갈아치우는 권력이였습니다. 세삼스럽게 최우대에서 구지 왕위를 찬탈할 이유도 딱히 없습니다.

 

넷째는 세번째와 연관되는데 우리나라역사속에서 독특한 특성이 역성혁명이 선호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역성혁명이 지지받은건 나라가 거의 막장으로 치솟는 상황 속에서도 희귀하게 이루어집니다. 이건 우리나라 과거사람들의 심성적인 측면에 많이 작용한게 아닌가도 싶네요. 왕조의 정통성이란 것을 굉장히 크게 따지는 편이죠

 

다섯째는 몽고가 강화도공격이 수월한 편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몽고가 해상공격이 약점은 아니지만 이것은 한인들을 복속시킨 후입니다. 금나라는 1234년 남송은 1279년멸망시킵니다. 강화도천도는 1232년부터 1259년까지입니다. 특히 일본의 사례를 드는데 일본침략은 1차는 위협용이였고 고려수군이 동원되었죠 정복전투는 2차부터였습니다. 2차는 남송멸망후 본격적으로 한인동원이 이루어졌을때죠. 동남아사아 공격도 13세기 말경이고요. 맘먹으면 그 당시에도 공격할 수는 있겠지만 정비안된 한인수군을 동원할만큼 고려정벌이 매력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덫붙여 1240년대는 왕위계승전쟁이 치열하여 대외원정이 소극적인 시점이였습니다. 하물며 남송도 남아있었죠.

 

여섯째는 고려가 전면전을 펼칠 여력이 안됬다는 점입니다. 이미 13세기 초쯤되면 고려의 군역상황은 거의 멘붕지경입니다. 또한 12세기부터 민란에 천민의 난 초적난무의 상황은 정권에도 위협적이죠. 거란이나 금을 제대로 막을 수 있던 것은 그들이 동북아시아 정세상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점도 있지만 고려가 우리가 생각이상으로 군사국가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군역체계자체가 10~30만을 동원할 수 있는 방식이였습니다.(수도 경군의 경우 45개의 영 45000이 기준이지만 평소는 이 보다 적고 비상시엔 이보다 많습니다 여기에 군사특화인 양계와 지방군 총동원은 고려의 군사동원양이 꾀나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문제는 상황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전면전을 치룰수 없었습니다. 

 

일곱째는 최씨정권이 항쟁에 있어서 강화도 수비외에 손놓고 있던 것도 아니고 어느정도의 지휘는 하고 있었다는 점이죠. 또한 당시 최씨정권은 안정적일때라서 쿠데타를 걱정해 전면전을 안했다라는건 무리가 있지 않나 싶네요. 대단위 병력을 소집했다면 최우가 직접 통솔했을 겁니다.

 

몽고는 이미 1219년 강동성 거란잔군 합동공격때부터 몽고는 고려에 큰 은혜를 베푼듯한 태도를 유지합니다. 1221년 제구유때는 이런문제가 극에 달했습니다. 1225년 제구유가 돌아가는길에 누군가에게 피살되는것은 불에 기름부은 꼴이되기도 했구요. 일단 피살사건은 둘째치더라도 한나라를 책임지는 사람이 무례하고 과중한요구를 내노란다고 그냥 내놓는것도 문제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더군다나 고려는 이미 거란 여진과 같이 이미 북방의 강력한 민족과 겨루어 나라를 지켜냈던 전적이 있는 나라죠. 추가로 문신보다 무인이 대접받던 시기였습니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봐도 몽고가 침략해온다고 바로 문열어주고 항복할 상황이 될 수 없었다고 봅니다. 사실 처들어온다고 바로 문열어주는것도 문제겠죠. 

 

물론 최우가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한속성은 분명 존재합니다.  관련되서 김윤곤씨가 대표적으로 주장한 내용인데요 당시 비등한 초적이나 천민류의 난 등 반정부적인 동향속에서 몽고침략뿐아니라 반정부세력을 피하기위해서 강화도 천도를 감행했다는 점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최우가 자신의 정권을 몽고로부터 지키기위해서 백성을 희생했다는 좀 문제가 있지 않나도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이자겸의 금나라 사대나 권문세족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부러 몽고와 결탁해 고려내부에 권력을 더욱 공고히하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죠.  아래 글에서 보듯이 몽고가 고려 완전 정복의사가 없었다면 최우입장에서 쉽게가는 타협을 만들 여지가 충분히 있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정권을 위해 국가전체를 희생할 각오가 되있다면 더욱이 그렇겟죠 땅할양이던지 속국이던지 공물양조정등으로 말이죠. 그러나 결국은 천도와 항쟁을 선택했습니다.

 

추가로 당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고려해봐야하지 않나 생각드네요. 조정의 보전이 곧 국가의 수호라는 개념을 가졌다면 강화도천도후 강화도 수비전념은 그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딱히 어색하지 않다고 봅니다. 특히 과거로 내려갈수록 왕조자체나 중앙권력 혹은 수도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이런 과거사람의 사고방식은 여러가지로도 해석할 여지가 남습니다.

 

또한 바로항복했으면 백성은 행복했고 나라는 유지되었을까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그 만큼 버티고 점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국가 명맥을 유지시켰던 것이 아닐가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역사책에 몽고항쟁이 교훈위주로 편중된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외세(몽고)에 대해 대항했던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당시대 초강대국이였던 몽골제국이였다는 점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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