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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직구주의) 미필자들은 몰랐던, 그 곳의 이면 (8)
게시물ID : military_278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류세아
추천 : 21
조회수 : 153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7/31 01:08:06
안녕하세요! 시험이 끝났음에도 조금 늦게 돌아온 것은 방학이 시작됨을 기뻐해서가 아니라, 노력했음에도 필요한 점수가 나오지 않음이 한탄스러워서...
글에서 보시다시피 전 전역하고 저번 1학기에 복학한 학생인데, 다른 건 다 따라감에도 수학만큼은 도저히 못따라가겠더군요. 뿌리깊이 개념이 뒤틀려 있어서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여담을 하나 하자면 오늘 시험에서는 (a^k)^2를 a^(k^2)로 생각했다가 문제 하나를 30분동안 잡고있었는데.... (a^2k로 계산해야 됩...맞죠?) 도저히 이상해서 정수를 대입해서 생각해보는 등 온갖 요사스러운 방법으로 실수를 알아냈던 것이 기억나네요. 안그래도 계절학기라, 공업수학을 2~3번째 듣는 07~08학번들과 점수경쟁을 했어야 했는데, 첫 시험의 전체평균이 무려 77점이었습니다. 학기중보다 20점은 높은 수치죠. 첫째와 둘째 시험을 합친 점수의 평균이 155점이라고 하더군요... 괴물들..

덕분에 더 울적한 기분으로 더 울적한 글을 써내려갈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시작합니다.
(댓글에 제 이전 글들을 링크해드리겠습니다. 전번 글들을 보지 못하셨다면, 이야기의 진행이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으니, 전 글들을 읽고, 이번 글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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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편에 했던 이야기를 한 번 더 요약하고 넘어갈게. 나는 소대장에게 낚여 설문지를 작성했고, 그게 까발려짐으로 인해 소대분위기는 영 좋지 않아졌으며, 선임층의 후임층에 대한 각종 가혹행위들이 늘어났지만, 나는 그 타이밍에 하필이면 다른 소대로 근무지원을 갔던 터라 설문지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내 후임들만 고생했지. 그리고 나는 거진 분대에서 매장당하는 분위기가 되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이후부터는 내무생활에 있어서 변함이 거의 없었어. A와 B가 전역할 때까지 난 매장된 채로 묵묵히 살아야 했지. 이번 이야기에서는 내가 그 매장당했었던 시절들을 어떻게 견뎌왔는지 말해보려고 해. 

우리 소대는 소대장의 적절한 대처로 사단 사찰에서 아무도 설문을 쓰지 않았지만, 그게 대대 전체의 이야기는 아니었지. 우리 대대는 몇 개의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본부중대(전투중대가 아닌, 운전, 설비, 행정, 통신, 경호 등을 맡는 중대야. 경호가 왜 본부중대에 있느냐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우리 대대의 특성상, 관광객 경호가 필요했고, 전투병들이었던 우리가 관광 중 상황에 대비한다면 그들은 관광객을 이끌고, 가이드하며, 상황시 그들을 대피시키는 일을 했지. 키가 크고 훤칠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가이드 역할까지 수행해야 했으므로, 관광지에 대한 설명을 각 언어로 모조리 외우고 다녔지.) 의 상황이 심각했다고 들었어. 

사실 그곳도 이전까지는 구타폭력이 잔존했었었고, 폭력을 사용하던 세대가 거진 전역함으로서 많이 풀어졌다고 생각되었었지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설문에서는 대대의 각종 어두운 면들이 가감없이 드러났고, 이를 통해 우리 대대는 YTN에까지 그 이름이 오르며 크게 보도가 되지.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대의 상황이었고, 우리 소대는 아직 들킨 일이 없기에 부조리는 그대로 남아 있었어. 

하지만 선임들에게도 생각은 있었는지, 상황이 그 정도까지 몰리자 이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지. 폭력을 사용하는 것 이외에 그들이 당했던 것을 보상받으면서, 군기를 유지한다는 명목은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던 선임들은 이제 얼차려를 주로 주기 시작했어. 

주된 가혹행위가 폭행에서 얼차려로(원래 둘 다 있기는 했지만) 바뀌면서 소대장 역시 '합법적이다'는 식으로 이를 지지하기 시작했지. 그 시절 들어 자주 조사되기 시작한 가혹행위가 폭행에 국한되어 있어서, 소대장 입장에서도 군기를 유지하면서 폭력을 없애는 방법이기도 했으니까. '소대장에게 보고하고, 그 이유가 타당하다면 얼차려를 부여해도 좋다'라는 그의 방침과 함께 우리는 더 이상 누구에게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되어 구타를 제외한 가혹행위를 당했어. 

하지만 결국 자신들의 휴가를 3일이나 제한시킨 나에게 겨우 얼차려를 부여하는 것으로는 참을 수 없었는지, 나에 대한 폭력만큼은 계속 잔존했지. 사실상 이제 소대 내에서 내 편은 없었기에(나와 같이 설문을 작성했다 매장된 인원들 빼고.) 날 구타한다고 내가 어디에서 하소연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어. 좀 더명확히 표현하자면 A는 알고 있었어. 그 시절까지도 나에게 폭력을 사용한 유일한 인물, 각종 설문조사가 일이주일 단위로 계속되는 그 시간 속에서, 이제 다들 짬을 먹을 만큼 먹어서 누군가에게 성내고 구타한다는 것 조차도 귀찮아질 법한 그 시간 속에서도 끊이지 않고 날 괴롭힌 건 A뿐이었지. 

그는 그의 뜻에 따르던 그의 가까운 후임들마저도 질려버릴 정도로 분대의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고, 쉬지않고 얼차려를 부여했으며, 남는 시간 짬짬이 나를 계속 때렸어. 후임층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A의 전역만을 기다렸지. A가 전역하면, 그 아래로 1~3개월 차이 최선임층이 금방금방 전역해 나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제 내 맞선임이 필두가 되는 약 10개월간의 평화로운 기간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어. 실제로 나는 상병을 달자마자 분대의 3번째 짬이 되었었지. 

몇 주일이 지나자, 갑자기 소대장급 이하의 모든 간부들이 물갈이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 본부에서 이미 새로 들어올 간부들의 명세서가 보였다고도 하고, 그게 P의 사건에서 이어진 사단 사찰의 결과물이라고도 했지. 우리네 소대는 아니었지만, 각종 가혹행위가 드러난 소대의 소대장들에 있어서 경고장이 내려졌다고도 하고, 이제 그들은 승진이 막혀 전역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말까지 나왔지. 나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태어난 이래로 목격한 사상 최악의 인간들의 집합소에서, 혹시나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신이 존재한다면, 진리가 존재한다면, 적어도 그 정도의 벌은 그들에게 가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나름대로 특수한 부대에 속해 있었고, 군기 또한 잘 확립되어 있는 편이어서, 특전에서 온 간부들이 선호했어. 또한, 특공연대 등 특전 경험과, 우리 대대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으면, 후에 장성급으로 도약하는 데에 유리하기도 했지. 그래, 소대장들이 바뀌는 이유는 그저 그들이 승진하기 때문이었어. 이제 대위가 되어 중대장 교육을 받기 위해 각지로 흩어져야 했던거지.

새로운 소대장은 그나마 특공대 출신은 아닌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였어. 소문이 돌기 시작한 얼마 후, 우리는 새로 올 소대장의 이름과 소속을 소개받을 수 있었지. 물론 부소대장도 교체가 예정됐고, 우리 소대만이 아닌 전 대대의 간부들이 물갈이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은 이젠 예견할 필요도 없는 기정 사실이었지.

A는 그런 상황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신과 친했고, 수많은 편의를 봐주었던 소대장이 이제 가게 되었으니까, 다음 소대장과도 충분히 친하게 지내서 그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가 가장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휴가를 3일이나 잘라버린 나를 다음 소대장이 와도 계속 구타하고 괴롭힐 수 있을까. 

나 역시 새로운 소대장이 오면 뭐라도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어. A는 아직 3개월 이상 분대장을 해야 했고, 그 시간은 버티기에는 너무 길었었지. 이 또한 지나간다지만 그런 우스운 제3자의 입장 따위 내가 생각할 바가 아니었어. 눈앞의 작은 희망. 소대장이 바뀌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특공연대 출신 소대장의 임기 마지막, 나에 대한 핍박은 극한으로 치달았고, 가끔 얼차려를 많이 받아 피곤했던 날 내가 코를 골기라도 하면 그날은 한밤중부터 지옥도가 펼쳐졌지. 밤새 침대에 엎드려뻗쳐서 다음날 아침 A가 일어날때까지 그 자세여야 했으니까. 다시 잠들었다가 A가 일어나기 전에 엎드린 자세로 복귀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다가 다시 코를 골아서 누군가가 깨기라도 한다면? 난 그냥 밤을 새우는 쪽을 선택했지.

내가 비염이 심해 간혹 코를 고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해명하자, 어느 날은 휴가 중에 수술을 해 오라고 주문하더군. 물론, 집에서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가는 부모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실 지 몰랐기에, 난 태연하게 휴가를 보내고 그냥 복귀했어. 그리고 수술을 했다고 거짓말했지. 하지만 증거가 있어야 하겠잖아? 병원 진단서를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따라서 나는 인터넷에서 찾아 본 수술의 과정을 그들에게 마치 직접 겪었다는 양 말해주었고, 가끔 스스로 코를 때려 코피가 나는 모습을 보여줬지. 비염때문에 부어있었던 코 내부 살점을 잘라서, 아직 코 안쪽이 숨쉴때마다 시큰하고 잘못 건드리면 종종 피가 난다는 말에 선임들은 근사하게 속아넘어갔고, 그렇다고 내가 밤에 코를 고는 날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플라시보 효과였는지 그 이후 적어도 엎드려뻗쳐 자세로 밤을 지새는 날은 없어지게 되었지. 

이런 식으로, 힘겨운 한 달여간을 버텨내자, 소대장이 바뀌었어. 특공연대- 우리 대대로 넘어온 전 소대장과 달리, 바뀐 소대장은 우리의 군기에 감탄했지. 야전에서는 이제 나름대로 폭력도 근절되고 부대분위기도 좋다는 말을 들었었던 나는, 육사출신 소대장이 여기를 바꾸지 않을까 생각했어. 

하지만 그는, 첫 소대장을 맡았었던 야전부대의 군기에 '이건 군대가 아니다'며 실망해 있었고, 모든 소대장의 선망인 특전사 같은 군기가 유지되고 있는 이곳을 좋아하게 되었지.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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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이 바뀌는 시점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열해봤는데, 사실 이 때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똑같은 나날들을 근근이 버텨나가던 시점이라서, 크게 기록할 일들이 상대적으로 적네요. 그렇다고 A,B혹은 그 외의 선임층이 제게 했던 가혹행위들만 줄줄이 늘어놓자니 이건 이야기라기보다는 군시절 힘들었던 경험을 징징거리는 것 밖에 안되니까. 

처음에 제 글을 시작하며 말씀드렸지만, 이 글은 미필자들을 위한 글이었습니다. 사회인의 시점으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따라서 가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 곳의 생활사를 풀어내어, 저와 같이 힘들지는 않더라도 (혹은, 여러분의 큰 형님 혹은 아버지 세대라면 저보다 월등히 힘들었겠죠) 구타와 폭력만 없을 뿐, 쓸데없는 갈굼이나, 남자들끼리의 순위정하기 놀음, 겉핥기식 행정이 판치는 군대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주변 군인들의 힘듦을 알아주며, 혹 이제 군에 입대해야 하는 미필자들의 경우 어떤 상황이라도 이 글의 경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시험이 끝났으니만큼, 최대한 빨리 다음 편들도 연재해 보도록 할게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

P. S. 이전 글들이 전부 베스트에 가 있었네요! 과분한 관심과 사랑 정말 감사드리고, 그간 읽어주신 많은 분들, 또한 이제부터도 제 글을 읽어주실 모든 분들께 역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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