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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신신 전파사의 희망 안떼나
게시물ID : lovestory_578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10
조회수 : 100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7/31 00:52:35

BGM정보 : 브금저장소 - http://bgmstore.net/view/5hvFw


 


모니터 화면이 깜빡, 깜빡 깜박…하더니 새까매졌다.
한참 타이핑을 하던 중이라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엔 오빠! 하고 외치며, 모니터의 옆통수를 통.통. 두드리고,
다음엔 야! 오빠! 하고 고함치며, 모니터를 쥐고 흔들고,
그 다음엔 참다못해 오빠새끼의 방으로 뛰어갔다.

뚱땡이 오빠새끼는… 집에 없었다.
웬일이래….

웬 소란이냐? 하고 오빠대신 나를 찾아준 것은 할머니였다.
할머니에게 "모니터가 고장 났어요. 삼일 동안 쓴 과제가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하소연을 했더니, 할머니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끌끌 혀를 찼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어.
오빠 오면 고쳐 주것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괜한 소란도 아니다. 3일을 투자한 과젠데.
모니터를 뒤집어 훑으며, AS전화번호 스티커를 찾아냈다.

스티커엔 충직한 기업의 이름, '충보 모니터'가 깨알만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충보 기업이 어딘가.

뭔가 못미더운 기업체의 이름.
전화를 걸었더니 역시나,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확인하시고 다시거시고 자시고….

울어버리고 싶어졌다.
전화기를 집어 던지며, 허엉 소리 내어 울었다.

삼일 동안 쓴 과제. 다 날렸어.

할머니가 다시 나오셨다.

"뭐 집어 던졌어? 이? 전화기? 왜 그걸 때려 부숴?
야야, 그러지 말고 저기 전파사 가봐. 전파사.
텔레비 고장 난 거는 다 거기서 고쳐. 콤푸타도 다 고쳐 줄 거야."

아아, 이놈의 촌 동네.
그 흔한 컴퓨터 수리점 하나 없고.
전파사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차갑게 식어가는 모니터를 본체에서 뜯어, 전파사로 향했다.

신신 전파사.
텔레비전. 비디오. 세탁기. 안떼나. 일체수리.

안떼나? 맞춤법 틀린 거 아닌가? 비디오는 또 어느 시대의 유물이던가.
전파사 앞에 덕지덕지 붙은 벌겋고 누렇게 빛 바란 스티커들이
별반 있지도 않던 전파사의 신뢰감을 그나마도 묵살시키는 것 같았다.

암울한 전파사 안.
기계와 기판들의 공동묘지 같으면서, 도살장 같은 난잡한 광경이 굉장히 낯설다.
알 수 없는 습기, 또 알 수 없는 탄 냄새. 아니, 녹은 냄새? 인두를 지진내라고 해야 하나….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냄새를 뚫고, 전파사 안에서 할아버지가 한 분 나오셨다.
그리곤 하신다는 말씀이.

"그게 뭐요? 티비요? 뭐 그렇게 얇아?"

이제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역시 촌 동네에선 무리야. 하고 체념하려했다.
그때. 할아버지 뒤에서 젊은 남자가 한 명 나오며 말했다.

"그건 티비가 아니라, 모니터에요. 모니터. 컴퓨터에 쓰는 거." 했다.

할아버지는 "아아~ 콤푸터? 나도 알아 새끼야."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피하며 궁시렁 궁시렁 "대학 좀 나왔다고, 더럽게 잘난 척 하네." 했다.
할아버지가 가게 밖으로 나간 듯 전파사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희망의 불빛이었다.

콤푸타도 콤푸터도 아닌, 컴퓨터라고
똑바로 발음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나는 희망의 빛을 본 것만 같았다.

구세주.
눈앞에 남자가 그리도 멋져 보일 수 없었다.

내가 물었다.

"고칠 수 있을까요?"

남자는 입술은 굳게 다물고,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남자는 모니터를 받아 들고, 전파가 안쪽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될까싶어서, 어떻게 하다가 고장이 났는지,
어떻게 순식간에 화면이 정전되었는지, 허겁지겁 설명을 했고,
그는 끄덕끄덕 설명을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며,
드라이버로 모니터의 나사를 풀어나갔다.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할아버지가, 전파사 중앙 소파에 앉더니 곧, 담배에 불을 붙였다.
칙칙, 라이터에 불꽃이 피고, 할아버지는 후~ 하고 후련하게 한 모금을 뱉어냈다.

금방 코가 따가워져왔다.
역한 담배 냄새에 눈살이 찡그려지는데,
할아버지가 험험, 큰기침을 하더니, 자랑처럼 말했다.

"쟤가 여기서 이렇게 빌빌대도, 똑똑한 놈이여. 잠깐만 기다려봐. 금방 고쳐 저 새끼."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남자가 말했다.

"사장님, 아가씨도 있는데, 여기서 담배를 피우시면 어떻게 해요…."

할아버지는 그 말에
"하, 개새끼, 내 가게에서 내 담배도 못 태우네.“
말하곤 담배를 든 채 다시 가게 밖으로 나갔다.

괜히 궁금해졌다.
똑똑한 놈.
대학 나온 놈.

할아버지 말로는 은근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 같은데.
창밖에 안떼나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는,
그것도 컴퓨터 수리점이 아닌, 구시대의 전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남자.
남자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요…. 왜 여기에서 일하시는 거예요?"

남자는 내 말을 듣더니, 수리하는 손이 멈췄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되물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좋은 대학 나오신 거 아니에요? 똑똑 하시다면서요. 왜 이런 허름한 가게에서 일하세요?"

남자는 배시시 웃더니,
"여기 대단한 전파사에요. 웬만한 대학보다 훨씬 대단해요. 제가 볼 때는." 했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여기엔 희망 안떼나가 있거든요. 저는 사실 텔레비전이나,
모니터 수리하러 온 게 아니라, 안떼나 수리하러 온 거예요."

남자는 수리하는 손을 놀리다, 나를 힐끔 보고는
"보고 갈래요?" 물었다.

"뭘요?"
"희망 안떼나."

할아버지가 담배를 다 피웠는지 전파사로 들어왔다.
문 여닫는 소리가 요란했다.
할아버지는 소리치듯 말했다. 목소리가 걸다.

"야야? 그거 빨리 마치고, 안떼나 돌리러 가자?"

남자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해질녘이면 항상 안떼나 돌리거든요. 보고가요. 모니터 수리비 공짜로 해드릴게요."

남자는 당장 안테나를 돌리고 싶은 듯 했다.
그의 몸짓이 빨라졌다.
의자를 밀어 넣고 일어서는 게, 내 대답은 어째도 좋다는 식이었다.

수리비가 공짜라면, 그깟 안테나 좀 못 볼 것도 없다는 생각에, 그의 말을 넙죽 받았다.
남자가 할아버지에게 "올라가죠?" 하자, 할아버지는 "벌써 다 고쳤냐?" 하며
덤덤히 전파사의 2층으로, 2층에선 베란다로, 베란다에선 녹슬어있는 철제 계단으로,
그리고 결국 3층의 옥상으로 올라섰다.

옥상에는

안테나가 있었다.
모를 일이었다.

동그란 회색 접시에, 삼각형 안테나가 걸려있다.
시골에 있는 것 치고 좀 커다랗다는 느낌은 있지만,
이게 뭐가 대단한 안테나라는 건지.

공짜라는 말에 속는 샘치고 올라는 왔지만,
안테나 구경이 뭐라고, 수리비도 마다하면서 남자는 서둘렀을까.

남자는 복잡한 스위치와 버튼이 있는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기계 옆에 있는 네모난, 그러니까 꼭 무전기 같이 생긴 것을 집어 들었다.

꼭 외계와의 교신이라도 하려는 것만 같았다.

할아버지는 "아, 돌려?" 했다.
남자는 거북이처럼 목을 주욱 빼더니 안테나를 바라보았다.

안테나에서 빨간 불과 녹색의 불빛이 번갈아가며,
천천히, 깜빡… 깜빡… 점멸했다.

할아버지는 그새 담배에 불을 하나 더 붙였고,
남자는 빠진 목을 접으며 "돌아요!" 했다.

할아버지가 비죽 웃었다.
깊게 담배를 빠는 모습이
자욱한 연기와
더 자욱한 주름으로 만연했다.

옥상 밖은 노랗게 물든 저녁놀.
할아버지는 가슴 주머니에서 낡아빠진 종이 뭉텅이를 꺼내 들곤,

무전기에 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아, 아아, 여가는? 희망 안떼나, 희망 안떼나, 아아, 들리는 가?
아아, 여가는 희망 안떼나. 대한민국으, 청춘들에게.

아아, 여가는 희망 안떼나.
아아, 대한민국으 청춘들에게.
신신 전파사에서 한 말씀 올리요.

아아, 대한민국으? 청춘들아….
제발루다가.
비바람에 흔들리지들 말어라.

아아, 여가는…… 희망 안떼나….

죽도록… 살기 바빠서.
아직 청춘이? 으트키 시작되고.
아, 으트키 청춘이 끝났는 줄도 모르는 청춘들에게.

아아, 여가는?……희망 안떼나…….
청춘아…. 다시 시작되어라.
아아, 여가는…

희망 안떼나…

청춘아?…… 시작되어라….」

남자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이 그렁그렁 할아버지의 뒷모습과 그 앞의 저녁놀로 가득하다.

나는 할아버지와 남자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연설과 같은 청춘아, 청춘아는 끝이 없었다.
그 사이에 남자가 내게 속삭여 물었다.

"손님은…. 몇 살이세요?"

남자가 속삭이자, 나도 괜히 조심스러워 졌다.
말로 전하지 않고, 가위, 바위하며 손짓으로 스무 살이라 표시했다.
남자가 다시 속삭였다.

"좋을 때네요."

할아버지의 연설을 계속해서 들었다.
거의 10분간의 연설이었고, 할아버지는 종이를 다섯 장이나 넘기며

청춘에게, 대한민국에게, 훈계했다.
이래라. 저래라.
훈계인지, 주문인지….

잘 모르겠다.

「아아, 여가는 희망 안떼나, 희망 안떼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연설이 끝나곤 별 말없이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처벅처벅 옥상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도 새 담배를 하나 더 무는 모습에, 나는 고개를 흔들흔들 흔들었다.
남자는 고개를 흔드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곤 씨익 웃었다.

그가 물었다.

"스무 살…. 청춘은?…… 시작 되셨나요?"

그의 물음에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그저 웃었다.

노을이 점점 짙은 색으로 익어갔다.
나의 청춘은 시작되었나?
 
스스로 묻고도, 답을 할 길이 없었다.
스무 살.
 
청춘은 어디부터가 시작인가.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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