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몽항쟁. 그 진실은?
고려와 몽고가 30년에 걸쳐서 싸운 대몽항쟁에 대해서 우리는 기존까지 세계의 여러국가들을 힘한번 들이지 않고 정복했던 몽고에 맞서서 대항했던 고려가 대단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최강 몽고에 맞서서 싸운 비록 항복은 했지만 30년동안이나 싸웠던 고려에게 자긍심을 가졌었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차근 차근 하나둘 씩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왜 몽고군은 고려를 칩입하려 했던 것일까요? 몽고군이 고려에 처음 들어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연적 요소들이 많이 끼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몽고는 요의 잔존세력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고려의 국경에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당시 고려의 집권자였던 무신정권의 최충헌은 몽고군이 고려에 들어오자 일종의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바짝 긴장합니다. 그런데 몽고가 고려에 들어온 것이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자 마음을 놓죠. 뒤이어 몽고가 요토벌군을 요청해 오자 파병군을 편성해서 보내주기까지 해줍니다.
이랬던 몽고는 왜 고려에 갑작스럽게 군대를 파병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예전에 말씀드렸던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하려 했던 속사정과 비슷합니다. 어찌되었던 간에 당시 중원의 패권을 쥐고 있었던 금과 고려는 동맹관계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요를 멸망하고, 그 기세로 금까지 멸망하려고 들었던 몽고로서는 배후세력이었던 고려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죠. 고려가 겉으로만 금과 동맹을 맺고 실제로는 남송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몽고에게 아무런 이해관계가 되지 못했습니다. 몽고로서는 고려의 내부사정까지 봐줄 이유가 없었죠. 군사력의 절대우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금과 비교했을때 그렇게 자신할 수 없었던 몽고로서는 귀찮은 존재인 고려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소위 '대몽항쟁'중에 초반기와 중반기에 해당하는 약 20여년간의 기간이 바로 이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고려는 이러한 몽고의 요구에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그리고 왜 몽고는 20여년이나 되는 시간동안 계속해서 고려를 침공했을까요?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고려가 강화도로 정부를 옮긴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 고려정부는 강화도로 정부를 옮겼을까요? 몽고의 의도가 여타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고려의 완전정복이 아니라 '항복'에 의도가 있었음을 그들이 몰랐을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적당히 잘 비위만 맞춰주면 예전 요나 금과 같이 몽고는 고려의 자치권을 양해해줬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굳이 강화도로 정부를 옮기고 적극적인 대몽항쟁을 선언했습니다. 왜일까요?
해답은 앞에서 말씀드린 '최충헌'에 있습니다. 최씨정권의 창시자이기도 한 최충헌은 아들 최이에게 정권을 넘겨줍니다. 그런데 최충헌은 최이에게 정권을 넘겨주면서 이른바 제왕교육을 시킵니다. 제왕이 받아야하는 교육과 자질을 아들에게 배우토록 한거죠. 그의 권력을 아들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도 최충헌의 측근세력과 최이의 측근세력들이 서로 대립각을 일으켜서 싸우기까지 하는등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정도라면 한나라의 권력자라기 보다는 거의 집권자의 후계 계승상황입니다. 즉 당시 고려는 임금이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최충헌과 최이가 최고권력자였던 셈입니다. 일본 중세시대의 천황과 막부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런데 몽고군이 칩입해서 사대관계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상황에 따라서는 내정간섭도 할 수 있다는 의사표시입니다. 동시에 몽고는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이로 하여금 몽고로 들어오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당시 고려에서 누가 권력을 쥐고 있었는지 몽고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같은 조건이 성사되고 몽고에서 고려에 내정간섭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최이의 권력이 굉장히 위태로워집니다. 어느 시대건 권력자에 반대하는 세력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왕조시대에 왕에 준하는, 아니 그 보다 더 높은 권력을 쥐고 있는 최이에게 왕이 반감을 품고, 왕을 둘러싼 세력들이 반감을 안 품었을 꺼라고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최이로서는 몽고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면 최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이었죠. 최이로서는 몽고에 항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신이 항전할 의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요. 실제로도 몽고군이 계속해서 칩입해 올때마다 고려는 아니 최이는 계속해서 몽고진영으로 사신을 보내서 군대를 물러보내기만 한다면 정성들여서 몽고를 사대하겠다. 그러니 제발 물러나게 해달라. 라는 사정을 계속합니다. 그리고 이 요청을 받아들여서 몽고군이 물러가면 몽고가 요구조건으로 내걸었던 최이의 입조와 국왕의 출륙을 계속 거부합니다. 이렇게 20년이라는 시간을 끈겁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시간을 끄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몽고도 눈에 뻔히 보이는 최이의 이러한 변명과 오리발을 계속해서 믿었던 걸까요?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 시피 몽고군은 고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기만 하면 목적을 충분히 달성합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최이가 내세우는 변명을 믿는 척하고 돌아갔다가 고려가 약간 이상하다 싶으면 다시 쳐들어와서 최이로 하여금 다시 사대하겠다는 약조를 받아내고 돌아가기만 하면 그뿐입니다. 몽고군은 알면서도 최이의 변명을 들어주었던 겁니다. 강화도를 침공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몽고군이 칩입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몽고군이 해전에 약해서 강화도에 칩입하지 못했다. 라고 대부분의 분들은 생각하시는데요 1270년에 대 일본 원정에서 몽고군은 상해에서 일본 규수지역까지 단 한번의 정박 없이 횡단합니다. 그 넓은 거리도 단숨에 상륙하는 몽고군이 조금 넓은 강에 불과한 강화도 해협을 무서워서 통과 못했을리가 없습니다. 못한게 아니라 안한겁니다. 최이와 몽고군 둘다의 이익이 이러한 지점에서 맞아 떨어진거죠.
결국 죽어나는건 백성들입니다. 최이는 애초에 몽고군과 적극적으로 싸울 의사가 없었습니다. 몽고군과 적극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군대가 편성되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한 최이의 사병들은 물론이고 국가의 상비군들까지 모아서 전쟁터로 파견해야 하는데 이 군대가 언제 쿠데타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최이는 최충헌에게서 제왕교육을 받았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시대상황이 최이의 왕위등극을 거부하고 있었던거죠. 즉 그때까지도 최이에 대항하는 세력이 최이의 통치를 막을수는 없지만, 최이의 왕위등극을 막을만한 힘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항하는 세력을 누르는 기본원천이 최이의 사병. 즉 삼별초였습니다. 근데 대몽전쟁때문에 이 삼별초의 대부분을 최이와 분리하면? 아니 그걸 넘어서서 유명무실화 되어있는 국가의 상비군을 제대로 정상화 시킨다면? 이 군대가 언제든지 최이에게 부메랑이 되어 날라올 수 있었습니다. 최이로서는 가장 무서운 사태였습니다. 이에 대비하는 가장 현명한 계책은 안싸우는 겁니다. 즉 철저하게 자신의 사병들을 자신들 휘하에 두고 상비군들을 계속해서 유명무실화 시키는 겁니다. 실제로도 최이는 이에 대항하는 삼별초 휘하 자신의 군사들을 유배시켜 버리거나 죽여버립니다. 적병에 맞서서 싸우겠다는 군사들을 숙청시켜 버린겁니다.
몽고군은 굳이 공들여서 칩입하지 않아도 되고, 들어와봤자 대항하는 세력들도 없으니 마음껏 약탈을 합니다. 최이는 군사들을 보내주지 않고 백성들 스스로 방어하라는 지침을 하달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산성입보 정책입니다. 험준한 산과 섬으로 들어가서 알아서 피해있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몽고와 최이가 서로 눈에 훤히 들여다 보이는 협정을 다시 체결하고 돌아가면 백성들에게서 조세를 다시 착취합니다. 그리고 그 착취한 조세를 가지고 최이는 고려의 지배층들의 환심을 샀습니다. 백성들이 약탈당하던 말던 간에 그렇게 20년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최이가 죽고 아들 최향이 다시 정권을 이어 받으면서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금이 멸망하고 남송으로 몽고가 사정권이 들어오면서 몽고로서는 고려와 굳이 이렇게 눈에 훤히 들여다 보이는 장난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러버려 두면 대국의 체신문제가 제기되죠. 즉 몽고는 진지하게 고려를 정복할 계획을 세웁니다. 몽고가 다섯번째로 칩입하면서 이 몽고의 계획이 드러납니다. 여지껏의 장난 수준과는 완전히 다른 몽고군이 흔히 쓰는 방법인 '도성'이 시작된겁니다. 도성이란 몽고군이 점령하는 성에서 사람이라고는 한명도 남겨두지 않은채로 모조리 죽이거나 포로로 끌고가는 몽고군의 잔학한 행위를 일컫습니다. 실제로 실크로드의 중계지로서 엄청난 부를 누렸던 사마르칸트는 몽고군의 칩입을 받고 대항했으나 점령당한 뒤 칭기즈칸의 명령을 받아서 20만명이나 되는 성내 주민들이 모두 학살당합니다. 이후 실크로드는 그 화려함을 잃어버리죠. 그 도성이 고려에 닥치기 시작한겁니다. 단순히 험준한 산이나 섬에 들어가는걸로 문제가 해결되는 수준이 아니게 되어버렸습니다. 몽고군이 이때끌고간 고려의 백성들만 50만명이 넘습니다. 엄청난 숫자였죠.
그런데 최씨정권의 문제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몽고군이 단단히 결심하고 칩입하면서 최씨정권이 조세를 걷어가는 통로를 차단해 버린겁니다. 이렇게 되자 진짜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강화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 지배층들의 불만은 높아져가고. 평소처럼 몽고군에게 사신을 보내도 몽고군은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최향의 입조와 국왕의 출륙을 요구합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고려조정. 아니 최씨정권은 결국 스스로 자멸합니다. 20여년에 걸친 항쟁이 단 두번의 본격적인 침략때문에 무너진겁니다. 몽고군이 작심하고 공격하자 고려는 힘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물론 고려의 주력군들은 모두 강화도에 집결해 있었기때문에 고려가 작심하고 몽고군과 대대적인 전면전을 벌였다면 사정은 또 모릅니다. 한반도 지형이 원래 몽고군같은 유형의 군대에는 쥐약인 지형인데다가. 요충지만 잘 골라서 지키기만 하면 얼마든지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지형이었죠. 말 그대로 들어오기는 쉬우나, 나가기는 어려운 지형이 바로 한반도입니다. 고려는 아니 최씨정권은 이 지리상의 장점을 스스로 저버리고, 군사들 한번 내보내지 않고 자신들만의 이익만을 추구하다가 자멸한겁니다. 삼별초가 이후에 벌이는 행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역사란 말 그대로의 역사이어야 합니다. 대몽항쟁은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당시 고려의 지도층들이 벌인 행각들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부끄러움의 역사를 적당히 포장하여. 내 입맛대로 포장해서 서술한다는 것. 그건 더 큰 부끄러움일 것입니다. 일본의 지도층들이 행하는 행각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역사의 자의성이 얼마나 큰 위험을 낳는가를 알게 해줍니다. 대몽항쟁을 서술하는 국사책, 그리고 흔히들 생각하는 '진실'에서 이 위험성이 또아리를 틀고 우리들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출처: http://www.mediamob.co.kr/machiavell/frmView.aspx?list=blog&id=98080&page=1 마르세리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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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해볼만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몽항쟁(?)에 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나름 퀄리티 있는 글로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