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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 개입했다해도 광주의 불명예 아니다
게시물ID : sisa_592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만원글
추천 : 7/9
조회수 : 36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8/08/31 21:29:19
Name 지만원 Subject 북한군이 개입했다해도 광주의 불명예 아니다 북한특수군 개입 의혹과 광주시민과의 관계 여기에 매우 중요한 명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5.18단체 측은 광주사건에 북한 간첩이 개입했다거나 북한 특수공작원들이 개입됐다는 것에 대해 몹시 불쾌해 하며 이를 명예훼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광주사건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지 않고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명예훼손으로 여기면서 고소-고발을 했고, 이 고소고발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5.18 사건에 간첩이 개입됐다거나 북한 특수공작원들이 개입됐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광주시민과 5.18단체의 명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주사건에 북한 특수집단이 침투했다면 그것은 특수집단을 불법으로 내려 보낸 북한과 이를 막지 못한 계엄군의 불명예이지 결코 광주시민의 불명예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광주시민은 간첩이나 특수집단을 초청한 바도 없고, 그런 것들에 대해 법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광주시민의 초청한 것도 아니고 책임질 수도 없는 사항에 대해 어째서 광주시민이나 5.18단체가 불명예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필자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북한 개입에 대한 의혹들을 제기하고 상호 의견을 교환하는 등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5.18단체와 광주검찰이 나서서 협박하고 린치를 가하고 광주법원이 형을 내린다는 것은 5.18의 명예를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북한의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간첩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당시 계엄당국도 간첩의 존재를 확인했고, 북한과 관련한 불순세력의 존재를 의심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방위병으로 있다가 시민군 기동타격대에서 활동했던 이재춘시 역시“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라며 간첩의 개입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광주 사건의 주동자 역시 간첩의 존재를 믿고 있었으며 또한 당시 광주작전을 책임지고 수행했던 호남사람 소준열 사령관 역시 국회와 법정에서 같은 취지의 진술을 했다. 1996.7.11. 5.18사건 제1심 21차 공판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전남 도청 안에 적색분자가 섞여 있다. 그 근거로는 북괴의 개성 통혁당 방송에서 상무관하고 도청 사이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위와 같은 사실을 방송한 것을 정보참모로부터 들었다”고 진술했다. 시민군이 느낀 것과 작전사령관이 느낀 것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듯 불순세력의 개입을 입증하는 정황증거들은 많이 있어도, “5.18광주에서만은 절대로 불순세력이 있을 수 없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정황적 증거는 없다. 아니 성격상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수백 명이 암매장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시들지 않고 있다. 암매장된 시체가 그토록 많다면 이는 살아있는 북한군이 북한개입의 의혹을 지우기 위해 죽은 북한군을 암매장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수사 자료를 공개하라고 소송을 냈을 때 정동년씨는 5.18사망자가 2,000명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필자가 이를 해석하기로는 꼭 2,000명이라기보다는 그 정도로 대규모의 시신들이 있었고 그 시신들이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1980년 5월말 계엄사가 조사한 내용은 민간사망자가 162명, 1995년7월에 검찰이 내놓은 수사결과는 민간 사망자가 166명이다. 그렇다면 천명 이상의 사망자는 다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대규모 암매장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북한군 장교단은 600명 정도의 특수군이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꼭 600명이라기 보다는 상당수가 내려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확인된 시신 166명 중 신원불상자 13명을 뺀 나머지는 모두 신원이 확인되었다. 대부분의 시신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더구나 당시 시체에 대한 보상액(당시 15,000달러)은 상당했다. 그래서라도 시체에 대해서는 반드시 주인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족을 실종한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끝까지 가족의 행방을 찾아 달라 당국에 호소했을 것이다. 만일 166명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암매장 되었다면 그 시신들의 대부분은 주인이 없는 시신들일 것이다. 주인이 없는 수백 명 단위의 시신이라면 그것은 북한특수군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렇다면 북한 특수군이 불법적인 개입의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그들의 전우들을 대거 암매장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만일 북한 특수군이 광주시민도 모르고 군 당국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됐다면 그들은 계엄군에 직접 대적하기 보다는 뒤에서 과격한 시위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더 큰 가치를 두었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요소 중의 하나가 뒤에서 시민들을 쏘아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북한의 가장 높은 전략은 남한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를 불신하도록 하는 것이다. 몇 명의 계엄군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북한특수군의 목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5.18측이 제기하는 대규모 암매장 의혹은 북한특수군 개입 의혹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이는 역사의 숙제로 남겨져야 할 대목일 것이다. 5.18을 반드시 민주화운동으로 불러야 하는가? 또 한 가지 명제는 5.18은 반드시“5.18민주화운동”이라고 불러야 하고 이를 어기면 범죄행위가 되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5.18을 공식적으로“5.18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정치인들의 타협과 절충에 의한 결과였다. 정치인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역사를 놓고 정치인들끼리의 타협안을 가지고 국민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5.18역사는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숙제다. 먼저 학문적 분석자들에 의해 역사규명이 이루어 져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5.18에 대한 성격이 다양하게 규정돼야 할 것이다. 한국 최고수준의 노동운동가 백태웅(필명 이정로)은 5.18을 민중봉기, 민중항쟁, 광주봉기, 무장혁명, 무장봉기 등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무장시위를 주도했던 김종배 역시 ‘광주폭도’라는 말을 사용했다. 우리는 지구촌에 살고 있다. 5.18을 연구한 미 헤리티지 재단은 5.18을‘폭동’‘민란’‘무장봉기’‘반란’이라고 불렀다. 5.18민주화투사 윤기권의 월북사건 1991년3월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3월4일, 광주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 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는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광주의 열사 윤기권의 월북사실을 보도했다. ‘월간 말’도 1991년 5월호 “5.18 특집기사”에서 “윤기권은 1980년 5.18당시 광주 대동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광주 5.18유족회 회장 전계량씨의 아들 전영진(사망)과 동기 동창이었다. 윤기권은 월북 전까지 광주시내 모 극장에서 선전간판 그리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는 월북하기 위해 광주를 떠나기 전 당국에서 2억여 원의 광주보상금까지 수령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는 5.18과 북한이 보이지 않게 연결돼 있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5.18단체 건국60년 개념 배척사건 국가보훈처와 대한민국건국6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강영훈 전총리 주도)가 건국 6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국민화합을 도모키 위해 2008년8월9일부터 31일까지 대표적 민주화 성지인 ‘서울4.19민주묘지’와 ‘광주5.18민주묘지’에서 “2008 국립묘지 설치예술제”라는 대규모 예술제를 동시에 마련했다. 경건한 추모 분위기가 강조되던 국립묘지의 이미지를 바꿔 시민들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탄생케 하자는 뜻도 담겼다 한다. 4.19묘지에는 경내 입구, 연못, 잔디광장에 무궁화와 태극기 등 한국의 상징물과 색깔을 이용한 대형 설치작품들이 전시됐고, 5.18묘지에는 추모, 치유, 조화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통해 희망, 염원, 민주의 바람을 선사했다고 한다. 4.19 묘역을 찾은 시민들은 신선한 충격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8월23일의 뉴스를 보면 5.18단체와 일부의 광주시민들이 5.18묘지에 건국60주년은 수용될 수 없다며 심하게 반발했고, 보훈처는 예술품들을 철거한다고 했다. 논란이 되는 작품은 중앙통로에 설치된 김해곤 섬아트 연구소장의 ´치유´라는 작품인데, 치유와 안정을 상징하는 2개의 깃발에 각각 ´건국´과 ´60년´이라는 글자가 노란색으로 크게 쓰여져 있다 한다. 이 "건국 60년"이 싫다는 것이다. 5.18단체는 "광복과 건국에 대한 논쟁을 떠나 5.18 영령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마련된 5.18묘지에 이 같은 성격의 작품을 설치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국가보훈처에 강력 항의했고, 이 지역 시민들과 광주시 민주당도 공식적으로 반발했다. 4.19와 5.18은 분명히 다르다. 4.18 묘역은 이번 건국60주년 기념 및 국민화합 예술제를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5.18묘역은 건국60년이라는 개념이 수용될 수 없다며, 거금을 들여 예술가들을 동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고하여 만든 예술작품을 철거하라 한 것이 다른 것이다. 이는 4.19와 5.18이 비록 같은 민주화 명찰을 달긴 했지만 이념의 스펙트럼에서는 정 반대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만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5.18묘역은 분명 국립묘역이다. 국립묘역은 누구나 가서 참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5.18묘지는 사람을 선별하여 입장을 시킨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는 곳이 바로 5.18 모역인 것이다.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별도의 해방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5.18묘지를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면 국가시책에 따르는 것이 의무일 것이다. 국가시책에 따르기 싫으면 국립묘지로 지정하지 말고 비정부 단체 명의로 관리해야 할 것으로 본다. 관리비용은 국민이 대고, 묘지를 관리하는 단체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어디가 잘못돼도 많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여기에도 5.18단체의 이념적 정체성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2008.8.30 시스템클럽 http://systemclu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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