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베에 올라와 있는 이순신 장군님 글 보고 좀 찾아보니 재밋는 기사가 있음.
2012년 10월 9일 기사임. 근데 완결을 안내셨음. 다음 기사가 기다려 짐.
(출처 : http://www.dailyj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699)
손은수 기자 [email protected]
요행, 이충무공은 쇠사슬로 이겼을까?
13vs133으로 세계 해전 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명량해전.
명량해전의 승리에 대해 많은 이들은 일반적으로 쇠사슬(철쇄, 鐵鎖)의 사용을 많이 떠올리는데, 쇠사슬은 해남과 진도 간 울돌목 해협 양쪽으로 걸어서 적선이 밀려올 때 이를 들어 올려 적선이 곤두박칠치게 해 침몰시켰다고 하는 전술이다. 지금까지도 중장년층은 학창시절 책을 통해 그렇게 접해왔고, 몇 해전 드라마로 방영 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그렇게 재현된 바 있다.
하지만, 병법에 있어서만큼은 완벽한 전술 운용을 꾀하며 미래까지도 예지했던 군신(軍神) 이충무공은 과연 쇠사슬로써 명량해전의 대승을 이끌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전술 운용은 없었을까? 우선 쇠사슬에 대한 의문을 풀어보자.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한다는 것은 지금 시대에 와서도 불가능할 것이다는 견해가 많다. 일단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이충무공이 송지면 어란진에서 진도 벽파진으로 건너와 명량해전에 임하기까지의 시간은 보름여. 보름 동안 500m에 달하는 쇠사슬의 제작과 운반, 설치, 작동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운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칠천량의 패전으로 조선수군은 회생 불능 상태로 쇠사슬을 만들만큼 자원이나 인원이 없었다. 실지 당시엔 새로 대포를 만들 쇠가 부족해 조정에 하소연하기도 하고 쇠를 바치는 자는 면천까지 시켜준다고 했다.
물론 난중일기 초반부에는 임진년에 전라좌수영 앞에 쇠사슬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도 총 소요시간이 3개월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최근 연구에선 배를 파괴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주요 군사적 시설과 정박한 배들을 보호하는 방어시설에 이용됐다고 밝혀졌다.
공학자들 또한 쇄사슬 설치를 통한 승리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만약 명량에서 쇠사슬을 설치했다하더라도 왜선이 걸리면, 걸려서 전복되는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려는 왜선의 운동에너지로 인해 그 줄이 끊어져 버린다고 주장한다.
당시 명량해전에 참전한 왜 수군의 세키부네의 배수량은 100여톤, 울돌목의 조류 속도 12노트에 자체 속력 5노트를 더하고, 거기에다 각종 병장기와 전투원까지 가득 태우고 움직인다면 그 운동에너지는 훨씬 높아지고, 그것도 여러 척이면 더욱 높아진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철쇄설을 주장할 때, 철쇄의 무게는 약 4톤이라 했다. 공학자들은 그 정도로 걸었다가는 오히려 울돌목 물살의 자체 속도에 휘말려 쇠사슬이 떠내려 가버린다고 하는데, 공학자들은 그 정도의 장력을 가진 사슬의 무게는 1m당 1.17톤이고 이걸 울돌목에 놓으려는 길이 352m+@의 철쇄에 적용하면 최소 400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400톤의 철쇄를 움직이기 위해선 9000명의 인력이나 말 500여필의 힘이 필요하다고 전하며 불가능하다고 전한다.
1751년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편을 보면 바다위에 머물러 쇠줄을 돌위에 가로질러 걸고서 적을 기다렸다고 적고 있다.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1799년 간행된 [호남절의록]과 그 뒤 그의 후손들에 의해 20세기에 재편집된 [현무공실기]에는 가장 폭이 좁은 곳에다 철쇄를 설치하여 적선을 걸리게 했다고 적고 있다.
우선 일본의 기록이나 일본의 국민은 왜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진 이유를 이충무공의 전략 전술보다는 쇠사슬에 의한 부주의에 졌다고 믿고 있다. 건데,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머리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이들이라고 여겨 싸움에 있어서 완벽한 전술과 전략에 의해 농락 당했을 때 가장 수치스러워한다. 그리해 아오야기의 말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택리지와 호남절의록은 그 기록의 근거 자체를 민중의 설화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신빙성이 의심된다.
택리지 자체에 언급된 임진왜란의 기록도 너무 간략하고 부정확하며 택리지 자체가 지리서인 만큼 명량해전의 고증 보다는 현지에서 들은 설화를 기록할 가능성이 너무 높은데 이 역시 임란후 150년이 지난 후라, 이 역시 그 증거론 부족한 면이 많아 전사의 사료로써는 부족하다.
호남절의록 역시 임란 이후 200년이나 지난 후 다시 쓰여진 김억추의 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는데, 실제로 호남절의록의 김억추의 기록을 다른 사료와 비교하면 사실과 다른 내용이 있고 그의 용력이나 일본 장수의 용모 등이 설화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충무공 또한 장흥 회령포에서 12척의 배를 가지고 해남 북평 이진으로 왔을 때, 마침 김억추가 배를 가지고 합류할 당시 김억추의 배가 선격과 기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데 대해 불쾌함을 표시하면서 만호(중령) 쯤이면 적합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 조정의 힘을 받아 장군이 된 것에 불만을 적고 있다.
철쇄가 승리의 원인이라면 신뢰할 수 있는 사료나 공식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현재로썬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쇄사슬은 이충무공이 왜수군측에 일부러 흘린 위장 전술이었을까? 진짜 전략과 전술은 없었을까?
명량해전 필승의 전략전술은 없었을까?
만약 명량에서 왜적을 막지 못했다면, 물자를 보급 받은 왜군은 한양을 점령한 후, 그 길로 명나라까지 쳐들어감과 동시에 왜의 수군은 중국 산동반도로 상륙한 뒤 명나라를 집어 삼켰을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국세가 몹시 약해 가던 시기였고, 그리해 명나라가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한 근본이유는 그런 수까지도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 만큼 명량해전은 조선이나 왜군, 그리고 명나라까지 얽힌 그야말로 3국의 존폐가 이 한 판에 모두 담겨 있었을 만큼 중요한 일전이었다.
세계 해전 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13vs133의 명량해전은 많은 부분에서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과 사학가들에 의해 이 미스테리 해전이 연구되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그 많은 논문이나 학설 중 명량해전에 대해 논리적이거나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과연 이충무공은 어떻게 해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그날 난중일기의 기록과 함께 해남 우수영 울돌목(명량)의 지형을 따라 한 번 그 날의 승리를 추론해 가 보자. 명량해전이 일어난 1597(정유)년 (음) 9월 16일 난중일기의 첫 머리를 보면 <아침에 별망군이 나와서 보고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돌목을 거쳐 곧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했다. 아침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의 시각은 대략 오전 8시 전후, 당시 왜 수군은 어란진에 주둔해 있었고, 공격 당일 왜 수군의 본대 330여척은 이른 새벽 횡렬로 이동하며, 진도 벽파 해협을 거쳐 울돌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명량해전에서 왜 수군이 공격선으로 선택했던 건, 둔탁하게 움직이는 대형 안택선보단 울돌목의 물살과 지형을 고려해 기동력이 빠른 중소형 돌격선인 세키부네였다. 또, 명량의 좁은 물목은 세키부네 133척이 한꺼번에 전투력을 발휘하기에는 비좁았기에 기동전술에 능한 해적출신 구루지마 함대의 세키부네 30여척을 먼저 울돌목 안쪽으로 출항시켰고, 곧바로 전선 100여척을 뒤 따라르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모습을 보고 조선수군의 정찰대(별망군)는 신기전을 쏴 올려 적함대의 발진과 그 규모를 이순신에게 급하게 보고했다. 이어지는 난중일기엔 이충무공이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고 적고 있다.
사실 이 부분은 명량해전에 있어 가장 미스테리 한 부분이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조선수군의 전술운용과 아군의 정보와 관계된 것은 명쾌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또 조정에 보내는 장계에도 어떤 전술과 의병술을 써 적군을 물리쳤는지 세세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혹여나 아군의 정보가 적군에게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일부러 그러한 것으로 엿보인다. 그로 인해 많은 학자들과 연구가들은 명량해전의 승리가 우수영 울돌목의 해류를 이용했다는 것엔 의견의 일치를 보이지만 “먼저 기습을 당했다” “또 전술적 운용 형태에 대해선 일자진이다 학익진이다” 아니면 각기 다른 주장을 펴며 의견이 분분한 상태이다.
사실 명량해전에서 어떤 승리를 이뤘느냐가 설명되기 위해선 ‘해전이 일어난 장소가 정확히 어디였느냐? 울돌목 주위로 조선수군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었느냐? 또 조선수군의 첫 공격시점은 언제 시작되었느냐?’이다.
그리고 그림 1의 지점에서 싸운다면 왜 수군이 일단 진도대교를 넘어와 버리면 물살이 역방향이기 때문에 다시 왜 수군의 본대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아 자연스레 울돌목의 물살 속에 갇히게 된다.
또, 울돌목 안쪽에서 양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전투선의 총합은 30~40여척 정도, 그 정도면 더 이상 들어 올려야 들어 올 공간이 없다.
실지 명량해전에서 격퇴시킨 왜 함선의 수는 30여척정도다. 이는 결국 실제 싸움에서도 30~40여척과 싸웠다는 이야기인데, 이충무공이 싸우기 전 그렸던 전투의 그림 또한 왜 함선 100여척은 울돌목에 끌어들이지 않고 왜 수군의 선봉 부대인 30여척과 싸움, 바로 1대3 정도라면 능히 해볼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고, 이충무공의 예상처럼 그 30여척이 진도대교를 먼저 건너 왔을 것이다.
다음은 조선수군의 주변배치, 당연히 지형에 숨는 엄폐 된 상태였을 것이다. 싸움에 있어서 적에게 최대의 치명상을 주기 위해선 단 한 번의 강력한 기습선제공격, 그 일격을 위해선 당연히 기습작전이 필요했을 것이고, 기습작전은 그 지역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엄폐 속에서라야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미 전술전략에 있어 신의 경지에 이른 이충무공이라면 의당 울돌목의 지형과 지물을 최대한 이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조선 함대가 포진해 있던 배치도를 그려보면, 우선 이충무공의 대장선이 엄폐했던 지역은 울돌목의 바로 뒤편(금강산 횟집 아래쪽)이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명량해전에 참전한 김응함과 안위, 김억추의 선단은 이충무공이 난중일기에서 <한참 싸우다 여러 장수들을 돌아 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는 말을 말미암아 양도 뒷부분(그림 4의 지점)에 감추어 두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또한 왕조실록에 일반 어선들이 후미에서 싸움을 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수군을 도왔던 일반 어선은 아마도 적이 쉽게 보일 수 있도록 먼 바다에, 추정하면 임하도 부근 정도에 정렬시켜 허장성세(虛張聲勢)로써 활용했을 것이다.
여기서 수군 함대가 항로를 잡을 때는 미리 척후병을 보내 상황을 점검케 하는데, 당시에도 왜수군의 척후병은 미리 울돌목을 점검했을 것이다. 그리해 조선함대는 왜 수군이 다가올 때까지 최대한 우수영에 집결해 있다가 짜여진 각본 아래 순식간에 엄폐할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나타나 있듯 이 충무공은 그림 1의 지점을 중심으로 진도 녹진방향(육지) 쪽과 우수영, 양도에다가도 화포를 숨겨둬 첫 공격시점에서 공격의 예봉을 극대화 시켰을 것이다.
본래 이순신의 함대에서 첫 포격이 시작되면, 양도 뒤편에 숨어있는 김응함과 안위가 항진하는 왜 수군 앞을 막아서며 포격을 가하거나 양도를 돌아서 나와 구르지마 선단의 상단부위를 화포공격 후 돌진, 그 즈음 이순신은 곧바로 구루지마의 후미를 돌진해 초전에 30여척의 배를 무기력화 시켜버리기로 약속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의 첫 공격을 알리는 함포소리가 울려 퍼지자 울돌목을 건너기 위해 끝도 보이지 않게 대기하고 있던 왜 함대를 본 김응함과 안위, 김억추는 겁에 질린 나머지 멀리 물러났고, 이순신의 선단만이 구르지마 선단의 후미쪽을 공격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오던 또 다른 왜의 전투선이 이순신의 선단의 후미 쪽으로 다가오며 이충무공은 적진 속에 갇히게 되고...<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