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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직구주의) 미필자들은 몰랐던, 그 곳의 이면 (2)
게시물ID : military_275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류세아
추천 : 20
조회수 : 1733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3/07/25 23:59:55
전번 게시글은 댓글에 링크로 달아볼게요.
우선 말씀드렸듯이 저는 10년도에 입대했고, 이 글은 100%현실대로 쓰여졌습니다.
제가 입대해서, 보고 느낀 일들을 최대한 그대로 적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겁을 먹은 제가 무척이나 찌질한 생각을 했던 것도, 리얼리티를 위해 떠오르는 느낌 그대로 적었습니다. 
미필자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현재는 강압적 선진병영문화가 꽤 널리 퍼져서, 이 글에 쓰여진 만큼의 구타 폭행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됩니다. 아버지, 남동생, 오빠, 남자친구가 겪었을, 혹은 겪었을 수도 있는(특히 아버지의 경우, 이것보다 월등히 심하게 겪으셨을 겁니다..)이야기를
미필자분들도 이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엿보고 공감해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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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이야기에서 첫 구타 경험까지 말했었나? 그럼 이제 그 다음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아다를 떼었다'라는 속어가 있지. 이건 우리네 말로는 '동정을 잃었다, 처녀성을 잃었다' 는 뭐 그런 뜻이지만, 그곳에서는
나한테 '쟤 아다 떼었대'라는 말을 '첫 구타를 당했다'라는 표현으로 사용했어. 그리고 이제 나는 '때려도 되는' 병사가 된거지.
첫 구타는 상병~병장의 높은 짬에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나 봐. 나 역시 이때는 너무 정신없고 겁에 질려 살아서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아.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필요한 간단한 우리 자대의 설명을 해 주자면, 우리 자대는 남쪽 캠프와 북쪽 작전 캠프로 구성되어 
있었어. 따라서 남쪽 캠프에서의 훈련 및 휴가, 정비와 북쪽 작전 캠프에서의 다양한 작전활동으로 한 달을 이등분해서 
생활했지. 여러분이 흔히 생각하는 각종 유격, 혹한기 훈련은 존재하지 않고, 행군 훈련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어.
북쪽과 워낙 가까웠기에 비상시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데, 행군이란 명목으로 병력이 멀리 빠져버리면 그 시점에서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였지. 

대신에 북쪽에서 행하는 작전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이루어져 있었고, 그에 따라 이등병이 처음 전입왔을 경우 외워야
하는 작전예규들이 엄청 많았어. 또한, 이런저런 훈련이 빠지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각종 형식의 전투훈련과 기동훈련, 
사격훈련을 배웠고, k1,2,3,4,5,6,11 저격소총 등 개인화기 및 소수의 인원이 다루는 화기에 대해서 빠삭히 공부해야 했지.
또한 체력 단련이 자체적으로 매우 고강도여서, 평이하게 일과만 계속해도 상병 이내로 특급전사를 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

나도 작전 예규 목록을 받았고, 선임들의 군번 등 소대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외워야 했지. 첫 작전이 15일 내로 있었기 때문에,
15일 내로 그 많은 목록과 선임들의 얼굴, 군번을 외웠어야 했어. 평소 외우는 것을 지지리 못했던 나로서는 고역이 따로 없었지.

또한, 느린 몸도 한몫 했는데,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는 무리없이 이등병 첫 체력검정부터 특급을 판정받았지만 
3km달리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13분 이하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 빠르게 장비를 착용하는 비상대응태세 역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심하게 느렸었지. 그래, 내가 고문관이었던 거야. 

군대에서는 평균만 하면 편하게 생활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난 잘하는 것에 비해서 못하는 것에 발전속도가 매우 느렸어.
첫 작전 비상대응 때는 나 때문에 분대의 비상대응이 10초 가까이 늦어지기도 했지. 물론 이 때문에 얼마나 구타를 당했는지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을게. 더 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으니까.

첫 북쪽 캠프에서의 15일은 야간작전이었어. 야간에 초소를 점령했고, 몇 개의 초소에 몇 개의 근무조가 로테이션하며 
투입되었지. 나는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너드에 가까워서,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밤문화 혹은 주류문화와의
거리는 매우 멀었지. 대학도 좋은 편이고, 학점경쟁 때문에 밤에 놀러가기보단 도서관에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실험실에서의 해부학 실습 이야기, 각종 신기한 공학 이야기 등등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은 나에게, 물론 몇몇 선임은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하필이면 나와 오래 군생활을 같이 할, 앞으로 A라고 칭할 1년차이 선임이 
날 완전히 싫어하기 시작했지. 

첫경험 이야기를 하라, 자세히, 어디부터 시작했는지, 어떻게 만나서 어디서 했는지를 설명해보라고 한참을 닥달해도 
내가 그런 것들에 대해서 뭐 이야기 할 게 많이 있나. 밤마다 클럽에서 여자랑 모텔행을 했던 것도 아니고. 결국 질린
A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괴롭히는 것에서 자신의 재미를 찾기 시작했지. 캄캄한, 둘밖에 없는 초소에서 초소별로 
2여 시간씩 2~3초소를 돌아야 하는데, 각종 괴롭힘 - 예를 들면, 왼쪽 정강이를 차는 것과 오른쪽 정강이를 차는 것 중에
어디를 차는 것이 더 아프냐 같은 - 을 당하면 정말 죽고 싶어져. 사실 어디가 더 아프다고 말하면 '그 쪽을 집중공략
해야겠군'이라며 더 때리고,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면 모르는 게 어딨냐고 다시 때리며 '아프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면
내가 그렇게 약하냐, 아플 때까지 때리겠다 라고 말하며 때리니까 따로 답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닥달한다고 이것저것 말한 나라는 놈도 쓰레기지. 차라리 맞고 말지, 맞기 싫어서 없는 이야기를 
그리고 긁어내려고 노력했을까.

결국 자대 전입 한 달만에 정강이는 시퍼렇게 부어서 간헐적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상태가 되었고, 선임들의 휴가철이 되어
(우리 부대는 하나의 대대였는데, 한 달에 한 번, 휴가를 내줬었어. 매우 많지? 이 한달에 한번 휴가가 그렇게 나가고 싶어서,
겨우 휴가증 따위가 뭐라고, 영창에 가면 이 부대에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우리는 그 때문에라도 구타 폭력에
저항하지 않았었지. 한달에 한번은 나가고 싶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바깥에 있어보고 싶으니까) 부대에 
아직 짬이 덜 차서 휴가를 나가지 못하는(100일 이내에는 휴가를 나갈 수 없다고 하더라. 군법상.) 나만 남아있게 되었지.

이 때 문제가 발생했어. 그래, 아직 적응은 커녕 작전 예규조차 다 못 외우는 내가 후임을 받게 된 거야. 그것도 한 달도
안되는 사이에 두 명이 들어와 버렸지. 다들 학력도 좋았고, 체력도 나보다 좋았었어. 몸도 얇삭해서 날렵한 친구들이었지.

그들 역시 자체 신병교육대를 받고 일주일 뒤에 돌아왔고, 나보다 상태가 나아보이는 내 후임들을 보며 선임들은 만족했지.
하지만 그네들 역시 첫 전입을 온 이등병이고 근 25일간 몸으로 자대 생활을 버텨온 나보다 모르는 게 많았지. 이등병들이 
해야 할 일, 암구어 전파, 각종 부조리에서 파생된(아침 5시 30분에 기상하여 정복을 단정히 하고 빨래를 돌리고 6시 기상
나팔이 울리면 그 때 자신의 관등성명을 대어 그 방의 방장을 깨워준다. 뭐 이런 거지.)잡일들을 해야 한다고 알려줘야 했어.
그 와중에 아침에 방장을 깨울 땐 자신의 관등성명만을 댈 것이며 내가 실수로 ㅇㅇㅇ병장님 이름을 불러 깨웠었는데 
이등병이 싸가지없게 병장 이름을 부른다고 얻어맞은 적이 있다 등등 각종 몸으로 경험한 팁들을 알려줬었지. 

그도 생각해보면 정신나간 짓이었던 것이, 당시에는 몰랐었지만, 걔들은 날 얼마나 등신으로 봤을까. 

여튼, 그렇게 두 번째 작전이 찾아왔지. 자대에 온 지 두 달 차가 되는 작전이었고, 처음으로 후임들과 같이 하는 작전이기도
했어. 앞서 말한 더 큰 문제가 바로 이거였어. 후임들이 작전 예규 하나는 정말 잘 외웠었던 거야. 

후임들에게 뭘 밀리면 그건 바로 매장을 뜻해. 체력, 사격, 훈련 면에서 모두 후임보다 나아야 정상적인 선임 취급을
받을 수 있고, 선임에게 선임병 축으로 인정을 받고 후임들에게 선임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지. 물론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20일~25일 차이 후임은 '짬'면에서는 내가 위일지 모르나 모든 면에서 후임보다 뛰어나기 어려워. 난 아쉽게도
작전예규의 암기속도 면에서 후임들보다 뒤쳐졌었지.

그 때부터, 특히 A의 나에 대한 시선이 전보다 더욱 나빠지기 시작했어. 안그래도 갈굴 거리만 찾고 있었는데 이제 제대로 
걸렸다 싶었던거지. 결국 난 사격, 달리기를 제외한 체력 면에서 (심지어 A보다도)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임값을 못한다는
이유로 후임들이 빤히 보는 앞에서 구타를 당하고 얼차려를 받아야 했지. 일부러 나에게 지퍼가 잘 되지 않는 장비를 주고,
착용까지의 시간이 후임보다 느리냐며 때리기도 했어. 

전번 작전에서 이야기를 좋아해주던 선임들은 제대했고(말년 병장이었거든), 그 외 좋아해주는 선임은 너무 짬이 안되거나
후임이 어떻게 다뤄지던 관심없는 편이었지. 물론 나만 맞고 후임들은 말짱했던 것도 아니지만, 대놓고 그런 면박을 받는
맞선임을 보면서 후임은 나를 과연 선임으로 인정했을까.

같은 경상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자, A는 내 맞후임 중 하나를 편애하기 시작했고, 운나쁘게도 내 두번째 작전 이후, A는 
6개월간의 긴 분대장 생활을 하게 돼. 난 지위고 뭐고 없었고, 그 작전 내내 '후임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구타당해야 했지.

그 뒤로 2개월 터울의 후임이 2명 더 들어왔지만, 한명은 경상도 출신이라 A에게 사랑받았고, 한명은 체대 출신으로 체력이
월등하게 높았어. 사회에서의 학위가 아무런 쓸모없어지는 것을 목도하는 장면이었지. 결국 A에게 찍힌 나는 그 두 달 터울의
후임보다 체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또 한번 거센 구타와 폭행을 당해야 했지. 

한번은 A가 경상도 후임들을 불러놓곤 이렇게 말하더라. 너희 선임이 아무리 x신같아도 너희가 잘 해서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그 후임들의 눈에 내가 어떻게 박혔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결국 내가 짬을 먹고 상병장이 되었을 때, 이 후임들과
크게 담판을 벌이게 되는데, 이건 후에 다룰 이야기에서 말해줄게.


이정도가 내 이등병 시절에의 기억이야. 훈련소와 자체 신병교육훈련의 2여 개월을 제외하면, 이등병으로서 생활한 날은
3개월이 고작이니까. 

일병의 이야기는 이등병때처럼 정신없이 맞고 쪽팔렸던 기억들 뿐이지는 않아. 이젠 정말 가르쳐야 할 후임도 생기고, 
내 마인드에 변화도 생기고(나쁜 방향으로...말이지만), 나와 같이 군생활하던 맞후임, 2개월 터울 후임들 역시 서서히 
변하기 시작해. 그리고, 그즈음 되어서 선진병영이랍시고 이런저런 병영문화가 강제되면서 선임들의 신경질은 과하게
심각해지기 시작했고, A역시 말년이 되어가며 사람같지도 않은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지. 

더 무서운 건 A와 날 다른 동기(같은 달, 다른 날에 입대)인 B의 변화야. 존재조차 언급하지 않았었지만, 그건 그만큼
내 이등병 생활동안 B가 임팩트가 적었다는 것을 뜻해. 난 군번이 풀렸지만 결코 행복하게 살지는 않았어. B도 나와 비슷한
케이스였었지.

여하튼, 일병이 된 후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번외 격으로 내가 있던 분대가 아닌 다른 분대(군대는 대대-중대-소대-분대
의 개념으로 나누어져)의 한 이등병의 일화를 들려줄게.

이 이등병은, 나와 1달 터울이지만 1달도 채 차이 안나는, 오로지 월수만 달라서 후임이 된 후임이지. 그 달의 2일 군번
이었던걸로 기억해. 나와 다른 분대로 배치받았지만, 분대가 달라도 소대는 생활하는 공간이 같다보니 자주 볼 수 있었지.
머리를 깎았음에도 훤칠하게 생겼던 외모와, 약간 수심에 찬 듯한 모습이 인상적인 친구였어. 선임들이 그런 그 친구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역시 누구와 같았지. 여자는 몇 명 후려봤냐, 어디서 어떻게 했냐, 어떤 연애인 닮은 여자애랑 뭘 했냐
등등 저속한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어. 

걘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줏대가 있었거나, 정말 이야기할 말이 없었던 모양이야. gp에서 그 아이를 봤는데, 첫 날 초소 
근무가 끝나니까 서글서글하던 인상이 완전히 굳어 있었어. 그리고는 그 분대에서 스스로 이번에 들어온 신병이 정말 
고문관이다, 쓰레기다 등등 각종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지. 하지만 내가 본 그 친구는 그게 아니었어. 그냥 많이 맞았을
뿐이야. 종종 건물 뒤편, 골목 같은 곳에서 선임과 같이 나오는 그 친구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난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어.

어느날, 그 친구는 소대장에게 '이렇게는 못있겠다'류의 발언을 했던 모양이야.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우리네 간부들은
자신의 부대에 아직 구타폭력이 남아있고(전부 특공연대 출신이야) 그로 인한 군기가 유지되는 데에 있어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지. 나도, 그 친구도 그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었기에 그 친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거지. 결과는 참혹했어.

그 친구는 약 5시간 동안 군장구보와 깽깽이 등의 얼차려를 받았고, 그따위 약한 소리를 할 거면 차라리 스스로 발모가지를
부러뜨려서 제대하라는 폭언을 쉴새없이 들었지. 소대장은 그 친구 분대의 선임들에게 '애들 군기가 왜 이따위냐, 교육해라'
라는 내 인생에서 가장 섬득했었던(소대장이 그 말을 입에 담는다는 것이) 말을 내뱉았고, 그 후로 며칠동안 그 친구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어. 

얼마간 그 친구를 잊고 지냈을 무렵, 전출 소식이 전해졌어. '심장질환 때문에 전출'이라고 하더라. 어떤 야전부대로 간 
모양인데, 그 후로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네. 아마도 부적응으로 인한 전출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핑계댄 거라고 봐.
어떤 선임도, 어떤 간부도 그에 대해 불이익을 받지 않았어. 우리 대대는 단일 대대로서, 당시까지는 사단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감찰도 뭣도 없이 속으로 썩을데까지 썩을 수 있었던거라고 생각해. 그게 가능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 친구가 '나가고 싶다'라는 말을 하고 얼차려를 받을 때, 소대장이 잊을 수 없는 그 대사를 내뱉았을 때, 난 모든걸
깨달아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나의 과오가 내 일병생활마저 망쳐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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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구타를 당하다가 자존심이고 뭐고 놓쳐 버렸을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많이들 그런 경험을 하고
무너진 자존심을 비뚤어진 방법으로 되찾으려고 하기에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군대 문화가 유지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지금 한 번 완전히 무너진 자존감을 겨우 추스리고 생각하자면, 저 당시에 제가 하였어야 하는 올바른 행동을 알 수 있겠더군요. 
일병 이후의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이제 알게 되시겠지만, 언제나 제 3자의 입장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하세요.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그걸 후회하게 될겁니다. 군대는 그런 의미에서 제게 쓰라린 경험이었습니다. 

난 왜 옳지 못하고 저렇게 비겁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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