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수요일 숭실대학교에서는 박찬호 출판 기념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YES24와 숭실대학교에서 진행한 이번 행사에서는 숭실대학교 학생들 외
각지의 박찬호 팬, 많은 한화 팬들이 함께하여 더욱 자리를 빛내주었습니다.
박찬호 또한 시종일관 여유있는 모습으로 강연회를 찾은 팬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전달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힘써주었습니다.
박찬호 본인이 밝힌 上 남자로 사는 법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1. 박찬호의 도전 정신, 아무도 가지 않은 길
박찬호는 한양대 재학시절 국내 최초로 미국야구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공주 촌놈이었다고 소개한 박찬호는 도전을 위하여 메이져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전 정신은 박찬호가 가진 소중한 재산이었고 후에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일본프로야구 진출, 한국프로야구 진출 등 자신 앞에 놓여진 도전에
대하여 당당하게 마주하는 것에 큰 도움을 주게 됩니다.
2. FA 이적 후의 먹튀논란과 다시 쌓은 12승
LA다저스에서 최대 18승, 5년간 10승 이상을 거두며 메이져리그 최정상급 투수로
성장한 박찬호는 150억원이 넘는 연봉을 안겨준 텍사스 레인져스로 이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허리통증과 함께 LA에서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부진에 빠지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한국 기자들에게서도 먹튀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박찬호는 부상과 불면으로 깊은 부진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덕아웃과도 불편한 관계를 가지게 된 박찬호는 스스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감독을 찾아가서 간단한 인사를 건넨 후, 하루하루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절치부심 재활에 힘쓰며 팀케미에도 더욱 신경을 쓰게 됩니다. 후에 대표팀이나 샌디에이고, 한화이글스에서 보여준 리더의 역활은, 이 시기에 박찬호가 있었기 때문에 있게 됩니다.
박찬호의 인성과 태도를 보고 그의 필요성을 느낀 샌디에이고는 박찬호를 영입하게 됩니다. 4년만에 10승투수 반열에 올라서며 2005년 12승으로 다시금 부활의 날개를 활짝 피게 됩니다.
3. 上 남자가 30년간 한길을 걸어온 이유
여담이지만 박찬호는 그와 함께 한국야구의 전성기를 구가한 임선동, 조성민과 달리 한양대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세 동기, 임선동과 조성민이 연습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 그 시간에 연습한 박찬호는 묘한 승리
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남들이 쉴 때 한번 더 뛰자는 강한 정신력으로 밤마다 런닝에 매진하고 수건을 채며 메이져의 꿈을 키웁니다.
강연회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말이 있습니다.
"작심 삼일이라는 말 때문에 나는 항상 4일째 되는 훈련을 꼭 채웠다"
4. 한화이글스, 내가 팬들에게 할 수 있는 것
팬들의 팬레터 몇 천통을 모두 읽어 본 박찬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미국에 찾아오겠다는 학생, 박찬호를 보며 IMF를 견딘다는
사장님, 대표팀 경기를 보고 감동했다는 팬. 그는 후에 한국야구를 위하여
뛰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팀은 바로 간절히 뛰고 싶던 고향팀 "한화 이글스" 였습니다.
한국야구, 그리고 한화이글스를 위하여 2012년 박찬호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한 해를 보내게 됩니다. 승패와 상관없이 그의 공 하나하나는, 이제 선수생활이
얼마 안남았다는 본인과 팬들의 어렴풋한 느낌과 함께 의미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박찬호 본인만 아는 한화이글스에서의 자신의 야구인생 마지막 경기.
"오늘 만큼은 한화의 박찬호가 아니라, 박찬호의 한화다"
- 한화 한용덕 감독대행
마지막 경기에서 혼신의 호투를 보여준 박찬호는
2013년 본인의 마지막 투구수 92개의 공을 던지며
1992년 한국의 92학번 젊은 동양인 투수가 그랬듯이
그라운드 관중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게 됩니다.
글러브와 공에 입맞춤을 하고 촉촉히 젖은 눈가로
초록색 잔디와, 그가 서있는 한 누구보다 높았던 마운드에게
...
책 제목이 늦었네요.
박찬호를 좋아하시는 팬은 한번쯤 읽어주셨음 합니다.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 박찬호 지음(웅진지식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