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정도로 한국 사회주의의 요람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습니다. 일제시기 사회주의자들이 배척한 자본가의 대부분은 일본인과 친일파였죠.)
그런 대구에서 해방이후 미군정기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10월항쟁이 그것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미군정(1946)때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사회주의를 배격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이후
미군정과 정면대결을 선택한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에 의해 9월 총파업이 발생하고 대구에서도 총파업이 발생합니다.
10월 1일 노동단체들이 파업 시위를 했고 그러다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자 그야 말로 수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게 되었죠.
(당시 콜레라로 인한 대구봉쇄로 인해 극심한 식량난과 생필품 품귀현상, 미군정을 등에 업은 친일파 경찰의 무분별한 식량 공출 등으로 미군정과 친일파에 대한 불만이 컸죠.)
경찰서를 포위하며 항의하고 사태가 진정되는듯 했으나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더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화시위에서 무기고를 터는등 항쟁으로 커지죠.
오히려 이때 사태가 확산되자 박헌영등 조선공산당의 수뇌는 도망갔죠.
남아 있던 조선공산당원들도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대구시민들의 분노는 막을 수 없었죠.
그리고 친일파 집을 약탈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일제시대 순사였던 경찰관을 죽입니다.
다음날인 10월 2일 미군정이 군인을 동원해서 진압하였으며 친일파의 우익코스프레 단체들도 등장하여 더 큰 피해가 발생했죠.
대구경북을 통틀어 136명의 사망과 체포된 사람은 수천명이 되었습니다.
이후 경북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당시 구미 담당 남로당원이 박상희씨입니다.
당시 시위대들이 내건 주장은 미군정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발, 친일파의 등용, 과거사 청산, 시민이 참여하는 인민위원회 설치등이었죠.
이 10월 항쟁으로 대구의 사회주의와 진보는 큰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후 이승만에게서 민주주의를 되찾은 4.19의 시발점이 된 2.28 학생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61년 5월1일 전국처음으로 노동절행사를 대구에서 갖기도 했습니다.
61년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집권합니다.
이후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대구에서도 크게 일어났습니다. 학생들 수백명이 잡혀갔죠.
지금까지만 보면 어째서 지금의 대구가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죠.
(이 사건은 10년 뒤 다시 악용됨에 따라 제1차 인혁당사건이라고 불리죠.)
72년 10월 유신선포이후 73년 10월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유신반대시위가 일어났으며, 대구를 비롯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74년 4월긴급조치4호가 선포돼 민청학련이 범죄단체로 규정되고
그 배후로 인혁당재건위원회가 지목되며 많은분들이 잘 아시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이 생깁니다.
김용원씨는 경남함양출신이며 서울대물리학과 졸업후 경기여고 교사 .
도예종씨는 경주출신이며 대구대(영남대)경제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 경제학 강사.
서도원씨는 경남창녕출신으로 청구대(영남대) 졸업 후 대구매일신문기자.청구대강사를 거침.
송상진씨는 대구출신이며 대구사범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후 대구초등교사
여정남씨는 대구출신이며 경북대정외과 입학
우홍선씨는 경남울주출신이며 육군대위예편 64년 제1차인혁당때 구속됐었다.
이수병씨는 경남의령출신이며 부산사범 경희대졸업 삼락일어학원 강사
하재완씨는 경남창녕출신
이처럼 이들 대부분은 경상도 출신이며 영남대(옛 대구대.청구대) 또는 경북대를 졸업 또는 수학한 민주 지식인들로써
이들을 사법살인 함으로써 대구의 시민들과 민주세력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주었죠.
그래서 그날이후 뜻을 접고 은둔하거나 외면하는 양상으로 변해버렸고 권력에 빌붙어 누리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후 전두환 노태우를 거치며 지역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현재까지 오게 된것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대구사람들은 이러한 역사를 잘모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박정희 향수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죠.이웃집에서 일어난 일이고 자신의 정치기반에서 일어난 일인데 계속 무관심으로 일변하다가 마지못해 사과한 그분은 참....
ps. 쓰다보니 너무 두서가 없네요.
결론은 대구도 민주세력이었으며 유신의 피해자이며 바뀔 가능성은 충분하다. 포기하지 말아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