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역사상 나타난 최악의 학살자는 누구일까? 물론, 그 살륙 수단도 소름이 끼칠정도가 되는 조건하에서다. 근 현대에 있어서는 폴 포트, 스탈린, 히틀러등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다. 옛날로 가보면 카리귤라, 네로, 시황제등이나 될까?
그럼, 조건을 조금 좁혀서 여성에게 맞추어 보며는, 측천무후, 카트리느 드 메디치, 에리자베이트 바토리등이 그에 합당한 인물들일 것이다. 그런데 ,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규모와 살륙수단이 아주 뛰어났던 여왕이 있다. 그것은 아프리카 앙골라의 여왕 징가이다. 그녀야말로 사상최흉 가장 잔학한 여왕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17세기···이웃 일본에서는 토쿠가와가문이 막부를 확고 부동한 자리로 만들려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을 무렵, 바다를 멀리한 지구의 뒤편에서는 아프리카가「검은 상품」, 즉 노예의 공급처로서 유럽 열강이 침략을 일삼으로서 비난의 화살이 되고 있었다. 1490년에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의 남서부에 표착했다. 그곳 앙골라의 땅도 예외가 없었다. 특히 루안다(Luanda)라는 곳은 항구로 삼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거점으로 포르투갈은 세력을 펼쳐 나갔다.
당시 앙골라의 여왕 징가는 포르투갈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카톨릭으로 개종도 하고 평화교섭을 실시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회유책을 유지히면서 콩고 왕국, 돈고 왕국등의 주변국과도 제휴해서 포르투갈의 침략에 대항하기도 했다. 그러한 노력으로 한때는 포르투갈인들을 바다 저 멀리로 쫓아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승리도 잠시였고 그 후 포르투갈은 군비를 정돈해서 다시 쳐들어 왔다. 그러나 징가는, 죽을 때까지 포르투갈에 왕국에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징가가 죽고 나서야 포르투갈은 그 땅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었다. 그 후 300년간, 노예 공급의 식민지로서 지배해 나갔다. 하지만, 여왕 징가는 국토를 지킨 영웅으로서 지금도 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그 후, 앙골라는 1975년에 독립을 완수하고 앙골라 공화국이라 정식으로 명명되었다. 그 국명은 300년전의 여왕 징가가 선호해서 이용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 하나만으로써도 민중은 여왕 징가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여왕 징가의 엽기적인 측면도 오늘날까지 뿌리 깊게 자리잡고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거기에 따르면, 여왕 징가는 식인족 출신이었으며, 실로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성욕을 지니고 있었고 드물게 보는 새디스트였다고 한다.
그녀는, 남자의 몸으로부터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기를 매우 좋아하고, 그것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는 이상성도착자였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이상성욕을 채우기 위해 각지로부터 잘 생기고 튼튼한 남자들을 잡아 와서는 자신만의 할렘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남자들은, 거기서 여왕의 타오르는 욕망을 채워주어야 했고, 필사적으로 쾌락에 봉사하는 것만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 할렘의 남자들은 항상 공포속에 떨며 살아야 했다. 사소한 일로도 목숨을 잃는 예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실수에도 바로 불같이 격앙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한 자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살해해 버리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명령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해야했고 또, 상대가 사람이든 맹수든 싸우라는 말이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 죽을 때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되기도 했다.
눈 앞에서 남자끼리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고 있는 것을 볼 때 여왕의 눈은 번뜩 번뜩 빛을 내며 생기를 띄기 시작한다. 남자들이 날카로운 무기에 다친 피부에서 대량의 피를 쏟아내는 것을 보면 흥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떠는 정도였던 것이다. 이윽고는, 그 흥분을 억제할 수 할 수 없게 되고, 짐승이나 마귀와 같이 무서운 성욕으로 승자가 된 남자를 자신의 방에 데리고 들어가 미친듯이 남자의 몸을 덥치는 것이었다.
양팔을 남자의 목에 감고, 상대의 입술이든 어깨죽지든 가리지 않고 남자의 몸 어디든 닥치는대로 물어뜯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괴조와 같은 부르짖음이 여왕의 입으로부터 터져나오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날카로운 손톱은 남자의 피부를 찢어 발겼다. 어떤 때는 살점을 깊게 도려내기도 했다. 남자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나오고 거기에는 덩어리 피가 쏟아지기도 했다. 여왕은 손톱에 끼어 달라붙은 피투성이 살점을 빨아 먹으면서 남자의 몸을 깨물고 핥아 먹는 것이었다. 때로는 피를 그릇으로 꿀꺽 꿀꺽 마시면서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르는 밤을 계속하는 것이다.
한편, 남자는 여왕이 하고 싶은대로 처참한 고통을 참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에 하나 있을까말까한 자비로운 은덕에 매달릴 수 밖에는 없었다. 만약 여왕을 만족 시킬 수 없거나 싫증을 느끼게되면 즉석에서 목이 잘려나갔다. 대부분의 경우, 피투성이의 광란이 끝나면 쓸모가 없어져 살해당해 버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녀는 인육을 상식하는 습벽이 몸에 붙어서, 아이의 고기라면 특히 좋아했다. 불과 이틀 사이에 130명의 어린아이들을 죽여서 먹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것은 인육을 먹는 것이 신비적인 힘을 얻게 되고 회춘이 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서도 더할 수 없는 잔혹한 만행은 그러한 결과로 초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녀의 상궤를 벗어난 행동의 일례를 보자.
어느 무렵, 여왕이 자신의 나라의 시찰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그 시찰지의 마을에서 한 농민이 약간의 실수를 해서 여왕을 화나게 해 버렸던 일이 있었다. 화가 난 여왕은, 그 농민 뿐만 아니라 그곳 마을사람 전원을 생포하도록 부하들에게 명했다. 600여명의 마을사람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원 잡혀 감옥에 넣어졌다.
수일 후, 600명은 여왕 앞에 끌려나와 전원 처형되게 되었다. 그 처형방법이 또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한 명 겨우 들어갈 정도의 거대한 돌절구 위에 차례차례로 마을사람을 던져 놓고 절구를 굴리는 것이다. 이 거대한 돌절구는 위에 둥근 큰 돌이 물려져 돌아가는 것으로, 수십마리의 나귀가 끌면 위의 바위돌이 돌아가는 장치로 되어 있다. 중앙에 뻥 뚫린 구멍에 물건을 던져 넣으면 무엇이든지 찧이겨져서 가루가 되는 무시무시한 구조물이었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알몸이 되어 거대한 장치가 세워져있는 곳으로 끌려 갔다. 눈앞에는 거대한 돌절구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한사람 한사람 차례차례 그 위로 던져졌다. 아비규한의 절규가 돌절구 구르는 소리와 함께 광장에 퍼졌다. 곡식이 가루가 되어 흘러 내려야할 곳으로는 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물론 살점과 뼛조각들도 섞여서 흘렀던 것은 물론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중에는 바윗돌 절구가 구르는 그르륵 그르륵하는 소리만 메아리쳤다. 600명의 인간의 신체들은 모두 갈려나가 버린 것이다. 한 마을 주민 전원이 짓이겨지고 부수어질 때까지 충분히 반나절은 걸렸다고 한다.
그 다음, 징가는 질척질척 다져진 인육을 큰 그릇에 담아 오게해서 연회를 열고 그것을 탐식 했다고 알려져있다…….
과연 그 사건이 어디까지가 사실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계기로 과장된 것이었는지 이제 와서는 추측만 할 수밖에 없다. 여왕 징가에 대해서 쓰여진 문헌은 너무 적고 포르투갈인이 쓴 서적이나 예수회소속의 카톨릭승려의 기록이 일부 존재하고 있는 것만이 전부다. 어쩌면, 견문록에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이야기에 꼬리에 꼬리가 덧붙여 졌을 것이라는 생각도 부정은 할 수 없다.
부정은 할 수 없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믿기 어려울정도로 광기나 만행이 수없이 저질러졌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육을 먹는 일도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고, 고대에는 오히려 종교상의 의식으로서는 흔히 있던 행동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최근의 뉴스를 살펴봐도 통상의 인간심리로써는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잔학한 엽기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해 보더라도 위의 내용이 잘못 전해진 거짓으로 가득찬 것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음욕이 강했던 여왕 징거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로 8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것이 인육을 먹고 피를 상음한 결과였던 것일까?
이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