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부터 1998년까지 3년 동안 전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대하역사 드라마 '용의 눈물'을 보면, 조선 정종 시절 일본 사신이 불꽃놀이를 보고 감탄을 하자, 태종 이방원이 조선의 앞선 과학기술과 군사력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일본의 계속적인 조선에의 충성'을 강조하자 일본 사신이 이에 동의하며 따르는 장면이 나온다.
불꽃놀이는 고려 때부터 한민족이 세계에서 최초로 개발하고 즐겼다. 그 기원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고려 시절부터 즐겨 행하여졌음은 분명하다. 다만 어찌 보면 화포무기의 나라로서 당연한 귀결일 수 있었다. 그래서 위력적이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자주 등장한 것이고 이런 무기가 없었던 일본은 그 기세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처음으로 불꽃놀이에 대한 기록은 이규보(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있는 ‘수세(守歲)’라는 시에 그 내용이 나온다. 섣달 그믐날에 재앙을 물리치고자 행하는 풍습을 노래하면서 ‘뜰 가운데 폭죽소리는 어찌 이토록 여기저기에서 시끄러운가(庭中爆竹奈支離)’라고 읊었다. 여기서 나오는 폭죽은 말 그대로 젖은 대나무를 불에 달궈 튀게 하여 큰 폭음을 내는 것이다.
1342년 저왕(충혜왕) 때 임금이 연경궁에서 불꽃놀이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다시 공민왕 시절인 1352년, 1368년, 1369년, 1372년에 임금이 불꽃놀이를 관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의 불꽃놀이는 이규보에 나오는 방식보다 화약을 사용하여 보다 더 크고 위력적인 불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 고려는 말기로 갈수록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이를 막기 위해 화포무기와 화약을 집중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왜구가 상륙하여 약탈함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미리 막기 위해 바다에서 우리의 주력 무기인 화공을 통해 승부를 결정짓고자 한 것이다. 고려 조정은 최무선 장군(1325~1395)의 선구적 노력으로 자체적으로 유황, 염초 등을 이용하여 강력한 화포무기와 화약을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사용했고 전함에도 장착했다. 이런 한편으로 필요할 경우 중국으로 사람을 보내 화약이나 무기 일부를 구하기도 했다. 이미 1356년에 군사적인 용도로 쓰기 위해 총통(銃筒)을 발사했다는 기록도 나오고 있다.
1373년에는 새로 건조한 전함에 화전(火箭)과 화통(火筒)을 배치하여 시험했는데 그 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이후 1377년 최무선의 주장에 따라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더욱 개량된 여러 종류의 화포무기와 화약을 개발하여 실전 배치하기도 했다. 그 결과 1380년 그 유명한 진포해전(지금의 군산), 1383년 관음포해전(지금의 남해)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며 대승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불꽃놀이도 덩달아 발전하게 되었는데, 적에 대한 자연스런 무력시위도 되고, 아름다운 행사의 구성으로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불꽃놀이를 하려면 화포 기술이 가장 기본이 되었기 때문에 무기를 관장하던 군기감이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궁궐 안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시대가 열리면서 화포무기의 성능이 이미 명나라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실록이나 여러 문헌에는 조선 정부가 행사 때 불꽃놀이를 즐겨했던 사실에 대한 기록도 많다. 조선 시대 때 불꽃놀이는 화산붕(火山棚), 화붕, 화희, 방화 등으로 불리웠고, 이를 구경하는 것을 관화(觀火)라 했다. 당시 불꽃놀이 기술은 중국도 없거나 극히 초보적인 수준 정도여서 조선의 그것이 당대 최고수준 이었다. 그러다보니 중국이 불필요한 군사적인 자극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런 까닭에 조선은 불꽃놀이를 중국 사신에게는 보이는 것을 꺼려 하여 일체 비공개로 하는 등 철저한 통제를 통해 조선의 첨단무기와 화포무력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기록들도 보인다.
불꽃놀이는 조선 초 연말연초와 외국사신이 방문했을 때 축하 차원의 공식행사에서 즐겨 실시하곤 했다. 또한 왕실의 위엄을 보여주려 했던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불꽃놀이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태종과 세종 때 였다. 1418년 태종 18년 경복궁 근정전 뜰에서 불꽃놀이를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은 이에 대해 "화염이 하늘에 치솟고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419년 세종 1년 명나라의 사신인 황엄과 유천이 조선의 불꽃놀이에 대한 명성을 듣고 이를 보고 싶어 했다. 이에 조정은 사신 숙소인 태평관 앞에서 불꽃놀이를 실시했는데, 당시 중국 사신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놀랐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유천은 흥미있게 보다가 놀라 들어갔다 나오기를 2번이나 했고, 황엄은 놀라지 않는 체했지만 얼굴빛은 흔들렸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조선의 화포무기와 화약의 성능이 계속 발전하면서 확실하게 명나라를 능가했다고 보여진다. 1431년 세종이 조정 회의에서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우리 화포를 보여주어야 할 것인지를 묻자 의정부 찬성 허조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본국 화포의 맹렬함이 중국보다 나으니 사신들에게 이를 보여주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두어달 뒤 허조가 "앞으로 사신이 불꽃놀이를 보고자 할 때에 한해 잠깐 보여 주어 화약이 매우 귀하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요청하자 세종은 "사신이 이를 보게 되면 만일 중국에서 변고가 생겨 조선의 화약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거부하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이라 이는 두려운 일이다. 경의 말이 매우 옳으니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 불꽃놀이를 보이지 않으려 한 것과 달리 일본이나 당시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류구국(지금의 오키나와)에서 사신이 오면 즐겨 보여 주었다. 명나라와 달리 외교와 군사적 문제의 소지도 없었고, 조선의 선진무기를 보여줌으로서 고려 말 이후 왜구로 골치아팠던 선례에 비추어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무력시위적인 측면도 다분히 있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불꽃놀이는 계속되었고, 세조는 불꽃놀이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462년 류구국 사신과 궁궐 뒤뜰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1464년에는 새해를 맞아 경복궁 후원에서 불꽃놀이를 실시하는 한편 북악산 정상에도 직상화라는 최신형 대포를 쏘았고 불화살(火箭)까지 함께 발사하여 일대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불꽃놀이는 서서히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이 불꽃놀이를 너무 좋아하자 조정 대신들이 나서서 불꽃놀이를 자제할 것을 당부하고 축소하도록 만들었다. 1537년 중종 때 명나라 사신들이 왔을 때 불꽃놀이를 공개하느냐를 놓고 조정대신들이 '군사기밀로서 중시하기를 바랐으며 하더라도 긴요하지 않은 화포만 쏘도록 하자'고 요청한 기록이 나온다. 그러다가 명종 때 딱 한번 불꽃놀이를 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그 이후 불꽃놀이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지금은 서울 여의도, 부산 광안리 등지에서는 매년 국제불꽃축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전국 곳곳에서 온 국민들이 자주 보고 즐기는 시절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과 달리 고려와 조선 시절에는 한국의 주력무기인 화포무기와 화약의 위력을 실증하는 선진 무기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출처 : http://blog.naver.com/hgb408/15013790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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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가 한민족이 최초로 개발했다고 하는데, 제가 알기론 근거가 좀 빈약하지 않나 싶습니다.
또 약간 오해가 생길 수 있는 측면이 조선에서 명나라 사신들에게 보여주길 망설였던 것은
화붕, 즉 불꽃놀이이지 화포가 아닙니다.
조선의 화붕이 중국의 화붕보다 더 화려하니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고,
화붕 자체에 화약 소비가 많으니 대접하는 것도 좋지만, 자제하자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화약을 다루는 능력이 명나라보다 나았었다고 볼 수는 있는 문구지만,
화포가 더 강력했다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혹시 무기쪽에 대해 정통하신 분이 계시다면 보조글이라도 달아주시면 좋을텐데...
그 이외에는 괜찮은 글 같아 가져와봅니다.
개인적으로 명나라 사신의 얼굴빛이 흔들렸다는 자세한 표정묘사까지 실록에 기록한 게 인상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