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망국의 군주로 일제시대 36년간 조선이 망한 이유의 예시로 폄하되어 왔고
또한 지난 100년간 그 평가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종이란 군주역시 인간의 한 종류일 뿐이고 그의 장단점이 있기에
그의 치세의 개혁과 한계는 충분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하지만 다른건 몰라도
고종의 개혁을 두고 IF를 논할 때 사실관계를 정확히 했으면 합니다.
흔히 고종의 평가를 두고 조선의 근대화 자체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은 개항이후 일본의 지속적인 간섭과 조직적인 침탈에 직면하였고 청일전쟁과 같은 전쟁도 겪었습니다.
고종의 성과인 대한제국의 선포와 근대화개혁은 이런 기간에서 유일하게 단 한번 있었던 소중한 기회
러시아와 일본이 니시-로젠 협정으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갔던 3년의 기간동안 발생한 일이고
러일전쟁 이전까지 길어야 단 5년 동안 이뤄진 개혁입니다.
이 짧은 기간 조선은
대한제국 국제를 통해 기초적인 흠정헌법을 도입하였고
의회창설을 시도했으며 사법제도와 경찰제도를 우편전신 제도를 도입하였고
근대식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발전소가 세워지고 수도의 도로가 정비되었으며
대중교통인 전차가 도입되었고 민간에는 초기 자본기업이 설립되었습니다.
비록 러일전쟁으로 실패했지만
서북철도를 독자적으로 건설하려 시도한 바는 연구를 통해 알려진 내용이죠
생각해 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외세의 침탈이 없는 공백기간이 도래하자
물고가 터지듯 근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한 국가의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요소가
1. 인력 2. 자본 .3 안정적인 정책 추진 세력 이라 본다면
500년 왕정을 이어온 국가에서
조선의 근대화 추진세력은 3. 왕권이었지요
또한 그 추진세력이 가진 가능성과 진정성은 5년의 성과가 말해 주는게 아닌가 합니다
과연 단 5년간의 개혁기간의 성과를 두고
일본의 40년 개혁의 성과와 비교하여 양자를 두고
조선의 근대화역량을 한계가 있었다 주장하는게 정말 공평한 일일까요?
사족을 더 하면 이런 주장이 있지요
대한제국의 개혁은 왕권강화를 위한 퇴보적인 개혁이었다
더불어 고종이 내장원을 중시하여 국고를 집중 시킨 것에 대해
전근대적인 회계로 부정축재의 사례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개항이후 일본이 조선의 정계에 간섭하며
주장한 내각중심으로 권력 재편 외친
조선의 내정개혁은 말이 좋아 개혁인 것이지
정작 일본은 자신들도
메이지 유신이후 20년간
천황중심으로 개혁을 진행하였고
그들 조차 메이지헌법을 제정한 것은
대한제국의 흠정헌법제정 직전에 이르러야 가능음을 보듯
자신들도 추진하지 않았던 내정개혁입니다.
일본 자신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결코하지 않은 권력의 분산을
유독 조선에만 개혁이란 이름으로 강요한 것
그리고 이를 두고 개혁이라 평가하는것 자체가 넌센스 아닐까요
500년 왕실중심의 중앙집권 국가에서
대원군 이후 겨우 왕권을 되찾았음에도
다시 이를 대신들과 내각에 권력을 이양하여 권력을 분산하라는 의미는
다른말로는 결국 일본이 영향을 미치기 쉽게 권력을 이양하라는 의미일 뿐이죠
그리고 실제 그것이 실현되 었을때의 상황은 명성황후의 시해가 증거였습니다.
이런 것을 직접 목도한 고종과 조선상황에서
왕실 재정인 내장원에 집중된 국고와
대한제국 시기 광무황제가 추진한 측근정치는
이런 조선의 특수성을 감안한
안정적인 근대화 추진과 군사력 강화를 위한
하나의 방법이였던것이죠.
생각해 봅니다.
결국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승리하며 대한제국은
국권이 피탈되었습니다.
고종이 망국의 군주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망국의 군주라는 사실을 넘어
겨우 5년의 개혁만을 가지고 한계점만 지적하며
새로운 가정으로
조선은 근대화 가능성이 없는 나라였고
결국 일본이 식민통치를 한 기간 조선은 근대화를 달성했다 비약하는건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지나치게 불공평한 평가가 아닌가 생각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