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의 그림자 ]
“템포를 좀 쉬어가자.”
놈이 말했다. 망할 놈의 천재 음악가.
누구나 너처럼 능숙하리라 착각 하지 마. 나는 현을 비틀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연주가들이 손을 멈추고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주제에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고결한 척 하지 마. 그러나 정작 손가락질 받고 있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감히 천재의 연습을 방해한 나, 별 볼일 없는 바이올리니스트.
연주자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한 나는 반평생을 끼고 살아온 바이올린을 내팽개치고 연습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쯔쯧, 혀를 차는 소리가 내 뒤를 바짝 뒤따랐다.
모두 그 놈 때문이었다.
나는 프로였다.
오케스트라에 소속된 이상 더 이상 아마추어라는 핑계로 포장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나는 프로다. 그리고 연습 도중, 천재의 충고에 자존심이 상해 도망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카페에 가서 작금의 세태를 비평하는데 혈안이 된 비평가들과 어울려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렸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나는 카페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그곳은 천재 음악가를 찬미하는 평론가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들은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줄 아는 무식한 놈들이었지만, 우습게도 이 세계는, 이 바닥은 그놈들의 목소리 덕분에 굴러가고 있었다. 대중은 그들이 휘갈긴 비평문에 관심을 기울였고, 청중은 그들의 목소리를 길잡이 삼아 음악을 감상했다. 그들은 예술가와 대중을 소통하는 통로였다.
평론가의 호감을 얻지 못한 예술가는 거리의 구걸하는 걸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당했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앉아서 이상만 좇고 있으니, 걸인이나 예술가라 칭하는 그네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하긴 했지만, 많은 이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의 개개인을 평가하는 이는 없었으니까. 그들은 오로지, 천재를 찬양할 뿐이었다. 그렇게 찬양 받은 천재는, 불과 하룻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 다음날 눈을 뜨고 일어나면 신처럼 추앙 받았다.
나는 천재에게서 도망쳐 나와 시내로 향했다. 시내 한복판에 내 좁아터진 숙소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 앉아 압생트 따위를 마시며, 궐련에 불을 붙여가며 오후를 보냈다. 나는 스스로에게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기세 좋게 뛰쳐나가놓곤, 고작 하는 짓하고는. 나는 부정할 수 없는 패배자였다. 그래, 패배자.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
연주회 시간이 다가왔다.
저열한 호기심이 밑바닥을 치며 슬금슬금 기어올라왔다. 아무리 독한 술을 마셔도 호기심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패배자일지언정, 나는 뼛속까지 연주가였으니까.
내가 빠진 자리는 바이올린 연주를 할 줄 아는 아무개한테로 넘어갔을 터였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그들 눈에 나는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였을 테니까.
숙소에서 나온 뒤로 잠깐 기억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다한들 별 수 없다. 사라진 기억을 불러들일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다행인 것은 머릿속은 깜깜해져도 두 다리는 귀소본능처럼 연주회장을 찾아 가고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몽롱하게 취한 걸음으로 연주회장으로 걸어갔다.
마차 바퀴가 짓이기고 간 말똥이 구두코에 푹 처박혔다. 나는 정신이상자처럼 킬킬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저속하고, 한편으론 진실한 웃음이었다. 킬킬, 깔깔, 하하하. 부채로 입가를 가린 레이디가 나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나는 곧 무례를 사과하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여자는 호감을 가진 채 나를 비켜 지나갔다. 그녀가 탄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보며 나는 또 웃음을 터뜨렸다. 광인의 웃음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나를 제압하거나 손가락질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취해서 흥청망청 돌아다니든, 민폐를 끼치든지간에 나는 말쑥한 신사의 차림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건 저 치가 얼마나 지위가 높아 보이는가, 얼마나 돈이 있어보이는가 따위였다. 말쑥한 옷을 차려 입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미친놈 취급하지 않았다.
나는 관계자 출입구를 열었다. 들어오는 나를 누군가가 힐긋 쳐다보긴 했지만, 내가 오케스트라 소속이란 걸 알고 있는지 무시하고 슥 지나갔다.
곧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환상적인 음률이 귓바퀴를 두드렸다. 나는 황홀경에 취해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마치,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와 내 귀에 노래
를 속삭이는 듯 했다.
나는 짙은 암막커튼 너머로 천재 음악가가 연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특유의 유연한 손놀림으로 손가락을 한계치까지 꺾으며 아름다운 연주를 끝마쳤다. 마지막은 늘 익어가는 곡물처럼 꾸벅 숙인 허리와, 이에 보답하는 청중의 박수갈채였다. 나는 무대 아래의 어두운 계단에 앉아 음울한 얼굴로 천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숙여진 등허리에 쏟아지는 눈부신 빛은 마치 투명한 날개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천사의 날개, 아니, 신이 천재에게 부여한 날개. 네가 원하는 만큼 한번 날아보려무나. 신은 천재를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승승장구 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생전 믿어보지도 않은 신을 탓했다. 인사를 마친 그가 몸을 빙 돌려 내가 앉아있는 계단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며 나에게 사과했다.
“종전엔 미안했네. 내, 사과하지. 자네도 알지 않는가. 내 괴벽을. 연주회 직전엔 광인처럼 날카로워지거든. 자네의 연주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네. 그저 나의 예민함과 변덕 때문이었을 뿐. 사과를 받아주겠나?”
끝까지 고결한 척이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탁 쳐내고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계단 밑까지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문을 열어젖히자, 새까맣게 물든 밤거리가 나를 맞이했다. 거리에 높다랗게 치솟은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지만 희뿌연 등불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다. 나는 어둠에 푹 잠기어 몇 시간이고 걸었다.
또각.
구두굽이 돌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짙은 색의 망토를 걸친 신사였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체격의 평범한 수염을 기른 시시한 남자였다. 그는 형형 빛나는 두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또각대는 발소리는 고의적인 행동임에 분명했다. 내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나는 그의 바람대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은……낯이 익군.”
그래, 저 자를 어디서 보았더라.
그는 내 침묵을 기다리기 싫었던지 긴 팔을 치켜들고 허공에서 연주하는 흉내를 내었다. 희미한 안개에 휩싸인 거리에 가느다란 선율이 울려 퍼졌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소리였다. 동시에 완벽하게 똑같은 선율이었다.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천재 연주자의 소리와 똑같은.
나는 악기도 없이 연주하고 있는 사내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당신의 정체를 알만하군. 역시. 그래. 크크큭. 이제야 알겠군. 이제는 내 영혼이 탐나던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주하던 팔을 내리고 가만히 서있을 뿐. 나불대는 것은 오로지 나였다.
“시기심, 저열한 복수심……가장 밑바닥에 존재하는 찌꺼기 같은 감정들. 그게 네놈들이 좋아하는 먹이라고 들었어. 그게 사실이라면 네 눈에 나는 가장 탐나는 저녁식사겠군, 그래.”
여전히 반응없는 사내를 향해, 나는 걸음을 옮겼다.
“6년전, 그 놈은 나의 발가락 때만도 못한 어설픈 솜씨로 낑깡대며 연주했었지. 다들 코웃음쳤어. 대단한 가문 출신이거나, 바다 건너의 자유의 땅에서 한몫 잡아온 졸부의 아들이거나 할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선생님이 제자로 받아줄리 없었으니까. 그리고 4년이 흘렀지. 놈은 독주회를 열었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놈의 부들부들 떨어대는 손끝에서 낑깡대던 소음이 아직도 귀에 들러붙어 있는데. 나는 알고 있었어. 놈이 영혼을 팔고, 그 대가로 ‘소리’를 손에 넣었다는 걸.”
그가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브라보! 꾹 닫힌 입이 외치는 듯했다.
우리는 이제 십여 걸음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사내는 안개에 휩싸인 희뿌연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영혼을 기꺼이 넘겨주지. 대신, 너도 내가 바라는 걸 들어줘야 해.”
발음하는 혀끝이 쓰고, 동시에 달았다. 독한 도수의 알콜과 함께 섭취했던 과일의 향이 입안에 남은 까닭이었다.
“내 소원은…….”
어둠속, 악마가 빙긋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망토를 크게 펄럭였다. 그리곤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안개가 걷혀, 거짓말처럼 맑은 밤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짝짝짝짝!
휘이익!!!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레이디가 봉긋 솟은 가슴을 부여잡고 의자 아래로 허물어졌다. 그 옆의 신사가 그녀를 부축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한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수백의 인사들이 열광하며 나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바이올린을 갈무리했다.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순간 어느 소녀가 던진 꽃송이가 발치에 툭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그것을 주워들고, 꽃송이에 짧게 입맞춤했다. 또 한명의 레이디가 허물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도 그녀를 부축하지 않았다. 다들 나를 주시하기에 바빴던 까닭이다.
나는 계단 아래로 뚜벅뚜벅 내려와, 따라붙는 작은 사내아이의 손에 바이올린을 쥐어주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저 좋아서 열광하는 꼴들 하고는. 작곡가에게 서찰을 써라. 곡의 제목을 ‘바보들의 갈채’로 정정하라고.”
“네?”
순진한 소년의 눈망울이 혼돈으로 번지는 것을 보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망토를 걸친 어깨 위로 부슬비가 떨어져 내렸다. 습하고 축축한 물기가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부가 바짝 긴장하며 나를 보았다.
“마에스트로, 어디로 모실까요?”
마에스트로라니. 다분히 잘 보이기 위한 호칭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온 세상은 나에게 잘보이기 위해 아부를 떨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비죽 웃으며 “오늘은 좀 걷고 싶군”하고 짧게 답했다.
카페에 앉아있던 비평가 무리 중의 하나가 뛰쳐나와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나 나는 듣지 못한 것처럼 무심히 길을 건너, 비좁은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는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목적지는 늘 정해져 있었다. 며칠에 한번씩, 그리고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늘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항구의 허름한 건물로 들어섰다. 쿰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쥐 오줌인지, 사람 오줌인지 모를 지린내가 폐부를 깊숙이 찔렀지만 개의치 않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섰다. 가장 꼭대기 층의, 가장 왼편에 외치한 방이었다. 묵직한 자물쇠를 열고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닥 한가득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가 붕 떠올라 시야를 어지럽게 수놓았다. 나는 부유하는 먼지들을 지나 안으로 걸어갔다. 오래된 바닥은 늘 삐거덕대는 소음을 만들었다. 쓰러져가는 건물은 버려진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소리를 들을 이웃은 없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곧 넓은 실내가 드러났다.
그곳에 망토를 입은 사내가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실내에는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래도록 사용하지 않은 탓에 바닥에도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곳이었다. 내가 지난 자리에는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의자 주위로는 아무런 자국도 나 있지 않았다. 사내의 주위로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내가 우스웠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가 질문했다.
“어때, 만족스럽나?”
나는 픽, 웃으며 입을 뒤틀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내 영혼을 받아가기엔 아직 멀었을 텐데.”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두지.”
“네 놈에게 순수함이 존재한단 말인가? 차라리 나의 영혼이 순결하다고 하면 믿겠어.”
사내의 짙은 색의 망토가 들썩거렸다. 그는 웃고 있었다.
“그대 같은 영혼은 처음이거든. 고금을 통틀어, 희귀한 것은 누구나 탐내기 마련이지.”
틀렸다. 나를 탐낸 것은 저 사내뿐, 그 전에는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괴롭힐 작정이지?”
“괴롭히다니?”
나는 빙글 돌아 섰다. 또 하나의 자물쇠가 나를 가로막았다. 나는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자물쇠를 해체하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꽉 쥔 손가락들은 남다른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허공에 떠있었다. 어떤 장치도, 눈속임도 없이.
중력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드디어 하늘로 날아 올랐다니 참으로 부러울 일이었지만 실상은 정 반대였다.
그는 서있는 곳에서 단 한뼘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영원히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어깨 너비의 공간안에서.
“나는 애초에 내 한계를 알고 있었다오. 내 영혼이 다서 여섯개쯤 되어, 수없이 팔아 넘겼다한들 저 놈의 유연한 손가락과 눈부신 순발력을 넘어서지 못할 거란 걸 알았거든. 놈에겐 너에게서 얻은 기회가 전부가 아니었어. 정녕, 악마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 말이오? 저 눈부신 날개가.”
증오의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웃으며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내 안의 깊은 곳에선 타닥타닥, 불씨가 터져 나가고 있었다. 그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나는 천재 음악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턱끝에서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나는 상냥하게 속삭여 묻고 싶었다. 무엇이 그리도 괴롭단 말이오, 그대? 그토록 원하던 연주를 하게해주었거늘. 세상의 번민은 모두 잊으시오. 그곳에서, 눈부신 날개를 파닥이며 사랑하는 음악에 취해 연주를 하면 될 뿐이오. 나를 위해서. 영원히.
“그렇지만 언젠가 천재의 이름도 뒤안길로 사라질 테지.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시대는 바뀌기 마련이니까.”
킬킬.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솔직하고, 저열한 웃음소리였다.
나는 척 팔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천재 음악가의 팔이 위로 움직였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리고 그의 팔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얼굴로 온힘을 다해 반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자 참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직도 음악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천재라 불렀다.
그의 바이올린에서 아름다운 연주가 시작되자, 내 손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허공을 움켜쥐고, 천재 연주가의 선율에 취해 손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새로이 선물 받은 곡의 악보를 그의 발치에 떨어뜨렸다. 나로서는 도저히 완벽하게 연주할 수 없는 마디가 그려진 악보였다. 그는 잠시 주춤하는 듯싶었지만 곧 눈에 이채를 띠었다.
허공에 붕 떠서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천사의 모습 같았다. 혹은 그물에 걸린 새와 같거나.
나는 황홀경에 취해 감고 있던 눈을 치켜뜨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나의 덫에 걸린 천재이거나, 나의 영혼을 탐내고 있는 악마일 터였다. 여긴 그들외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어쩌면 세상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네, 나의 연주를 한번 들어보겠나?”
나는 고요한 눈빛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러나 여전히 유연하게 휘어지는 손가락으로 활을 잡은 천재를 바라보았다. 곧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는 희열을 이기지 못해 두 눈을 감았다. 허공을 움켜 쥔 손에서도 소리가 잘만 흘러나왔다.
곧 온 세상이 아름다운 신의 축복으로 그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