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고백을 합니다.
르디플로의 발행인으로서 프랑스판 7월호 1면 톱기사를 보고, 잠시 고민했습니다.
마틴 뷜라르 기자가 쓴 “삼성, 또는 공포의 제국”(Samsung ou l’'empire de la peur)이라는 선명한 제목이
제 뇌리에 복잡 미묘한 심경을 불러일으켰습니다. 1면에 이어 두 개면에 걸친 뷜라르 기자의 글은
한국 사회에서 유비쿼터스적 존재이자 파놉티콘적 실체나 다름없는 삼성에 대해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할 수 없었던 불편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잠시나마 저는 자기검열에 빠져들었습니다.
삼성관련 기사를 1면이 아닌 중간 깊숙이 넣어 대충 넘어갈까도 생각해봤습니다. 최근 몇 주 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주류 언론 뿐 아니라, 일부 진보매체들에까지도 삼성 광고로 도배질하는 현실에서
저도 모르게 미셸 푸코가 지적한 파놉티콘적 규율과 자기기만에 포섭된 듯 했습니다.
어느 순간, 지난 5월말 삼성관련 취재를 위해 방한한 초로의 절친(切親) 마틴은 삼성비자금을 고발한
책을 출간했으나 삼성을 의식한 몇몇 언론들로부터 책 광고게재마저 거부당한 김용철 변호사를
만난 뒤에 제게 걱정을 해주었습니다.
“삼성기사가 나가면, 아마도 기업 광고를 받기가 더 힘들텐데…”
사실, 르디플로 지면에는 지난 수개월동안 한겨레와의 교환광고 외에 이렇다 할 유료 광고가 없었지만,
독자 여러분의 굳건한 지지가 지금까지 버팀목이 되어왔습니다. 마감하느라 며칠째 날밤을 샌 편집장이
주저 없이 “독자를 생각하자”라고 말했을 때, 내심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생택쥐베리가 <어린왕자>에서
언급했듯이, 수많은 꽃 중에 누군가에 의해 길들여지는 꽃만이 의미가 있는 것처럼, 저희 <르디플로>도
다른 매체들과는 달리, 자본이 아닌 독자여러분들에 의해서만 길들여질 때 의미를 갖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르디플로>의 진가는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은 날카로운 분석, 따스한 시선,
균형 잡힌 시각에 있습니다. 독자여러분! 부디 <르디플로>가 당당하게 올곧은 독립 대안언론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도록 변함없는 격려와 성원을 당부드립니다. 주위 친구분들에게도 권유하고,
각 도서관에도 적극 추천해주신다면, <르디플로>의 가치는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넓게 공유될 것입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행인
성일권 드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소식 메일입니다. 삼성 비판 기사를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고민해야 된다는 것이 참... 물론 광고 수익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진보 계열에 속한다는 언론들도 쉽사리 비판하지 못하는 삼성 공화국입니다만 르몽드는 프랑스 쪽에서 나온 기사를 번역해서 올리는 것 뿐인데도 이런 것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모양이네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편집부의 결정에 박수를 보내는 동시에 이런 현실이 과연 해결되기는 하는 걸까하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