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정말 보고싶은 고참 ssul 입니다. 본명이 들어간 것은 다른 의도는 없으니 개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글 속에 안좋은 표현이 있을 수 있으니, 공포글 싫어하시는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래요. 공게에 쓸까 하다가 그래도 밀게가 맞겠다 싶어 밀게에 적어요.
아무리 잘 써도 주관적일수밖엔 없겠지만, 최대한 객관적이고 사실 위주로만 씁니다. 편한 맘으로 쓰려고 음슴체로 써요.
우리부대는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 있는 육군소속 공항경비단임. 지금은 육군 17사단 소속이나, 당시는 103여단 소속이였음.
해안경계부대라서, 오전에는 휴식시간+취침시간 이 있고, 오후는 잠깐 교육 or 잠깐 작업. 야간에는 풀타임으로 다시 초소투입을 하는 그런 부대였음. 초소가 다 간격이 큰지라, 소대별로 따로 막사를 씀. 한소대인원30명 + 운전병 + 야간감시장비 운용병(아저씨들) + 간부 3명 해서 한 소초(막사) 별로 40-45명이 사는 그런 조그만 부대였음.
내가 막 입대한 당시 우리부대는 (2003년임) 구타와 폭력, 갈굼이 난무하는 아주 지독한 분위기의 부대였음. 신병들은 당연히 새로운 환경과 잦은 갈굼으로 의기소침해져 살기 바빳음. 당시 마음의 소리함의 열쇠 복사본을 분대장들이 다 하나씩 들고 있을 정도였음.
본인이 아무리 잘해도 내리갈굼과 단체갈굼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고, 부대 이등병들은 하나같이 의기소침하고 긴장을 항상 하는 그런 부대분위기였음.
나와 내 동기들은 오랜 만에 들어온 신병들이라, 부대내에선 간만에 새로 생긴 아주 싱싱한 먹이감이였고, 우리도 가혹행위와 갈굼으로 하루하루 피폐해져갔었음.
하지만 우리가 딴 생각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준,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준, 한 고참이 있었음.
짬이 나와는 1년정도 차이가 나는, 자대배치 당시 상병이였던 고참이였음. 항상 아들아 아들아 하고 부르며 PX도 자주 데리고 다니고, 정말 사랑과 정성으로 나를 보살펴줬음. 타분대 동기들의 분대는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집나간 어머니가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면, 우리분대는 사랑의 깨가 쏟아지는 그런 분대였음. 보통 이등병 100일 휴가는 일병 깍새가 깍아주는 중대 전통을 뒤짚어 엎고, 간부만 깍아주는 상꺽이였던 이 고참이 직접 정성으로 공을 들여 이쁘게 깍아줬었음. 다른 동기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눈에 받을 정도였고, 아직도 내 머리를 깍아주던 그 순간의 장면이 생각이 날 정도임.
그리고 휴가때마다 손수 옷까지 다려주고 전투화까지 닦아주었고, 다른 고참이 뭐라고 혼내면, 아주 적당한 시점에 끼어들어 말려주며 덮어주는 정말 자상한 사람이였음. 이 고참은 소대마다 2명이 있는 상황병 중 하나였음. 대부분의 소대원이 경계병이였던 소대원들에게 일처리 능력을 인정받는 상황병이였고, 게다가 모든 선후임이 다 좋아할만한 인격과 인내심까지 가지고 있었음.
모두에게 사랑받는 소위 말하는 S급병사인 이 고참의 이름은 김대열 상병이였음.
그러던 어느날이였음.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차량으로 소대전체가 부대복귀를 했음. 그런데 부대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다 라고 느껴졌음.
간부 3명(소대장 부소대장 선임분대장) 은 로테이션으로 한명은 야간상황실, 한명은 야간순찰, 다른한병은 휴식+취침 이런식으로 돌아가며 근무를 서기에, 간부 3명이 전부 상황실에 있는 경우가 평소에는 거의 없었음.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도 간부 3명이 상황실에서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서 있는 것임. 근무때 사용한 총기, 탄, 장비들을 상황실에 반납하면서 들리는 소리가 전날 밤 야간 상황병이였던 김대열 상병이 한두시간이 넘도록 안보인다는 것이였음. 당시 야간상황실 근무였던 부소대장은 아침에 소대원들의 근무복귀때까지 상황실에 엎드려 잠을 잤기에 아무도 그 행방을 알 도리가 없었음.
어디 짱박혀 자는 것일 수도 있어 중대장에게 보고도 못하고, 어디 짱박혔나 싶어 내무실이나 화장실등으로 찾아도 안보이고, 어찌해야하나 하고 안절부절 하고 있는 것이었음. 하지만 평소 행실이나 인격으로 봤을 때 절대 나쁜 생각을 하거나, 탈영을 할 사람이 아니기에 우리 소대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음.
그러나 다시 한두시간이 지나고도 김대열 상병은 나타나지 않았고, 소대장은 곧바로 중대장에게 보고를 올림과 동시에 소대원들을 5명씩 조를 짜서 부대 주변을 수색하기로 했음.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정말 별 일 아니겠거니 하고 치부하고 있었음. 나의 조는 해안가를 탐색하기로 했고, 선착장쪽부터 시작하기로 했음. 부대 앞 선착장은 바지선이라고 불리는 아주 거대한 배가 드나드는 곳임. 선착장은 밀물때면 거의 땅 높이 1-2m 아래까지 물이 차오르지만 썰물이 되면 땅과 갯벌의 높이 차이가 6-7m까지 나는 곳이였고, 그 사이로는 난간이나 펜스가 없는 아찔 한 곳이였고, 평소에도 그 쪽으로는 이동이 금지 되어 있기도 했음. 우리는 선착장 해안선을 따라 이동을 하며 걷기 시작했고, 얼마 후 나는 갯벌 아래로 반 쯤 파묻혀있는 마네킹을 보았음. 우리부대 초소들은 근무를 서는 당시를 제외하고는 군복을 입힌 마네킹을 초소 안에다가 세워두고 철수를 했음. 당시 불량 마네킹이 많아져서 버리고 새로 마네킹을 주워와서 군복을 입히고 위장 하는 작업을 많이 했고, 나는 작업중 버린 마네킹 중 하나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고 했음.
하지만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마네킹과 가까워져가면서 점점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어느순간 우리 5명은 누가 뭔저랄 것도 없이 그 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음. 그리고 6-7m 절벽 아래의 물체를 보며 뭔가 아차 싶은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절벽을 삥 둘러서 절벽아래 갯뻘 쪽으로 뛰어갔음. 거기엔 김대열 상병이 누워있었고, 살이 하얗게 변해서 마네킹으로 착각했던 것이였음.
밀물때 물에 빠졌었는지, 온몸은 다 젖어 있었고, 바닷물이 꽤 차 있던 밀물 때 절벽을 기어오르려 했던지 손 전체가 생채기 투성이에, 손톱이 다 빠져있었고 전투복이 긁히고 헤어져 있었음. 나는 혼과 육이 분리되어 아찔해져만 가는 느낌을 받았고, 이내 겨우 정신을 차려가며 눈을 감겨주는 것 밖엔 해줄 수 있는게 없었음.
나중에 수사 최종결과로 알려진 사실은,...
불과 몇시간 전인 새벽 4-5시쯤, 수상한 선박이 선착장으로 접근한다는 감시대 연락을 받고 김대열상병은 그렇게 혼자 선박이 미확인 수상한 선박인지 그냥 동네 어선인지 눈으로 확인하려 나갔던 것이였음. 원래는 순찰간부가 가야함이 맞지만 순찰간부 차량은 당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음 우선순위로는 상황실간부+운전병+비번2명이 오대기처럼 차량으로 나가야 하는게 FM이었음. 하지만 당시 엎드려 자고 있던 부소대장은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질 않았고, 선박은 실시간으로 해안선으로 점점 접근하고 있고, 상급부대에서는 빨리 확인하고 보고하라고 재촉하고... 그래서 급한 마음에 상황실에 있는 여러대의 수화기들을 집어서 책상 위에 올려두고, (이러면 옆에 자고 있는 부소대장도 수화기들을 본 순간 뭔가 상황감지를 할 것이라 생각했고, 타부대나 상급부대에서 전화가 와도 통화중으로만 신호가 갈테니 전화를 못받아도 통화중이였다는 변명거리가 되고) 이렇게 상황실을 벗어나면 안되는 상황병 자신이 직접 후래시 하나만 들고 상황실을 임기응변으로 다 막아두고 직접 선착장으로 뛰어 나갔던 것이였음. 막사와 선착장 절벽과의 직선거리는 500m가 채 안되었음.
여튼 우리가 김상병의 시신을 찾고 몇시간 후, 수사반이 차려졌고, 김상병 부모님이 오셨음. 최초발견자중 하나였던 나는 이리저리 불려다녔고, 너무너무 죄송하기만 해서 정말 만나뵙기 싫었던 부모님과도 만났음. 당신의 자식보다 어린 나에게 존댓말을 쓰시며 땅에 주저 앉으셔 나의 다리를 부여잡으시며 우리 아들 다시 살려내주세요 라고 외치실때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자살하고싶다 라고 느낄만큼 정신적 피폐함이 왔었음. 몇주간 우리 소대는 아무런 근무도 훈련도 없이 내무실에 앉아서 진술서와 소원수리만 썼음. 정말 음식하나 입에 안들어가고 몸에 힘 하나 없이 몇주를 보냈음.
소대장, 선임분대장은 전출 통보를 받고, 우리에게 작별인사 하나 없이 갑자기 떠나갔고, 부소대장은 영창을 갔다가 직후에 바로 불명예전역을 했다라는 말만 들었음. 관심사병이란 말만 듣다가 나는 관심소대라는 말을 이쯔음 처음 듣게 되었고,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소대였음. 그리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소대자체가 해체가 되어 소대원들은 뿔뿔히 흩어진다 라는게 공공연히 들렸음. 그렇게 우리소대는 박살이 나서 흩어지는 듯 했음.
그리고 얼마후, 김대열 상병은 병장으로 추서 일계급 진급을 했고, 막사 뒷편으로 기념비가 생겼음. 화장을 한지라, 묘가 따로 없었고 김대열병장 부모님은 묘대신 기념비가 있는 부대로 자주 오셔서 올때마다 떡과 음료수를 주고 가셨고, 나는 도저히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아 오실때마다 일부로 근무를 잡거나 피해다녔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죄송하지만, 당시에 내가 스스로 버틸 수 있으려면 그 방법밖엔 없다 라고 생각이 들어서였음. 그렇게 꾸역꾸역 버티다보니 부대해체는 없던 일이 되어 있었고, 몇달 후에는 다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
그 일이 정확히 10년전, 2003년 7월 중순 딱 이맘때였어요.
누가 잘못했고, 누가 잘했다를 판가름 하기 위해 오늘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정말 몇해 간 그랬듯이, 인천공항 근처 김병장 기념비에 가서 외박때 그렇게 잘먹던 감자탕에 소주라도 한잔 부어주고 싶은데, 제가 지금 지구 반대편 너무 먼 곳에 있어서.... 못가서 너무 미안하고 너무 보고싶어서 넋두리로 적어봤어요. 제동기나 김병장 선후임들이 자주 찾아 간걸로 아는데, 연락을 하면서도 한번도 같이 찾아간 적은 없었네요.
그리고 망각의 동물 답게 참...,
김병장에 대한 기억을 잊어만 가는 제 자신이 미워서, 김대열병장 안 잊어먹을려고 안 잊어먹고싶어 적어본 거에요.
김대열병장 진짜 너무 보고싶다. 거기서 잘 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