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밀덕질 하다가 나무위키에서 2차세계대전 일본군 주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는데
그중에서도 인도주의적이고 본받을만한 인물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한번 정리해봅니다
야스에 노리히로(安江 仙弘, 1888-01-12 ~ 1950-08-14)
수많은 유대인과 조선인의 인명을 구한 영웅이자 성자. 유대인 2만 명을 구했으며 싱가포르 화교 학살 당시 출장 중이었던 야스에가 학살 담당자에게 뇌물을 건네주고는 300명의 사람들을 구출해낸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건국 공로자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자신의 부대에 위안부 금지는 물론이고 조선인 징용자들에게도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
츠치야 코우겐(土屋 公献, 1923-04-03 ~ 2009-09-25)
일본 육군 소위, 전 일본 변호사회 회장, 그리고 위안부 수요집회의 창시자.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 당시 검도 2단이라는 이유로 워렌 본을 참수시키도록 명령받았지만, 학도병 출신 중 검도 4단이 있다는 걸 알고 역할을 떠넘겼다.
그러나 인육은 끝까지 먹지 않았는데 육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거짓말로 속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이 엄청나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육지에서 나는 고기는 입도 대질 않았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자신이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비운의 군인일 수 있으나 731부대의 만행을 까발린 분이시며, 일본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했었고, 상술했듯 위안부 수요집회를 만들어낸 분이시다.
2009년 신장암으로 영면하셨다.
이마무라 히토시(今村 均, 1886 ~ 1968)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호감을 얻었고, 포로학대와 학살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심지어 어떤 장교가 시민들에게 장난을 쳤는데 이를 질책을 하면서 근신 처분을 받게 했다.
예를 들면, 자바 섬을 점령하였을 때 일본 정부의 목면 징발에 대해 반대하였다. 당시 자바섬에 목면은 생필품으로 중요하게 사용되었는데, 목면을 징발하면 현지인들의 장례식에서 죽은 자에게 목면옷을 입히는 종교 전통을 손상시키고, 목면이 주수입인 기본 생활을 파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중일전쟁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태도가 문제가 되어 결국 1942년 11월에 현지를 떠나게 되었지만, 공훈이 공훈이라 좌천을 포함한 처벌은 거의 없이 영전이라면 영전인 제8총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3년에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라바울에서 농사를 지어가며 패전까지 버텨낸 것으로도 유명한 일본군 육군의 개념인. 위안부를 전면 금지까진 아니지만 전면 자제령을 내렸다.
게다가 뒤늦게나마 후회한 게 위안부를 전면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마이 다케오(今井 武夫, 1898-02-23 ~ 1982-06-12)
중일전쟁을 빨리 협상으로 끝낼 방법을 연구하였지만 삼국동맹 체결 때문에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필리핀 제14군으로 배속되어 당시 바탄에서 미군과 사투를 벌여 승리했으나,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에 의구심을 품고 자기가 잡은 미군 포로들을 무장만 해제한 뒤 석방했다.
그 뒤 마닐라 방위 사령관으로 루손 섬을 안정시키고 대동아성에 배속되어 난징 괴뢰 정부에서 재직하였다. 국부군과 협상하여 휴전 협상을 국부군 측 대표인 허잉친과 만나 단번에 성사시켰다.
패전 후에는 허잉친에게 억류되었지만 허잉친이 그를 전범 취급하지 않고 훈방한 뒤 적극적으로 그와 함께 중국 거주 일본인 귀환을 주도하여 소련으로 끌려가거나 중공에서 남아 혹독한 삶을 보낸 만주국 거주 일본인과는 달리 200만의 일본인을 귀환시키고 본토로 복귀했다. 1982년 85세로 사망했다.
히라바야시 모리토(平林 盛人, 1887-11-10 ~ 1969-05-21)
제17사단장. 자신의 부대에 위안부를 전면 금지시킨 인물이다. 중일전쟁에 회의적이었으며 주둔지에서 태평양 전쟁 개전 소식을 듣자 장교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한탄했다.
"중일전쟁도 수렁에 빠져 있는데 영미와 전쟁을 할 여유가 있는가?
태평양 전쟁 개전을 하면 1년간은 우세하지만 그 이상 시간을 끌면 불리해진다.
노후화된 우리 장비로 최첨단화된 장비로 무장한 영미를 꺾을 수 없음은 이미 노몬한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또한 도조 히데키를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그 당시 도조 히데키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던 인물임을 생각하면 히라바야시의 발언은 당장 역모죄로 잡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헌병 사령관 정도만 하고 예비역으로 물러나야지 그 놈은 총리대신에 어울리지 않는다."
구도 슌사쿠(工藤 俊作, 1901-01-07 ~ 1979-01-12)
구축함 이카즈치 함장.
수라바야 해전당시 자신이 격침한 영국군 중순양함 익세터의 승조원들을 자매함 이나즈마와 함께 전부 구조하여 신병 확보 후, 다음날에도 영국군 구축함 승조원들을 바다에서 건져 올린 뒤 이들을 하나로 모아, 반저르마신에 정박 중이던 의료선 옵텐노르트에게 자신이 확보한 포로를 전부 인도했다.
그 뒤 지병 악화로 군에서 물러나며 조용히 지내다 세상을 떠나지만 쿠웨이트·스웨덴 주재 대사를 지낸 영국인 샘 폴이 당시 중위였던 자신을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 그를 수소문하여 결국 2008년 그의 묘소에 주일 영국 대사와 함께 참배하기도 했다.
정말...; 저런분들이 도조 히데키나 이시이 시로같은 개쓰레기들이랑 같은 나라의 군인이었다는게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