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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99시 99분 죽어야 할 시간 (BGM)
게시물ID : panic_521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37
조회수 : 473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3/07/08 07:30:01

 




 
환한 통유리를 통해 밖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시원해 보이는 밖의 풍경은 잔인한 여름.
그리고 이곳은 잔인한 카페.

지긋지긋한 카페.
지긋지긋한 커피냄새.

이 카페에 아주 오래 있었다.
며칠을 있었더라.

1, 2, 3, 4, 5, 6
그래.
9999일.

아니 정확하게는 표현하자면 '9999번째' 있는 중이다.

내 앞에 놓인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
목에서 신물이 올라온다.

누가 아메리카노를 고소하고 씁쓸하고 짭조름하면서 달콤한 게 깊은 맛까지 있다고 하던가.
이건 악마가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쓴 물이다.
심지어 마시기 짜증나게 뜨겁기 까지 하다.

지옥에서 왔나보다.

아마 조선시대에 아니면 삼국시대에 사약을 받기 전,
예행연습 삼아 홀짝여 보라고 만든 게 분명하다.

브라질? 에티오피아? 콩고? 아니다.
이 쓴 사약 맛을 구현 할 수 있는 건 우리 선조들 밖에 없다.

증오한다. 아메리카노.

수 천 잔을 마셨다.
먹을 게 이것 밖에는 없다.
주머니는 비었다.
배는 고프나, 역시 먹을 건 아메리카노 뿐. 망할, 그란데, 사이즈. 뿐.

9999일 전에, 그러니까 9999번째 전에 커피 주문 받았던 여자.
속 비치는 흰 블라우스에 스키니 진 입고 있던 아르바이트 여자.
그 여자를 꼬셔보려고 나는 카페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연락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

미친놈.

온 카페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다.
힐끔 거리며 보는 사람도 있었고,
웬일이야~ 소리치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번호를 따는 지 못 따는지 내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입이 아 벌어져 있는 사람, 눈을 그윽하게 뜨고 있는 사람,
내가 재미나는지 싱글벙글 거리는 사람
그리고 연락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물어 본 얼뜨기와,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 휘리릭 도망쳐버린 블라우스 입은 여자도 있었다.

그냥 나왔어야 했는데,

괜히, 아 괜히, 아메리카노는 받고 떠나야 할 것 같았다.
3000원도 돈은 돈이었고, 나는 돈 3000원을 주고 커피를 샀으니까.
고백이랑 커피랑은 아무 관계없으니까….
내가 차인거랑 커피랑은 아무 관계없으니까….
없으니까!

커피 홀짝이는 사람들의 눈총에 맞아 나는 그렇게 치명상에 피를 질질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커피는 나왔고, 나는 아직 떠나지 못했다.

문제는 그때부터다.
그러니까 지금,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다.

그러니까, 맨 처음에. 맨 처음 내가 이곳에서 커피를 한 잔 다 마실 때까지.
눈총을 맞다가 피 흘리고 신음하며 카페를 나갔을 때,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카페 앞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으로 건넜다.
차가 오는지, 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반 뜀박질로 건너던 중
성난 코뿔소처럼 달려오는 검정색 SUV가 한 대 나를 치고 지나갔다.
몸이 하늘을 날았다.
허리부터 아랫배까지 철덩이가 덮쳐오던 그 묵직함은 아직 잊어지지 않는다만,
그 상처는 모두 사라지고, 나는 다시 카페 안이었다.

아직 그 때는, 내가 잠깐 졸아서,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창피해서
눈을 감았다가 졸았거나, 아니면 일순에 몰려온 극심한 스트레스에 졸도를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쥔 채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걸음은 급했고, 일단 도로를 건널까 반대 차선을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난 코뿔소 같은 SUV가 호랑이 같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뒤돌아섰다.

내가 아니어도 그럴 것이다.

뒤를 돌아 설 때, 혹시 누가 있는지, 혹시 누가 나와 부딪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조심조심 돌아서는 사람이 있진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웬 떡대와 부딪혔다.
손에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가 그의 넓대대한 가슴팍과 내 손을 뜨겁게 달궜다.
그의 하얀 티셔츠는 갈색으로 예쁘게 물들었고,
내 손은 커피의 고소한 향과 함께 볶아지고 있었다.

"앗! 씨발…."

손이 뜨거워서 한 말이었다.
그 남자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은 모양이겠지만.

그 남자는 "이 개새끼가." 라는 짧은 말을 남기며 내 턱을 정확히 가격했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SUV와 충돌하던 것만큼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하늘이 뱅글 도는 것이 느껴졌고,
땅이 이마로 돌진해 오는 게 보였다.
도로 측 아스팔트 위에 코를 박는 그 순간,

나는 다시 카페 안이었다.

사람들은 아직 나를 보고 있었다.
악마의 쓴물은 아직 김이 펄펄 피어오르고 있었고,
묘했다. 꿈만 같았다.
SUV에 치었을 고통도, 땅바닥에 코를 찧었을 고통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생생했는데.
그때 내 정면에 있던 전자시계의 빨간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점들이 이뤄 놓은 숫자들.

-00:02

또 졸았나?
눈동자를 굴렸다.
이상했다.
카페의 통 유리창으로 도로를 내다보니,
SUV가 다시 미친 듯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타이트한 흰 색 티셔츠를 입은 근육질 남자도 지나갔다.
좀 전에 내 턱에 핵주먹를 날려 준 그 남자였다.

데자부? 기시감? 뭐든 좋았다.

아직 카페 사람들의 호기심이 빗발치는 화살처럼 내게 꽂이고 있었다.
몰래몰래 훔쳐보기는…… 뭘 봐, 이 사람들아. 등신 같은 남자 처음 봐?

이제 커피는 아무래도 좋았다.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를 놓아둔 채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SUV도 지나갔고, 흰 티셔츠 남자도 지나갔다.

꿈이었나?
나는 언제 졸았었나?
강렬했던 통증들이 기억에서 살아났다.
해괴한 일이었다.
카페를 나서며 헛웃음이 터졌다.
이게 웬일이람.
여자한테 대뜸 연락처나 달라고 하다 단호박처럼 차이고,
개꿈이나 꾸고 있는 꼴이람.

"위험해요!"

응?
어떤 대머리 아저씨가 나를 똑바로 보고 소리쳤다.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주 찰나 같은 순간, 뭔가가 정수리를 호되게 강타했다.
목이 납작하게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목이 부러진 모양이었다.
넘어지며 시야에 들어 온 것은 간판.
악마의 쓴물을 만들고 있는 이 악마 같은 카페의 간판.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봐요!"

나를 향해 달려오는 대머리 아저씨와 간판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나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침을 삼켰다.
전자시계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00:03

시계가 이상하다.
지금은 대낮이고, 00:03이라면 시계는 24:00을 따르는 24시간 형 전자시계란 뜻이다.
그렇다면 00:03이 아니라 12:03이라 표시되는 것이 맞았다.
00:03이라면 밤 12시 03분이란 뜻이 아니던가?
낮에는 12:03이어야 맞지.
뭐야 이상해.
그리고 지금 00:03은 무엇인가.
아까 00:02를 본 기억이 있었다.
가만히 앉아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00:03
-00:03
-00:03
-00:03
-00:03







1분이 이리도 길었던가?
사람들은 아직 나를 우리 속에 갇혀있는 원숭이처럼 재미있는 듯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그랬다. 누군가, 쪽팔려서 못 움직이나봐? 하고 말했다. 말하곤 깔깔깔 하고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목소리를 향해 눈을 돌리자, 한 무리의 남녀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남자 셋, 여자 셋.
90년대 시트콤이냐?
그들에게서 눈을 돌렸다.

오싹해져왔다.

나는 왜 계속해서 죽는 것만 같은 헛것을 보고 있는가.
기분이,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하게 허기가 밀려왔다.

테이블 앞에 있는 건 아메리카노 커피.
지갑엔 돈이 없었다.
카드로 베이글을 주문했는데, 한도가 지났다는 말을 듣고 되돌아와 앉았다.
집에 돌아가서 뭐라도 먹고 싶었다.

또, 뒤에서 그 남자 셋 여자 셋이 목청을 높혔다.

"돈도 없어."

깔.깔.깔.

다시 그들을 돌아봤다.
남자 셋 여자 셋은 내 눈길이 같잖다는 듯, 아니꼬운 눈빛으로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물론 내 눈빛도 그러했겠지.
하지만 그건 남자 셋 여자 셋의 탓만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했다.

당장 배가 고픈 대로 커피를 들이마신 뒤 일어섰다.
간판은 떨어지지 않는다.
카페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 한가한 큰 거리로 나왔을 때.
누군가 뒤에서 소리쳤다.
깜짝 놀랐다.
무심결에 놀라며 위를 올려다봤다.
간판은 아니었다.

"야!"

야?
뒤를 돌아보니, 남자 셋 여자 셋이 보였다.
뭐지?

"너 아까 왜 우리 쳐다봤냐?"

나한테 하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들을 무시한 채 다시 뒤돌아 걸었다.

그러자 남자 셋 중 하나가 내게 달려와 어깨를 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파릇파릇 한 게 고등학생 아니면 이제 막 대학 들어간 신입생인 것 같았다.

"왜 대답을 안 해?"

"꺼져." 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아니꼬운 만큼 내 기분도 그랬다.

안 그래도 꿈인지 생신지 모를, 아주 현실감 있는 죽음을 몇 차례나 경험한 상태였다.
배는 고팠고, 왠지 모르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 뒤에서 다짜고짜 나를 때렸다.
이성이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멋대로 주먹을 휘둘러 한 방을 돌려줬다.

곧 내게로 날아오는 주먹과 발길질이 한 타이밍에 세 개씩으로 늘었고,
바닥에 쓰러졌을 때.
나는 다시 카페에 앉아 있었다.

곧바로 전자시계부터 보았다.

-00:04

00시 4분?
벼락이 치는 기분이었다.
1분이 늘어났다.
주변이고 커피고 뭐고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뛰어야했다.
이건, 이건 뭐야?
시야를 멀어졌다.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이 무조건 달렸다.
내가 생각 없이 도로로 뛰쳐나갔다고 생각 한 순간,
그 성난 코뿔소 같던 SUV가 옆에 보였다.

그리고 다시 카페.

-00:05

점점 배가 고파오고 있었다.
허겁지겁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입천장이 데일정도로 뜨거웠지만, 그 고통이 허기를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가슴에서 복부로 뜨거운 커피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끼며, 궁리를 시작했다.
대책 없이 나간다면, 분명 또 죽을 것 같았다.
신중해야 했다.

뒤에서 또 목소리가 들린다.

쪽팔려서 못 움직이나봐?
깔.깔.깔.

목이 반쯤 자동으로 돌아갔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카페를 나서며 위를 올려다 보다 얼른 몸을 카페 안으로 다시 넣었다.
아찔한 기운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아주 께름칙했다.
께름칙한 느낌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곧 카페의 간판이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폭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얼마나 무거웠으면.
여자들의 비명이 빗발치고 있었다.
유난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비명은 지속적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소리를 치는 거야?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서히 몸이 뒤로 넘어지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카페 바닥에 누워버리자, 목 주변으로 뜨거운, 아주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피? 내 피?
이럴 수가 있는가?
플라스틱?
간판이 떨어지며 튕겨 나온 간판 조각이었다.
플라스틱이 내 목에 정확히 날아와 박힌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만 같다.
거짓말이야.
남자 셋 여자 셋이 내게 몰려와 나를 흔들었다.
119를 외치는 소리가 저기 멀리서 꿈결처럼 들려온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다시, 카페.

-01:10

이번엔 아주 카페에서 안 나가볼 생각이었다.
전자시계는 계속해서 01:10
한참이나 있었다.
계속해서 카페에 머물렀더니, 어디선가 진한 가스 냄새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아주 지독했다.

어디서? 무슨 가스 냄새가 날 수 있지? 라고 생각한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큰 불길이 내게 달려들고서,

또다시 카페.

-19:42

카페를 벗어나는 길에 남자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살벌한 싸움이었다. 위험했다.
괜히 어설프게 엮였다간 죽을 것이다.
그들을 피해 빙 둘러서 길을 지나는 데, 웬 여자가 나를 붙들고 늘어졌다.

"도와주세요! 저러다 살인나요!"

여자가 내게 매달린 동안 싸우고 있던 남자 중 하나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이대로 모른 체 지나가야했다.
까딱하면 내가 죽는다.

"사라졌네요. 괜찮아요. 싸움 끝났어요."

여자가 옆을 돌아보며 비명을 질렀다.
식식 숨을 크게 내쉬는 소리가 들리던 순간.
그 순간 나도 여자를 따라 돌아보는데, 배를 관통하는 차가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싸우던 남자, 사라졌던 남자였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광기어린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점점 광기의 붉은 빛은 당황의 검은 그림자로 탈바꿈 되어갔다.

마치, 찌를 사람을 착각했다는 듯.

그리고 다시….

-34:14

카페 바로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고 비로소 택시가 카페 앞에 잠시잠깐 정차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소중한 정보였다.
놓여선 안 됐다.
잽싸게 택시로 올라탔다.

"아저씨! 상설매장으로 가주세요! 빨리! 빨리요!"

알겠습니다~ 호쾌하게 대답한 기사 아저씨가 핸들을 꺾을 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상설매장으로 가기엔 U턴을 하는 것이 빨랐다.
텅 빈 도로.
택시가 옆으로 나아가던 순간 그 망할 놈의 SUV가 보조석을 덮쳐왔다.

카페.

-45:94

별안간 심장이 조여 왔다.
누군가 움켜쥐는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그대로 땅바닥으로 몸이 무너져 내렸다.

또, 카페.

-74:08

남자 셋 여자 셋을 때려줬다.
죽을 댄 죽더라도, 너희는 용서할 마음이 없다.
몇 번이라도 때려주마.

-87:86

이때부터 죽음 이외의 불안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전자시계는 99:99까지 밖에는 표현할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그 다음은 어찌되는 것인가.
모든 것이 끝나는 건가?
불투명한 시간의 흐름.
저놈의 전자시계는 내가 몇 번 죽었는지 만을 알려줄 뿐,
그 이상의 정보를 제공할 줄은 몰랐다.

진짜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울음이 터졌다.
허무했다.
왜 이리 허무한가.
내 삶은.

오열을 하는 내게로 당연히도 사람들은 눈을 돌렸다.
아까 블라우스 입은 여자에게 차이는 광경보다 수백 배는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울다보니 가스냄새가 났다.

-99:42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이렇게 죽기엔 너무 억울했다.
죽음의 패턴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밖에서 카페를 한참 바라보고 있자면, 카페에 가스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즘 시대에 가스 폭발이라니. 요즘 도시가스가 아닌 곳도 있단 말인가?

제길. 이곳엔 간판들이 너무 많아. 항상 위를 보며 걸어야했다.
괜한 사람과 어깨가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까먹을 수 없다.
남자도 위험했지만, 여자의 경우는 심지어 무섭기까지 했다.

스턴건을 갖고 다니는 여자가 있을 줄이야.

쇼크사를 한 것이 몇 번이던가.
내가 그렇게 심장이 약한 줄은 몰랐다.
세상이 이렇게 흉기로 가득할 줄은 더더욱 몰랐다.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었다.
이 잔혹한 여름의 쨍쨍한 햇살을 받고 있는 도시는 마치 죽음의 페스티벌처럼 보였다.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갔더니 집에 불이 났었다.
타죽는 그 고통.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친구네 집으로 향했을 땐,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추락했다.
조심성이 부족했다.
계단으로 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랴.
물론 계단으로 가다보면 뭔가가 또 있었겠지.
그래서 굴러 떨어졌겠지.

아무것도 없는 훤한 공원으로 피신하자, 조기축구회의 축구공이 날아왔다.
축구공을 맞고도 뇌진탕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축구선수를 하지, 왜 남의 머리통을 깨부수는가.
조기축구회.

아니다. 그들 탓이 아니다.
내 탓이다.

옷깃만 스쳐도 나는 죽는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차피 죽는다면, 고통 없이 죽는 법을 택하고 싶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
아차, 깜빡 위를 올려다보는 것을 잊었다.
간판 조심해야 했었는데.

쯧, 제자리로 돌아왔다.

-99:99

선택이라고 할 것이 남아 있던가?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었지만, 아직 가스 냄새는 나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이곳에 왜 왔던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너무 예뻐서.
아주 오래 전부터 눈 여겨 봤는데, 그래서 먹을 줄도 모르는 아메리카노,
그나마 가장 싸기에 마시던 아메리카노, 그 사약 같은 놈 매일 마시며,
그냥 얼굴 구경이나 좀 하고 싶었는데.
무슨 용기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고백까지 했다가,
나는… 나는…… 나는 도대체 지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뭔가 죄를 지었는가.
나는 죽어 마땅한 놈인가.
구천구백구십구 번이나?

확실한 건 하나밖에 없었다.
99:99 이다음 숫자는 없다.
이제 내 목숨은 한 번 밖에 남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 셋 여자 셋이 떠든다.

“오오! 일어났다.”

오오! 그래. 일어났다. 어쩔래. 마지막 한 번이다.
너희 같은 놈들에게 허비할 순 없다.

카운터를 열고 블라우스 여자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아무도 나를 막아서지 않는다.
다른 아르바이트 녀석이 나를 꼬나봤지만, 무시했다.

이판은 사판이다.

거울을 볼 순 없었지만, 내 눈에 가득 독기가 담겨있는 건 확실했다.

모두. 블라우스. 네 탓이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

카운터를 지나니 뒤로 휴게실이 나왔다.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다.
휴게실에 붙어있는 뒷문을 지나자, 작은 공터가 나왔다.
블라우스 여자는 그곳에 있었다.

때릴까?
아니지.
또 웃음이 나왔다.
그녀를 봐서 뭘 어찌하겠는가.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놀랐나보다.
내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겠지.
나도 9999번 만에 여기 올 생각이 들었다.

눈이 마주치는데 이상하게 피가 끓는 기분이다.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사실 아프게 비틀 듯 꽉 쥐어 짤 마음이었지만,
잔뜩 몸이 움츠러든 여자를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저절로 낮은 목소리가 나왔다.

"이거 봐요."
"…."
"대답해요."
"…."

대답이 없다.
상관하지 않겠다.
하고 싶은 말이나 해주고 죽어야겠다.

"싫으면 싫다고 대답이라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도망치는 게 싫다는 답이 될 순 있지만, 있겠지만. 그래도 예의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가 아무리 모르는 사이이고 생판 남이라지만, 남자 대 여자로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을 했으면, 최소한의 의리라는 건 있는 거 아닌가요? 싫어요. 죄송해요. 남자친구 있어요. 할 수 있는 말 많잖아요. 왜 그냥 도망가요. 사람 무안하게. 예? 말 해봐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 내가 왜 싫어. 어? 당신은? 그러는 당신은 그렇게 잘났어? 예쁘면 다야? 나는 뭐. 못생겨서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이상한 놈이 고백해서 창피해서 도망쳤어?"

갑자기 반말이 나왔다.
화를 내 본 것도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논리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
순전한 개소리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기분은 개운해졌다.

목소리가 떨렸다.
여자를 잡고 있는 손도 떨렸다.

"그런 게 아니라…."

드디어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 뭐.
응? 그런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처음이라, 너무 놀라서."
"예?"
"너무 놀랐어요. 저도 사실 손님 매일 오는 거 기다리고 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정말이에요."
"…."

말문이 막힌다.
여자는 얼른 앞치마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리곤 내 손바닥을 낚아 그 위에 빠르게 숫자를 적어 나갔다.
무엇인가. 이 열한자리 번호의 조합은.
0103414………….
전화번호?
분명 전화번호다.
뭐야 이거?
손바닥에 전화번호를 적다니. 20세기 스타일?

"저 이따 다섯 시에 끝나요."
"예?"
"전화주세요."

여자는 도망치듯 가게 안으로 사라졌다.
가짜 번호?
내가 무서워서 가짜 번호를 미기로 던져 주고 경찰을 부르러 갔나?
그리고 나는 경찰에게 호송당하다, 그 망할 코뿔소 같은 SUV가 또 나를 덮치겠지.
그렇게 죽는 게 나의 마지막 시나리오인가?

씨발.

어떻게 죽으면 어떻단 말인가. 이제 와서.
죽어주마.
죽기 전에, 담배 한 대만 더 피우고 죽어주마.

잠깐.

내가 라이터를 켜는 순간, 가스 폭발이 일어나는 건가?
그게 시나리온가?
그렇다면, 이 번호는 진짜 번호인가?
모르겠다.

멋지게 담배를 피우고 장렬히 죽고 싶었으나, 라이터를 켜는 게 겁이 났다.
잔뜩 쫄아서 라이터를 살살 켜봤다.
불이 켜질 때는 소스라쳤다.
등신처럼.

담배를 한 대 필터 끝까지 피웠다.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며, 마음의 정리를 끝냈다.

죽자. 죽으러가자.

휴게실을 지나, 카운터로 나왔다.
남자 셋 여자 셋이 소리친다.

“나왔다!”

그래. 나, 왔다. 어쩔래.

그리고 박수.
갈채.

응?
갈채?

사람들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박수를 쳤다.
카페가 떠나가라 환호성이 멈추지 않는다.
웬 여자는 눈물까지 짓고 있다.
블라우스 여자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이따 전화 줘요."

경찰은?
안 와?
경찰 안 올 거야?

카페를 벗어나, 하늘을 보며 걸었다.
아직 간판을 떨어지지 않는다.
횡단보도. SUV는 지나가지 않았다.
공원을 지나며, 조기축구회도 없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다가, 아참, 내가 배가 지금 엄청 고프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을 끓일 틈도 없이 생것을 마구 부숴먹었다.

불이 날건가?
아니. 불은 나지 않았다.

-17:00

그녀가 끝났을 시간이다.
전화를 걸자, 통화음 두 번 만에 그녀가 받았다.

"어디에요?"

-17:12

막상 그녀와 대면하니, 몸이 얼어버리는 것 같다.

-17:13

아직 얼어있다.

-17:14

무슨 말이라도 좀 해라, 이 똘추야.

-17:15

그녀가 물었다.

"영화… 좋아해요?"
"예…. 영화, 좋아해요."

좋아한다. 사실이다.
물론 그저 평범한 선에서.

"바톤 핑크, 봤어요?"
"옛날에 했던 건 봤어요."

명작이다.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이번 리메이크 보러 갈래요?"
"코엔 형제 좋아하세요?"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또 쓴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의외로 달콤한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다. 왜 달콤하지?

그녀는 잘 웃는다.
코엔 형제의 영화 이야기를 하며, 늦은 시간까지 그녀와 함께 있었다.

-23:02

그녀를 바래다 줬다.

"잘 들어가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뒤로 돌아 집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어렴풋한 미소가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은 뭔가, 뭔가 이상하기도 하고.
야릇하기도 하고.
이것은 뭔가.
정말로 뭔가.

"연락 또 해요? 꼭 해요 우리?"

그녀가 뒤돌아서 말했다.

"당연하죠. 꼭, 연락할게요. 집에 가자마자 할게요. 아니, 집에 가는 길에 할게요."

내 대답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23:47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아직 얼떨떨하다.
너무 긴 하루였다.

-23:48

졸리다.

-23:49

눈이 감긴다.

-23:50

…………………….

-23:51
-23:52
-23:53
-23:5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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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9
-00:00
-00:00
-00:00

-00:00

카페.

응?
카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있다.
우리에 갇힌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남자 셋 여자 셋이 소리친다.

쪽팔려서 못 움직이나봐?
깔.깔.깔.

망할.

살아남아도 이 굴레를 벗어 날 수는 없는 건가?
나는 좀 전에 잠들었는데.
제발 꿈이길.
00:00?
다시 제로야?
뭐야 이건.
그렇다면 또 몇 번을 죽어야 하는 건가.
제발 꿈이길.
제발 꿈이길.
제발.
제발.

-00:00
-00:00
-00:00
-00:00
-00:00
-00:00
-00:00
-00:00
-00:00
-00:00
-00:0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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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8
-06:59
-07:00

알람소리에 깨어났다.
방이다.
카페가 아니다.
방이다.
살았다!
살았나?
헷갈린다.
가슴 위에 핸드폰이 올라있었다.
그렇다면 어제와 이어지고 있다는 뜻인가?
어제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일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죽음의 굴레는 벗어난 것인가?

손에 땀이 흥건했다.
양손 가득 핸드폰이 쥐어있다.
손에 꼭 쥔 채 잠들었었나 보다.
그녀에게 메세지가 와있다.

'자요?'
'잠든 거예요?"
'잘 자요."
'내일 연락해요? 꼭 이예요?'

어쩌면, 이건 죽기 전에 보이는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 여자가 나에게 이럴 리 없어.
애초에 SUV에 치어 죽은 건 아닐까?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
좀 전에 봤던 건 꿈인가?
나는 카페로 돌아가지 않는 것인가?

그녀에게 답장을 했다.

'이제 일어났어요.'

-08:11

그녀에게 답신이 왔다.

'저두요.'

의심이 끊이질 않는다.
과연 이건 꿈이 아닌 건가?
이제 난 죽지 않는 건가?
조금 안심이 되는 것은,
그래도 시간을 계속 흐르고 있다는 것.

시간은 흐른다.
멈추지 않는다.

혹시 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 전자시계 속 숫자, 99:99를 난 분명 보았다.
마지막 기회다.
한 번 더 죽는다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때야 말로, 아마 진짜 죽는 것이겠지.
아마도….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래.
어차피 곧 죽을 지도 모르는 거라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또 만날래요?'


-08:12
-08:13
-08:14
-08:15
-08:16
-08:17
-08:18


답신이 왔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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