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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역사를 만든 사람. 장준하는 역사에 끌려간 사람.
게시물ID : history_574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크숟가락
추천 : 4
조회수 : 816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2/09/27 23:03:45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 8월 20일 <미주뉴스앤조이>는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목회하는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유콘스토어스한인교회)를 만나 심경을 물었다. ⓒ미주뉴스앤조이 전현진



- 장준하 선생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나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과 역사에 끌려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다. 일본군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독립군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덴노 헤이카 만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칠 수도 있었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 수도 있었다. 

충직한 군인이 됐을 수도 있었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정부를 장악한 뒤 민정에 이양할 수도 있었고, 독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는 선택의 과정을 통해 역사를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끌려간 사람이다. 

아버지가 일본군에서 빠져나와 독립운동을 하고 반독재투쟁을 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그런 삶을 선택하며 결정한 것 같지 않다. 

아버지는 역사가 이끄는 대로 가신 것이다. 그리고 ‘희생’의 삶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을 통한 ‘희생’ 없이는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아니다.



- 장준하 선생이 싸운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그 시대정신이 교회와 신앙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나. 

역사적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복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는 ‘나서지 않고 지도자에 빌붙으면 잘 살 수 있다’는 시대정신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그 시대정신에 기생하는 독재자, 지도자들과 싸운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대정신이 교회와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예가 국가조찬기도회다. 

지도자에게 빌붙어 아부하면 잘 살게 된다는 것이 역사가 남겨준 교훈이다. 교회도 그것을 배운 셈이다. 

그 결과 한쪽은 축복을 빌어주는 지도자를 향한 맹목적 믿음을 보여줬고, 다른 한쪽은 현실과 신앙을 등진 채 살아갔다. 

전병욱 사건도 이런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 대선 예비 후보 가운데 박근혜 씨 지지율이 가장 높다. (8월 23일 기사입니다.)

박근혜를 향한 인기는 우리 시대 욕망의 투영이다. ‘이 사람이 나의 욕망을 충족해 줄 것’이라는 기대다. 

박정희가 굳건하게 만들어 놓은 구시대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요즘 청년들에게서 아직도 이런 시대정신을 본다. 냉철한 생각과 비판 대신, 인기와 눈앞에 이익을 쫓는 모습 말이다. 

희생을 통해 주변을 밝히려는 모습과 전혀 다르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은 제단 위의 제물이 되기보다, 그 제물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길 원하는 모습은 어떤 삶일까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가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희생’을 결심한 뒤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으로 낡은 시대정신과 싸워 이겼으면 좋겠다.


버스 운전하는 목사로 살기 

-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미국에 오게 되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그때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싱가포르에 6년 동안 선교사로 나가있기도 했다. 

선교지에 있다 보니, 한국교회의 정치 체제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고, 

그 동안 왜곡된 시대정신이 반영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4년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장인어른이 개척해서 건축까지 마친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됐다. 

당시 내가 교회 세습 일순위였던 셈이다. 

그때는 ‘세습’이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사례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뒀다. 


- 평소에는 스쿨버스 운전기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자비량 사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번은 ‘내가 하나님한테 생명을 받았는데, 더 받으면 염치없는 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스쿨버스 운전기사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나는 스스로 ‘삯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삯’만큼만 하자는 것이다. 

요즘 목사들 중 자기가 받은 ‘삯’만큼도 일하지 않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설교 한번하고, 교인들이 사주는 밥 먹으러 다니고 하는 것을 목회로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사명이라고 부르려면 최소한 ‘삯’ 받은 만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http://dabia.net/xe/?mid=free&page=2&document_srl=607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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