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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너와 나의 도서관 (BGM)
게시물ID : panic_518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숏다리코뿔소
추천 : 38
조회수 : 2932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3/07/03 03:22:06




아주 옛날에, 그러니까 7년이나 전에, 집에 불이 났었다.
지금은 도서관에 가는 길이다.
잃어버린 게 있어서다.

“어느 도서관이라도 좋아. 도서관에 들어서면 니은 행의 책꽂이로 향하렴. 그러면, 그리고 나면, 책장과 책장 사이에 어깨보다도 좁은 계단이 숨어있어. 머리를 콩!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야해? 그 도서관에는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있어. 상상도 못할 만큼 그렇게 많은 책이 있어. 그 어떤 책도. 그 도서관? 그 도서관은……….”

집이 불에 홀라당 타고, 남은 것은 없었다. 불은 모든 것을 녹이고 태웠다.

허름한 구식 주택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살던 집이라, 대들보랑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물론 대들보도 기둥도 새까맣게 타서 재가 되었다. 지붕은 말 할 것도 없다.

잿더미 속에서 벨벳, 그러니까 조금 누르스름한 흔적이 보이는 다홍색의 벨벳 앨범을 발견했는데,
그 앨범은 분명 책꽂이 가장 밑, 가장 커다란 칸에서 수십 년을 있었어도 있는 줄도 몰랐던,
아니 있는 둥 마는 둥 했던 그런 앨범이었다.

앨범은 손가락 한 톨 정도의 귀퉁이와 몇 겹의 두툼한 페이지,
갈비뼈 같은 동그란 알루미늄 페이지 고정 틀만 남아있었다.
사진을 덮는 비닐은 열에 녹았는지, 주름처럼 쭈글쭈글 흉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사진들이 하나같이 귀퉁이만 남아 원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퍼즐의 한 조각과 같은 그런, 그런 것들뿐이었다.

별 생각 없이, 타고남아 삐죽하고 남아있는 사진을 훑다가 한 사진에서 손으로 쓴 글귀를 발견했다.
불에 타 끊어진 글귀는 「에게…」 였다. ~에게. 알 수 없었다.

누구에게 라는 걸까.

불이 난 것이 7년이나 지나서, 그 궁금한 ~에게라는 글을 발견한 것도 7년이나 지나서.
지금에서야, 혹시 그 도서관에는 앨범이 남아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바람은 내 걸음을 마주하고 불었다. 여름 바람은 시원하면서도 포근했다.

“죄송한데, 이곳 니은 행은 어느 쪽으로 가면 될까요?”

속삭였다. 사서로 보이는 여자는 나를 보더니, 이유도 없이 미소 지었다.
사서의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을 돌아보니, 정면으로 금방 천정에 걸려있는 니은 푯말이 보였다.

푯말이 살살 흔들렸다.
여름 후텁지근한 풀냄새를 타고 그렇게나 흔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무심결에 물었다.

“저곳에 지하로 통하는 작은, 그러니까 이렇게 어깨처럼 좁고 낮은 비밀 계단이 혹시 있을까요?”

바보 같아서였을까. 사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대신 그녀는 도서관의 유리문을 잠궜다.
유리문을 흔들어 단단히 단속한 그녀는 그리곤, 말없이 앞장서 니은 행의 책장 앞으로 걸었다.
어리둥절해 그녀를 바라만 보던 나를 그녀는 저만치서 손짓해 불렀다.

책장들 틈으로 사라진 그녀를 따라 걸으니, 그리운 냄새가 떠다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이를 먹고 있는 종이의 냄새였다. 그것은 괜히 품위가 있었다.
왠지 그리움이 느껴지는 건, 요즘 들어 책을 손에 쥐는 일이 줄어서 이리라, 혼자 생각을 했다.

책장 사이 어디에도 사서는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몰래몰래 “저기요.” 하고 부르자, 저기 밑에서 “여기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요.”

그녀는 책장 밑에 숨이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책장 밑 계단에 숨어 있었다.
내가 들어가기엔 힘겨워 보이는 아주 좁은 계단이었다.

“몸을 옆으로, 이렇게! 이렇게! 하고 들어오세요.”

그녀가 옆으로 도는 시늉을 하며 나를 이끌었다.
계단은 어두워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몸집이 한참이나 작은 그녀는 냉큼 저 밑까지 내려간 듯,
찰박찰박 조용한 발소리만 들려왔다.

“불을 켤 때까지, 발치 조심하세요…. 할아버지.”

더 밑으로 딛을 수 있는 계단이 없을 때까지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 머리를 부딪칠까, 손을 머리 위로 뻗으니 휘휘 허공이 저어질 뿐,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어떻게 다가왔는지 모를 사서가 말했다.

“죄송해요. 워낙 어두워서 불 켜는 곳을 못 찾겠어요.”
“그…… 죄송하지만, 그 전에 여기에 정말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있나요?”

흠~ 하는 입 울림이 들렸다. 내 말이 너무 추상적이었을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책이라면, 글쎄, 초등학교 때 일기를 쓰던 얇은 노트도 있는, 그런 모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설사 불에 타버린 책이라도, 이곳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나에게는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할 만큼의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다.

세월과 주름, 흰머리와 나의 큰 아들, 작은 딸 그리고 예순일곱 이란 나이가 선사해준 시간이었다.
억지로 떠밀린 시간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그렇게 느껴지는 때도 있다.

“찾으시는 책이 어떤 책이죠?”
“앨범인데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낼 때, 그러니까 정확히는 지갑 속의 사진 쪼가리를 꺼낼 때,
사서가 “아! 앨범!” 하고 짧게 환호하듯 소리쳤다.
신기하게도 사서의 외침과 거의 맞아 떨어지게 저기 저편으로 등불이 들어왔다.
환하진 않았지만, 이 까만 도서관에선 충분히 밝은 빛이었다.

“저기 저곳일거예요. 할아버지.”

사서는 할 일을 다 한 듯 보였다. 그녀의 도움을 만류하고 혼자 걸었다.
정말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있는 지도 몰랐다.
불빛은 가까운 듯 아주 멀었다.
저 멀리서 비추는 불빛에 어스름하게 주변의 책 제목들이 스쳤다.

두서없는 책 제목들은 마치, 다른 도서관들과는 아주 다르게,
가나다 순이 아닌, 시간 순으로 책을 정리해 놓은 것 같았다.
그 시간 순이란 것이 어떤 것이냐 설명하기엔 내 말주변이 너무 보잘 것 없다.

차라리 보이는 대로 소리 내어 읽어 보자면, 잉태, 출생, 첫 말, 첫 걸음,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
대학교, 첫 입맞춤, 첫 사랑, 첫 실연, 첫 술, 첫 담배, 첫 연애, 첫 밤………….

한 시간이나 걸어서 도착한 등불 밑은 길고 넓기만 하던, 지나온 길에 비해 아늑하고, 또 아담했다.
기분 탓이다. 그래도 그 아늑함에 기대어, 책장을 등받이 삼아 천천히 앨범을 찾았다.

누르스름한 기운이 남아있는 다홍색의 벨벳 앨범.
아주 특이한 그 재질을 찾는 것에 그리 오랜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니었다.

「Since 1947」

아아, 앨범의 머리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구나.
기억하지 못 했다. 책장을 기댄 채 자리에 앉았다.

허벅지에 보기 편하도록 얹어 놓은 앨범은 퍽도 묵직했다.
엄지손가락을 비집어 앨범의 아무 곳이나 펼치니, 양 페이지로 가득 사진이 담겨 있었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사진을 보니, 내가 찾던 그 앨범이 맞는 것 같았다.
불에 타버린 그 앨범이 이렇게 말끔하게 보존 되어 있다니.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들었다.

「에게…」

에게, 쓰여 있는 그 배경의 하늘색을 쫓아 페이지를 한 장씩 넘겼다.
페이지를 넘길 적마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저 웃겼다.

그 옛날 옆집 살던 옥이와 쭈뼛거리며 찍은 사진이 그랬다.
꽃다발을, 그러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는 나의 고등학교 졸업 사진도 그랬다.
바다를 배경으로 폼을 재고 있는 모습은 괜히 쑥스러웠다.
어느 술집에선가 담배를 물고 찍은 사진도 그랬다.
아내와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 여러 장 나왔다. 그건 흐뭇했다.
큰 아들의 돌잔치 사진은 그리웠다.
작은 딸의 결혼사진은 아쉬웠다.
손녀딸의 사진은 앙증맞았다.

한 장씩 페이지를 앞으로 넘겼다. 한 장씩. 시간은 많았다.

에게…를 찾는 것도 금방이었다.
조금 더 늦어도 괜찮을 것을.

의외로 별 것도 아닌 사진이잖아.

울퉁불퉁 못생긴 바위 암초들 위에 느긋하게 출렁이는 바다.
한가로운 구름도 찍혀있다. 귀퉁이에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라는 글귀가 적혀있고,
글귀 밑으론 어머니와 나. 아직 걸음도 못 땐 듯 다리가 짧고, 몸이 둥그런 나.
나는 그렇게 어머니에게 매달려 있었다.

이런 것을 위해, 그렇게나 걸어 왔던가. 비닐 속에서 사진을 꺼내어 가까이 들고 봤다.
한참이나 사진을 보다, 그제서야 이 사진이 그토록 찾고 싶던 이유가 떠올라 사진을 뒤집었다.
그것은 하얀 바탕에 곱게 정성들여 쓰인 편지였다.

「이건, 아들이 태어나고 1년 되는 날의 바다야. 그 바다 위에 노랗게 빛나는 건, 아들이 1년 동안 쬐던 햇님이고, 그 옆으로 푸르른 건 하늘이야.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건 아들의 1년을 기뻐하는 엄마랑, 그 가슴에 안긴 건 아들이야. 아들 사랑해. 돌잔치 못해줘서 미안해? 아들의 첫 돌을 기념하며.」

사서가 따라 온 모양이었다.

“찾아가시겠어요?”
“대여가 될까요?”
“대여라니요. 원래부터 할아버지의 사진인걸요.”

그러고 보니, 빌려 가실래요? 가 아닌 찾아가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앨범을 두 손으로 들어보았더니, 역시나 묵직했다.
집까지 들고 가기엔 너무 힘겨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걱정이었다.

“아닙니다. 또 잃어버리면, 다시는 못 볼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할아버지. 다시는 잊지 않으실 거예요.”

아니다. 앨범은 너무 무거웠다.
사진 한 장만을 손에 들고 있어났다.

“그러면 이 사진만 가져가도 될까요?”

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멀리 우리가 들어왔던 좁은 계단에서 밖의 불빛이 들이치고 있었다.
사서는 정중히 그리고 천천히 나와 그곳을 향해 걸었다.
걷는 동안, 내가 이 도서관을 어떻게 알았더라… 하는 생각뿐이었다.
확실치 않았지만 나는 이 도서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같다.

아마도 내가 물었을 것이다.

“아무 도서관이나 가면 어떻게 찾아? 이름이라도 알아야 찾아가지? 응? 엄마?”

그 따뜻한 미소가 기억난다.
그 따뜻한 손길도 기억난다.
부서지며 쏟아지던 머리칼도.
가녀리던 손가락의 하얀색도.

“이름 같은 거, 몰라도 찾아 갈 수 있어.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 곳은 우리 아들이랑 엄마만의 도서관이야.”

너와 나의 도서관.
이름 따위 몰라도 찾아 올 수 있겠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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